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필자 주 - 해당 원고는 2020년 9월호 월간미술에 기고한 리뷰를 수정‧보완한 글입니다. - 다음의 글을 같이 읽어주세요. 남웅, 「‘타자’와 ‘타자-되기’ 사이 빗금의 연대」, 프로젝트 해시태그2020 서울퀴어콜렉티브 리뷰. 링크: http://www.projecthashtag.net/#sqc-review |
지난여름 퀴어를 주요 소재로 삼는 전시들이 진행되었다. 탈영역우정국에서 열린 《작은불화/Minor infecilities》(2020.7.18-8.2)는 아시아 큐레이터들이 성소수자 작가들을 추천하여 전시를 기획한다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전시 제목은 공간의 위계와 승리자의 거대서사에 저항하는데서 나아가, 질서에 예속되고 제도화되는 동성애 규범성(homonormativity)을 비판하기 위한 고심 끝에 나온 결과였을 것이다. 이는 아시아의 지역 정세와 문화적 맥락을 비교하고 구체화하기보다 ‘아시아’라는 지역적 소재를 경유하며 퀴어적 존재가 불화를 바탕하고 있다는 선언을 감각적으로 시각화하는 작업에 좀 더 가깝다. 하지만 ‘작은’ 이라는 수사는 이러한 실천이 전시장에 한시적으로 용인되는데 대해 수세적인 응답은 아닌지, 집단의 감각을 져버리며 닫힌 쾌락에 조응하는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든다.
그럼에도 전시는 당대의 환경 위에서 작가들이 몸의 감각을 어떻게 퀴어적 관점으로 투과하여 동시대에 개입하는지 보여준다. 가령 최장원의 <Antiidol-합당한>(2020)은 요한묵시록에 기록된 하나님의 양에 착안한다. 일곱 눈의 황금양 머리는 그래픽 화면으로 부유하면서 ‘언제나 당신의 사랑이 되겠다’는 문장에 보어를 ‘이웃/동료/친구/가족/치유/축복/신/진실/목소리/지금/이름’으로 바꿔가며 화면 바깥을 굽어보는가 하면, 화면 앞에 양초와 사탕과 비누를 제단처럼 배치한다(<Antiidol-믿음>). 작가는 ‘혐오를 행하기 위한 희생’이라고 문학적 모티프를 붙이지만, 주관적 설명에 앞서 관객들은 작업이 어떤 질료와 양태로 구성되는가를 먼저 지각할 것이다.
세계를 밝히고 사람을 씻기고 먹이는 양초-비누-사탕은 녹아 사라지면서 몸과 공간에 틈입하고 밀착하며 변형시키는데, 이러한 반(反)물질적 물질, 또는 반투명의 취약하고 예민한 물성은 날선 유리조각에 비닐이 걸쳐 허공에 나부끼는 형상 <Anastomosis>(2020)으로 연결된다. 녹기 쉽고 오염되기 쉬우며 깨지고 찢어지기 쉬운 질료들은 이쪽과 저쪽, 혐오와 환대, 죽음과 삶 사이에서 날카롭게 공간을 가르고 나부끼며 소음을 낸다. 그것은 혐오를 행하는 장치들 또한 불화를 실천하는 감각에 여과되고 전유되고 있음을 우의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곧장 김두진의 <Hermes>(2016-2017)로 이어진다. 300X180사이즈의 큰 화면의 그래픽은 정교한 노동의 밀도를 축적한 결과물이다. 잘게 부서질 듯한 사슴과(科) 동물들의 작은 머리뼈들이 한데 엉켜낸 형상이 성애적 포즈를 취하는 신화 속 남성이라는 점은, 사회의 이상과 규범이 무엇을 지배하고 파괴하며 구성되는가를 다시금 파괴적으로 비틀어 시각화한다.
