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리(소소한부부)
나와 '소주'는 2019년 5월, 소소한 결혼식을 올린 동성부부이다.
지난 11월 5일, 우리 부부가 당사자로서 참여한 '동성 배우자 건강보험 피부양자 소송'의 마지막 변론기일이 있었다. 여러 소송 사건에서 단체 이름으로 의견서도 내보고, 활동가로서 기자회견에서 발언도 해봤지만, 당사자로서 소송에 임하기는 처음이었다. 당사자라고는 하지만 정확히 따지자면, 형식적으로 이번 소송의 원고는 소주 단 한 명이다. 지난 사건으로 피부양자 지위가 변동된 건 소주이고, 건강보험상 내 위상이 바뀌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소송에서 나의 지위는 해당 소송과 직접적으로 관련은 없는, 원고나 피고가 아닌 제3자인 '소외인'이다. 그래서 비록 재판장이 나를 호명할 때는 소주의 '배우자'라 칭하고, 소장과 피고(건강보험공단) 측 서면에는 내 이름이 뻔질나게 등장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법원에서 내게 주어진 발언 기회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어쨌든 원고도, 피고도, 심지어 대리인도 아니기에.
변론기일은 총 세 번이 있었다. 5월 28일 진행된 첫 번째 기일에서는 사건의 취지를 밝히고 이후 소송 절차에 대해 조율하였다. 8월 20일, 두 번째 기일에서는 원고 측과 피고 측의 주장에 대해 정리하고, 우리 측에서 준비한 증인에 대한 신문(사실혼에 대한 법학 전문가로서의 소견)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11월 5일 진행된 이번 마지막 기일에서는 우리 측에서 준비한 당사자 본인 신문, 즉 소주에 대한 신문이 있었다. 우리 관계에 대해 법정에서 확실히 밝히고 사건에 대한 경위를 분명히 하기 위해 준비한 신문이었다. 이렇게 진행된 세 번의 기일 중 원래대로라면 내가 발언할 여지는 없었다.
원래 첫 번째 기일의 마지막 순간에는 당사자(소주) 진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재판장 曰, "원고는 다음 기일 때 본인 신문할 것이니 배우자 분께 진술 기회 드리겠다." 어어... 당연히 말할 기회가 없겠거니 하고 방심하고 있었다. 결국 소주가 준비했던 진술 내용을 읽는 것으로 대신했다. 소송에 임하는 심정과 취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우리의 이야기지만, '나의 언어'는 아니었다.
두 번째 기일 때는 전혀 발언 기회가 없었고, 그렇게 맞이한 세 번째 기일 날 아침, 피고 측에서 제출한 변론 서면을 받아보았다. 23페이지(참고자료까지 하면 무려 78페이지)에 다다르는 문서를 단숨에 읽어 내렸다. 미리 보지도 못하게 당일 새벽 5시경 제출된 서면에는 우리의 관계를 부정하는 말들로 가득 차 있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법원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 재판장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도 열심히 우리의 관계를 부정하는 건보 측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써 내려갔다. 첫 번째 기일처럼 재판장이 이번에도 내게 마지막 진술 기회를 주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바람과는 다르게 내게 발언 기회는 주어지지 않고 기일은 종료되었다. 그렇다면 어쩌겠느냐.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해야지만 속이 풀리겠으니, 내가 말할 수 있는 곳에서 말할 수밖에.
▼ 오소리가 법정에서 다 하지 못한 이야기 ▼ (아래 더보기 클릭)
부당합니다. 사실 너무 화가 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부정 당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단순히 반대하는 게 아니라 관계 자체가 없던 취급당하는 게 어떤 기분일지 모르실 겁니다.
만약 이성 커플이라면, 생전 처음 보는 남이라 할지라도 서류만 갖추면, 심지어 혼인신고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저희는 300여 명에 달하는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음에도, 서로를 부양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음에도, 모든 서류를 갖춰 건보공단에 제출했음에도, 지금 이 자리에서 저희는 저희의 관계를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올린 결혼은 결혼이 아니라고 하고, 저희 부부는 부부관계가 아니라고 하고, 함께 돌보며 살아가지만 생활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지 의심받는 심히 모욕적인 상황을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이성 커플은 이러한 증명이 필요 없는데 왜 저희는 끊임없이 저희의 관계를 증명해야 하나요? 너무나도 부당합니다.
그럼에도, 이 부당하고 모욕적인 상황들을 감내하면서도 저희가 이 소송에 임하는 것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국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인정받고자 함이고, 저희 둘의 관계에 대해 제도적으로 보호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할지 언데, 왜 저희만은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나요.
오늘 아침, 피고 측에서 제출한 서면을 읽어보았습니다. 철저하게도 저희의 관계를 부정하는 내용을,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끝까지 보았습니다. 해당 서면에서는 인천지방법원의 판결문을 인용한 부분이 있는데요. 판결문의 구절 중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비록 혼인제도의 의미가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고 시대의 윤리나 도덕관념의 변화에 따라 변화할 수는 있으나..."
해당 판결은 2004년의 판결입니다. 무려 17년 전의 세상입니다. 17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과거,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받지 못하던 시절, '시민'이란 그룹에 여성은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시민에 여성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면 뭇매를 맞을 것입니다. 이렇듯 단어는 시대의 상황에 따라 변화합니다. 피고 측에서 그렇게나 꼬투리 잡는 '부부'나 '배우자'란 단어도 그렇습니다. 혼인제도의 의미 또한 변화했습니다. 미국에선 2015년에 동성혼이 법제화됐고, 이웃나라 대만에서도 몇 년 전 동성혼이 법제화됐습니다. 유엔과 같은 세계기구에서도 동성커플의 관계 또한 법제도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한국 정부에 권고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변화는 있습니다. 동성커플에 대한 우호적인 사회적 인식은 꾸준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많은 동성커플들이 서로의 사랑하는 관계를 공표하며 결혼식을 올리고 있습니다. 없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이제 법제도적인 변화가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재판장님, 부디 한국 사회의 평등을 앞당길 수 있도록,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믿음을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소송에 대한 판결 선고는 1월 7일 내려진다. 선고일 바로 전날인 1월 6일은, 나와 소주가 만난 지 9 주년 되는 기념일이다. 선고 결과가 기념일 선물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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