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언젠가부터 너도 나도 공정이라는 단어를 숨쉬듯 내뱉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정이라는 단어가 좋았다. 여러 은행에서 남성 노동자를 많이 합격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여성 노동자들의 채용 점수를 낮춰서 우수수 탈락시키고, 조금이라도 삐까뻔쩍한 일터엔 사돈의 팔촌까지 낙하산으로 입사하는 현실이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공정한 세상이 도래하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말하는 공정과, 저들이 말하는 공정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점차 공정이라는 단어는 일터를 변화시키려고 열심히 투쟁하는 나와 동료의 입을 막는 논리가 되어버렸다. 마치 이런 말이 끊임없이 들리는 느낌이었다.
'이 회사에 입사하기위해, 전문직이 되기 위해 노-력한 내가 누리는 특권을 (노-력도 하지 않은) 너가 함께 누리는건 공정하지 않아!'
이제는 공정이라는 단어가 지긋지긋했다. 인터넷 뉴스에서 공정이라는 단어가 보이면 실수로라도 누르지 않았다. 그런데 김정희원님은 달랐다. 김정희원님은 우리의 곁에서 공정을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2022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여름특강에서 김정희원님이 '그들만의 공정: 공정의 해체와 재구성' 을 주제로 강의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냉큼 신청할 수 밖에 없었다. 지난 8월 11일 저녁에 진행된 김정희원님의 강의는 최근 인국공 사태부터 할당제·여가부 폐지 주장, 이대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소용돌이를 만난 나에게 통쾌함을 주는 강의였다.
한국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노동 조건이 나날이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당연히 많은 청년들이 대기업 입사를 꿈꾼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내가 노력한다고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애초에 자리가 적다. 많은 청년들이 연거푸 불합격 통보를 받는다. 누구나 지치고 힘든 나날이다. 그러나 '공정' 한 경쟁에만 집중하는 순간, 그러니까 '노력하면 입사할 수 있다.' 는 믿음에 빠지는 순간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차별과 불평등은 보이지 않는다. '일부' 청년 남성이 표출하는 분노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부’ 청년 남성은 대다수 청년이 안정된 일자리에 진입할 수 없게 짜여진 사회가 아닌 여성 할당제를 보며 여성 노동자에게, 불시에 해고될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일터를 요구하는 하청 노동자에게 화살을 날린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안정된 일터에 진입하기 어려운 것은 여성이나 하청 노동자의 잘못이 아니다. 애꿎은 옆자리 동료가 아니라 커다란 사회를 보라.
많은 사람들이 시험은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관현악단인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있다. 여러번에 걸쳐 진행되는 까다로운 시험을 통과해야 입단할 수 있을만큼 엄격한 채용 심사를 실시해왔던 곳이었다. 1970년까지 여성 단원은 이따금 나타날 정도였다. 채용 심사는 완벽하다고 보았기에 석연치 않았지만 남성이 클래식에 강하다고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흑인 음악가들이 심사과정에 인종차별이 있다고 소송을 제기한다. 이에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오디션에 간단한 장치를 추가한다. 바로 장막이다. 단지,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보이지 않는 장막을 추가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여성 합격자가 많아졌다. 전체 단원 중 여성 비율이 25% 까지 증가했다. 그동안 남성이 클래식에 뛰어나서 여성이 오케스트라에 입단하지 못 하는건 어쩔 수 없다는 믿음이 박살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할 수 있다. 시험은 공정한가?
지금 언급한 두가지 이야기는 이번 강의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이다. 그동안 나는 공정이라는 논리로 옆자리 동료를 공격하는 그들을 보며 입에 맴도는 말들이 한웅큼이었다. 하지만 내가 한마디 뱉을 때마다 백마디 공격이 돌아오는 지금의 상황에서 도대체 내가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감조차 오지 않아 대체로 삼켜야 했다. 이런 나에게 이번 강의는 얽히고 설킨 속을 풀어주는 활명수같은 시간이었다. 아마도 나와 같은 시간을 보낸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번 김정희원님의 강의를 듣지 못해 아쉽다면 김정희원님의 저서 '공정 이후의 세계'을 읽어보기를 추천드린다. 그리고 당신에게 제안한다. 우리 함께, 공정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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