인터뷰 : 리타 맥러플린
Socialist Review 2009년 2월
출처 : http://www.socialistreview.org.uk/article.php?articlenumber=10710



 

1950년대 미국의 레즈비언들은 끔찍한 공식적 차별을 받았다.
LGBT 역사가 릴리언 패더먼[각주:1]은 리타 맥러플린에게 상황이 극적으로 변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1950년대에 노동계급 레즈비언으로서 커밍아웃하는 것은 어떤 일이었습니까?

 

릴리언 패더먼


1950년대는 아마도 미국에서 레즈비언으로 산다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였을 겁니다. 나는 오늘날 레즈비언들에게 서구 세계가 어떤 곳인지 보고 있는데 이건 정말 다른 세상이지요. 물론 젊은 레즈비언들도 가족들과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여전히 어떤 직장에서는 커밍아웃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당시[1950년대]에 레즈비언들이 경험한 것과 같은 끊임없는 공포는 알지 못합니다. 




나는 노동계급 레즈비언이었고 '오픈 도어'라는 노동계급 레즈비언 술집에서 한 여성을 만난 뒤 처음 커밍아웃 했습니다. 그게 1956년, 내가 아직 미성년자라 가짜 신분증을 갖고 다니던 때였죠. 제 회고록 ≪약속의 땅에서 벌거벗겨진(Naked in the Promised Land)≫에서 전 길을 건너는 일이 어땠는지 묘사했습니다. 한번은 제 첫 연인과 손을 잡고 무단횡단을 했는데 그녀는 부치였어요. 당시에 여겨지기에 남자처럼 옷을 입었죠. 이제는 모두가 바지와 정장 재킷을 입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습니다. 경찰관이 우리를 멈춰 세웠고, 표면적으로는 무단횡단 때문이었는데, 강제로 차에 태우더니 한 블록 돌아가서 차를 세웠습니다. 아주 무서웠어요. 경찰관은 그녀를 차에서 내리게 했죠. 전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내가 체포되는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는 내게 설교를 하더군요. 나는 잔(그 여성의 이름)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그녀는 나쁜 부류라고 말하면서요. 결국에는 그는 우리를 그냥 보내줬습니다.

 

제 책 ≪이상한 소녀들과 비밀스런 연인들(Odd Girls and Twilight Lovers)≫을 쓰기 위해 인터뷰를 하면서 부치와 팸들이 희롱당하고 때때로 강간당한 훨씬 더 끔찍한 얘기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술집 불시 단속에 대한 무서운 얘기들도 들었죠. 내가 술집에 갔을 때 불시 단속이 있고 난 직후라 풍기 단속 경찰관들 몇몇만 남은 채 술집이 텅 비어 있던 적도 많았습니다.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의 마녀사냥이 벌어지던 때 레즈비언들이 어떻게 다뤄졌는지 얘기해주시겠습니까?


매카시 시대에 생계를 걱정한 것은 특히 중간계급 여성들이었습니다. 선생님이거나 어디든 정부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품행이 단정치 못하다는 이유로 해고될 수 있었습니다. 정부에서 일하는 레즈비언들에 대한 마녀사냥이 있었고 그들은 해고되는 일이 다반사였죠.


나는 UCLA 대학생이었는데 학생들은 입학할 때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모든 신입생이 받아야 했던 심리 검사에 계속해서 나온 이런 질문들이 기억납니다. "동성과 키스하는 꿈을 꾼 적이 있습니까?", "동성에게 연모의 감정이나 성적인 감정을 느낍니까?" 하지만 동성애자인 사람들은 모두 UCLA에 들어올 정도로 똑똑하다면 그런 질문엔 어떤 것이든 아니오 라고 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한번은 조사를 하다가 <학교와 사회>라는 잡지에 실린 어떤 논문을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1954년, 내가 신입생이 되기 4년 전이었습니다. 그 논문은 UCLA 학생과장과 학생차장이 공동 집필한 것이었는데 요지는 전국의 학생과장들의 임무는 동성애자들을 색출하고 그들이 동성애 치료를 받아서 변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변할 마음이 없다면 그들이 동성애라는 질병을 다른 학생들에게 퍼트리지 않도록 그들을 퇴학시켜야 했죠. 이게 당시 분위기였습니다. 우리에겐 경계해야 하고 숨겨야 하고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할 끊임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중간계급 레즈비언 집단 또는 단체와 노동계급 레즈비언 술집 문화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었나요?


마를렌 디트리히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중간계급 레즈비언들은 대부분 1950년대까지 - 그때는 이전 시대들과 달랐어요 - 술집에 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간혹 예외가 있긴 했죠. 예를 들면 로스앤젤레스에 나도 자주 갔던 칵테일 라운지가 있었습니다. 복고풍 스타일의 술집이었는데 그곳 공동 소유주이자 연예인이었던 베벌리 쇼(Beverly Shaw)는 마를렌 디트리히(Marlene Dietrich)[각주:2]를 자신의 모델로 삼았습니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치마를 입거나 남성용 재킷을 입고 나비넥타이를 매고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렀죠. 중간계급 레즈비언들은 그곳에 가는 걸 꽤 편하게 느꼈습니다. 쇼가 풍기 단속 경찰들에게 상납을 한다는 소문이 있었고 그러니 그곳은 안전한 장소였던 거죠.