김두진 작업이 가상의 물질적 효과를 축조한다면, 최장원은 투명하고 사라지기 쉬운 질료성을 부각함으로써 상보적으로 서사의 공간을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종교와 제의를 소재로 삼는 이들 작업은, 비슷한 시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또 다른 가족을 찾아서》(2020.05.22–08.23)에 듀킴이 K-팝 뮤직비디오 형식으로 선보인 두 번째 싱글 <우리의 밤이 미래가 될 때까지☆ Kiss of Chaos>(2020)의 퀴어 샤머니즘적 모티프에도 비교해봄직 하다. 승자의 신화를 구축하는 규범적 공간을 찢고 부수는 시도는 깨지기 쉽고 사라지기 쉬운 부정적 질료 또는 신화의 어긋난 독해로 수행된다. 이는 강제적으로 제도와 사회적 인식으로부터 배제되고 낙인찍히는 고립 속에 불안한 삶을 지속하지만, 적극적으로 프로파간다를 미끄러지는 비규범적인 망상을 행하는 실천적 동력에 공명한다. 그렇다면 취약한 물적 지지기반으로부터 정상성의 질서를 전유하고 부정하며 서사를 헤쳐 모아내는 재현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작은 불화’에 참여하는 트랜스젠더 여성작가 이솔라 통(Isola Tong)은 마닐라 도심에 있는 애로스 공원(Arroceros Forest Park)에 도시적 이동성과 더불어 다양한 종들이 교차하고 공존하는 숲에 퀴어 영토성을 접목하여 도심지 숲의 속성을 비바리움(vivarium)으로, 이른바 자가생육장치로 옮긴다. 엉성하게 축조된 설치물 위에 비바리움 무빙이미지가 계속해서 재생되는 모습은 척박한 인프라에서도 자가생태가 가능한 고립된 야생으로서 퀴어 생태를 그린다. 하지만 지속 가능한 퀴어의 생존을 보여주는 작업은, 개발과 치안으로부터 어떤 저항과 방어술을 축조하고 제안하는가에 시선을 두기보다는 전시 가능한 퀴어의 이미지를, 자조적 공간의 구축 가능성을 제안하는데 그친다. 하여 묻게 된다. 작가가 제안하는 자립의 공간은 전시장이 제공하는 안전으로부터 어떤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가. 누가 제도의 수혜자가 되고 누가 탈락하여 표적이 되는가. 그로부터 포획되기 쉬운 자조와 고립, 체념과 냉소로부터 재현의 동력을 어떻게 확보해나가는가.
최근 발간한 유성원의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2020)은 찜방을 이용하는 게이 남성을 경유하여 취약한 신체들을 포위하는 환경이 어떻게 작동하고 그것이 어떻게 취약한 몸을 구성하는가를 이야기하며 앞의 전시를 보충한다. 대중에게 게이 섹스를 전시하는 그의 문장은 ‘남성의 꼬추를 빨고 항문에 넣고 정액을 먹는’ 노골적인 행위 묘사로 자신의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설명한다. 이는 게이커뮤니티의 울타리 역시 매력자원이 위계로 작동하며 누구라도 자의적이건 타의적이건 외로움과 불안에 자유로울 수 없음을 토로한다. 취약함은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의도를 드러내며 무엇이 우리를 취약하게 만드는지 살피자는 문장은, 퀴어 매니페스토의 선언적 자긍심이 배제하고 있는 이면을, 빈곤과 늙어감과 질병의 손상과 그럼에도 살아내기 위해 일회적이고 익명적이며 언제든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장소에 투신하듯 쾌락을 향유하는 의미를 세공한다. 손상과 결핍으로 구성되는 정체성의 서사는 앞서 전시에서 볼 수 있던 취약한 물성의 부정성에 응답하는 게토의 언어로 공명한다. 이는 자신의 섹스가 HIV/AIDS 운동의 언어로 연결되는 맥락을 설명하며 퀴어의 감각적 재현이 퀴어 커뮤니티의 성적 실천과 더불어 정치적 운동에 연결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유성원은 SNS를 기반으로 글을 남겨왔지만 출판노동자라는 본업의 포지션을 십분 활용하여 출판의 주류시장 위에서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분간할 수 없는 파열의 목소리들을 생산하며 언어의 지분을 확보해나간다. 제도적 안전이 보장되는 장소에서 퀴어적 재현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근간의 변화이자 성과이지만, 한시적인 안전과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적 환경 너머를 살펴야 함을 역설한다. 그런 점에 《또 다른 가족을 찾아서》로 다시 들어가 이강승의 <미래의 심상들>(2020)을 주목한다. 전시장 한쪽에 그가 연출한 라운지 형태의 공간은 《작은 불화》와 ‘게이 찜방’ 사이 어디쯤에 위치할 법한 공동의 장소를 연결시킨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작업 외에도 그가 선별한 다른 작가들의 작업을 전시하는가 하면, 오혜진 평론가와 함께 컬렉션을 꾸려 퀴어 서적과 자료 모음을 비치한다. 시기와 장르, 대상과 메시지를 달리하는 자료들은 상이한 시공의 기록과 표상을 연결하며 강제적인 침묵의 역사로부터 길어낸 언어들이 조우하고 교차하는 광장의 효과를 이끌어낸다. 그것은 사람이 드나들며 눈길을 주고받는 느슨한 네트워크로 펼쳐내는데 나아가 전시장에 배치된 주변 작업들과 연결성을 고려함으로써 전시장 너머 공론의 윤곽을, 손상되고 단절되며 취약한 몸들이 내는 연대의 리듬을, 그것들이 한시적으로나마 끊임없이 점거하는 장소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한다…
아니.
우리는 이미 전시장 바깥에서 고통스럽고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연대- 라는 단어를 놓고 싶지 않다- 의 불협화음을 목도하고 그 속에 놓여 있지 않을까.
편재遍在하는 권력의 복잡한 양태 속에서 취약한 언어들은 여전히 촘촘하게 배열되지 못한 자리에서 불신과 삭제를 강제 당한다. 이성애 젠더이원론적 구조로부터 주변으로 배제되는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폭력에 저항하며 집단의 목소리를 내는 정동의 일원으로서 참여하고 연대하며 투쟁해온 트랜스젠더/퀴어들이 이성애 헤게모니에 부정당하고 여지없이 심문의 대상이 되는 장면들을 마주한다. 나아가 게이 섹슈얼리티 문화에 대한 맥락과 구조를 배제한 채 이성애적 관점으로 재단되고 공격당하는 국면들을 읽는다.
1) 여기서 누가 더 취약하고 심각한 삶의 환경에 놓여있는지 우선순위를 따지는 것은 논점을 망친다. 중요한 것은 타인의 삶이 갖는 다른 맥락을 이해하지 않은 채 일방적인 권력의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그의 생애가 머물러온 다른 삶의 풍경을 지배적 이성애와 젠더이원론의 프레임을 적용하여 탈맥락화하기 쉽다는 점이다. 2) 지금의 비판은, 자신이 대표로 있는 회사 SNS 공식 계정에 트위터에 업로드된 게이 섹스 영상을 다운받아 올렸다 시인하고 스스로 세상을 등진 이의 과오를 비호하는 것이 아니다. 퀴어 커뮤니티, 적시하면 트위터의 섹계를 비롯한 게이 섹슈얼리티 전반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아니다. 게이커뮤니티에 종종 수식되었던 ‘합의에 의한 관계’ 라는 형식적 평등은 종종 전형적인 논리로 쓰이지만, 실상 내부에 누가 관계로부터 거절할 수 없었는지, 협상권을 접고 양보한 이들은 누구였는지, 그렇게 관계로부터 취약한 위치에 있거나 관계의 후순위로 밀려난 이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야기조차 된 바 없다. 퀴어 커뮤니티 또한 여성혐오로부터, 빈곤으로부터, 노년에 대한 두려움과 젊음의 위계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3) 하지만 피‧가해의 통념적 원칙을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그가 초래한 상황의 시시비비를 따져 온전히 짊어야할 잘못과 책임까지도 박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아가 그것은 게이 남성들이 수행해온 섹계의 특수한 문화를 살펴볼 겨를을 갖기도 전에 원론적인 엄숙주의를 반복적으로 행사함으로써 섹계의 참여자들을 시민의 자격으로부터 추방시킨다. 4) 하지만 오해하지 말기를. 원칙을 반대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커뮤니티 내부의 관계가 어떤 배경과 양태로 수행되고 있는가를 제대로 이야기하기도 전에 형식적인 피‧가해의 구도를 일방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영상에 참여한 이들이 행사했을 협상의 역량과 성적 실천의 주체적 의도까지 말살한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를 비판하는 당신들이 편들고 있는 영상 속 등장인물에게 피해자프레임을 씌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5) 우리는 젠더이원론적 권력을 구성하고 강화하는 시헤남의 카르텔 속에 공공연히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경제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지정성별 남성으로 불안정하게 정체화하거나 미끄러져온 이들이 게토를 커뮤니티로 구축하며 만들어온 ‘형식적 평등’을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내부에 한계와 문제를 품고 있을지언정 무시하고 삭제할 수 없는 역사적 구성물이다. 흔히 커뮤니티라고 언급하는 퀴어-성소수자의 역사는 아직 제 언어를 생성하고 전래하는데 척박했을 뿐더러 언어의 자격마저 박탈당해왔던 음지의 서사를 품고 있다. 구조적 빈틈을 읽는 실천은 퀴어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숨겨진 지층과 인프라를 비판적으로 읽으며 발굴하고 생산할 것을 포함한다. (재차 강조하지만 그것은 퀴어 섹슈얼리티에 일방적으로 도덕률을 들이대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동시에 그 안에서 비폭력과 평등의 가치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야 하는지를 과제로 남긴다.
공동의 목소리는 단일한 언어로 발화될 수 없고, 한 방향을 향하기보다 팽팽하게 충돌하고 경합하는 과정에 축조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서로를 삭제하고 일반화로 뭉개는 극단적 적대는 어떻게 예방할 수 있을까. 적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면 최소한 절멸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들이 필요할까. 취약한 기반에 생존해내는 이들에게 관계 또한 취약한 조건 위에 구축될 수밖에 없다면, 여기서 축조해야 할 공론장의 기술은 무엇인가. 부서지고 사라지기 쉬운 물성으로부터, 또는 가상의 공동체 위에서 서로의 몸을 욕망하고 관계 맺으며 규범적 공간을 가르는 공백의 자리는, 일인칭 자아로부터 끊임없이 ‘우리’를 가리키게 될 신호를 기다리고 가려진 지층의 뒤틀린 서사들을 찾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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