 

하지만 대다수 중간계급 레즈비언들은 술집들이 자주 불시 단속에 걸렸기 때문에 술집을 두려워했습니다. 미국의 모든 대도시에서 그런 실정이었죠. 레즈비언 술집이나 레즈비언/게이 술집은 안전하지 않았고 그곳에서 체포된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신문에 실리곤 했습니다. 직장을 잃을 수도 있었죠. 그러니 교사나 사회복지사, 간호사 같이 많은 교육을 받은 중간계급 레즈비언들은 체포돼서 모든 걸 잃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집에서 파티를 하면서 안전하다고 여긴 일들을 할 수 있는 친구들의 범위를 넓혀갔어요.  


노동계급 레즈비언들의 경우엔 조그만 방에 20, 30 또는 40 명이 넘는 친구들을 초대하는 게 훨씬 더 힘들었을 테죠. 그러니 친구를 사귀고 커뮤니티를 형성할 유일한 공간은 술집뿐이었습니다. 


많은 노동계급 레즈비언들에게 술집 문화는 정말로 경이로운 것이었는데 그곳이 친구 관계를 형성하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될 수 있었죠. 부치라면 부치 옷차림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매우 위험했습니다. 또 다른 위험도 있었죠. 1950년대와 1960년대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는 알콜 중독이 아주 심각했습니다. 술을 사먹지 않고는 술집에 있을 수 없었고 밤새도록 술 한 잔으로 버틸 수는 없었기 때문이죠. [술집에] 머무르고 싶다면 여러 잔을 마셔야 했어요. 



1969년 뉴욕에서 벌어진 스톤월 항쟁에서 레즈비언과 게이들이 경찰에 맞서 반격했습니다. 이 사건은 얼마나 중요한 전환점이었나요?


스톤월 항쟁은 확실히 게이와 레즈비언에게 중요한 아이콘인데요, 항쟁이 벌어진 그때 미국에서는 페미니즘이 매우 강력해지고 있었고 레즈비언 페미니즘도 막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레즈비언 페미니즘은 많은 레즈비언들에게, 특히 1970년대에 절대적으로 중요했습니다. 그들에겐 레즈비언 페미니즘이 스톤월 항쟁보다 훨씬 더 결정적이었죠. 그때는 미국에서 정말로 경이로운 시대였습니다. 온갖 종류의 출판사들과 설립됐고 여성 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서점들이 생겨났습니다. 아주 많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철학, 사회 철학이 1970년대에 쓰였습니다. 1970년대는 레즈비언 사상의 부흥기였죠.   



공민권 운동은 급진적인 소수 인종 동성애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공민권 운동은 소수 인종 동성애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만, 다른 레즈비언과 게이 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1960년대에 미국에서 흑인들의 저항, 라티노들의 저항, 또는 치카노들의 저항, 그리고 1960년대에 일어난 미국 원주민들과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항의시위와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항의시위의 역사가 없었다면 스톤월 항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천천히 여성들은 주변 - 모든 여성들 - 을 돌아봤고 그들이 공민권 시위에 참여하고 있지만 여성으로서 자유롭지는 않다는 것 그리고 지금이 여성 운동을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매우 흥미롭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민권 운동을 둘러싼 활동이 결국에는 동성애자들도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을 일깨웠고, 그렇게 해서 항의운동이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1960년대 공민권 운동이 없었다면 동성애자 운동이나 페미니스트 운동,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운동은 없었을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법률과 사회적 용인 때문에 동성애자들이 평등권을 누린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처럼 여전히 가야할 길이 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평등을 쟁취하는 데 얼마나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십니까?


빗장은 항상 들어 올려 집니다. 기대는 점점 더 높아집니다. 이것은 굉장한 일이죠. 1950년대에 나는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30년 전에도 나는 학자로서 내가 공개적으로 동성애에 대해 글을 쓸 수 있을 거라는 꿈을 꾸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대통령이 공개적인 동성애자 주교, 진 로빈슨[각주:3]에게 취임 기념행사에서 축도를 요청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일은 정말 믿기 힘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1950년대뿐만 아니라 현재를 경험한 사람이고, 따라서 더 많을 것을 원합니다. 나는 지금 결혼권을 원합니다. 파트너와 내가 37년 동안 함께했고 사회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기쁜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인 이유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결혼한 이성애자들은 누리지만 우리는 누리지 못하는 연방정부 혜택이 1천 가지가 넘습니다. 


우리는 매우 많은 진보를 이룩했지만, 더 많은 진보를 이룰수록 진정한 평등에 앞서 가야할 길이 여전히 멀다는 것을 더 많이 알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용감하고 대담하게 우리는 모든 것을 원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은 멋진 일입니다. 1950년대에 우리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제발 우리를 박해하지 말아 달라. 우리가 요구하는 건 그게 전부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입니다. 우리는 아직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1950년대에 내가 꿈꿨던 것보다 우리가 이제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 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갔습니다.






번역 : 나라 _ 동성애자인권연대

 

  1. 릴리안 패더먼(Lillian Faderman) : 저명한 레즈비언 역사가. 1940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Gay L. A.: A History of Sexual Outlaws, Power Politics, And Lipstick Lesbians (2006), To Believe in Women: What Lesbians Have Done For America - A History (1999)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본문으로]
  2. 마를렌 디트리히(Marlene Dietrich)(1901-1992) : 독일 출신 영화배우 겸 가수. '상하이 익스프레스'(1932)등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30년대 헐리우드에 진출에 큰 인기를 얻었다. 그녀는 바이섹슈얼이었고, 남장을 하고 많은 공연을 했다. [본문으로]
  3. 진 로빈슨(Gene Robinson) : 미국 성공회 뉴햄프셔 교구 주교. 2003년 동성애자임을 밝힌 성직자로서 최초로 주교 서품을 받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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