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얼 에이즈(VISUAL AIDS)의 《데이 위드(아웃) 아트》(Day With(out) Art) 2022, BEING AND BELONGING 한국 상영회에서는 영상이 끝나고 토크쇼를 진행했습니다. 12월 행성인 웹진에서는 토크쇼에서 패널들이 나눈 작품 안팎의 심도 깊은 이야기들을 실었습니다.
★ 영상과 브로슈어 자료는 다음 링크를 통해 살필 수 있습니다 → https://lgbtpride.tistory.com/1777
★ 비주얼 에이즈 데이 위드(아웃) 아트의 커미션 영상들은 다음 링크를 통해 살필 수 있습니다. 해당 페이지에서는 올해 뿐 아니라 지난 커미션 영상들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 https://video.visualaids.org/
★ 프로그램 설명
<Being & Belonging>은 7편의 단편 영상으로 구성되었으며, HIV와 에이즈에 대한 이야기를 각국 HIV 감염인 예술가들의 관점에서 소개합니다. 작품들은 섹스와 친밀감(intimacy)을 모색하는 것부터 낙인과 고립을 직시하는 것까지, <Being & Belonging>은 HIV 감염인의 정서적 삶에 중점을 둡니다. 사랑, 보살핌, 그리고 소속감을 요구하고 제공하는 방식은 HIV 감염으로 인해 어떻게 변할까요? 본 프로그램은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와 삶의 터전 위에서 권리를 요구하며 관계를 만들어가는 이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밉니다.
참여작가
클리포드 프린스 킹 (미국)
김재원 (한국)
미키키 (캐나다)
다비나“디”코너 & 카린 헤이즈(미국)
카밀라 아르세 (아르헨티나)
조엘 셈포알테카 & 라 예리 (멕시코)
산티아고 레무스 & 카밀로 아코스타 헌터텍사스 (콜롬비아)
《Being & Belonging: 토크 프로그램》
∙김재원(미술작가, 《Day With(out) Art 2022: Being & Belonging》 선정)
∙나영정aka타리(퀴어활동가,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연구모임 POP)
∙남웅(미술평론가/인권활동가,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서보경(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부교수,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모더레이터: 호림(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협력: 아트선재센터,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영상 번역: 조우희
프로그램 번역: 류다연
디자인 도움: 이경민
호림: 7개의 작품은 다루는 주제들도 다양합니다. 그래서 각자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이 어떤 것이었을지 궁금해요. 김재원 작가님의 작품 <뉘앙스>는 저희가 이따 길게 얘기를 나눌거라서, 이 작품 빼고 인상깊은 작품은 무엇이었는지, 왜 인상적이었는지 이야기 해주세요.
재원: 7팀 모두 현재를 보여주는 방식들이 흥미로웠는데요, 그중 뉴욕 초연에서 토크를 함께 나눈 미키키(Mikiki)의 영상 〈빨간 깃발들, 어느 사랑 편지〉(Red Flags, a love letter, 이하 '빨간 깃발')가 기억에 많이 남아요. 제가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키워드 중 하나이기도 하고 켐섹스, 중독과 같은 이슈들에서 즐거움의 가능성, 안전한 중독자에 대해 안내하고 헤아릴 수 없는 환경과 인식에 대해서 재고해 볼 수 있던 기회이기도 하였어요.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영상 후반부에 “Nobody, nobody, nobody~”, “nobody knows~”라며 흥얼거리는 부분이 영상 전반부에 허밍으로도 들렸던 지점인데요, 이러한 구성 방식은 리드미컬한 사운드와 직접적인 이미지처럼 표면적으로 보이는 행동 이면에 마약 사용자들에게 따라붙는 위험, 처벌 등의 키워드가 동반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이 들렸어요. 사용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더욱더 이들을 외로움으로 자리 잡게 하는 것 같이 느껴져 무거운 마음이 많이 들었던 영상이었습니다.
남웅: 작품들을 보면서 U=U(Undetectable = Untransmittable, 미검출=전파불가)시대에 온전히 사랑하고 섹스하기 위해 이 풍진 세상을 어떻게 헤쳐갈 것인가 하는 화두가 계속 떠올랐어요. 당사자 스스로 섹스할 권리와 사랑할 권리, 건강할 권리를 이야기하면서 시각예술을 빌려서 이야기하는 거죠. 자기 서사를 쥐고 가면서도 여기에 어떤 수탈과 위계의 구조가 있는지, 이러한 제한 속에서 누군가는 약물을 택하고, 관계의 정서를 파고들면서 연결을 만들어가는 작업들이 보였습니다.
김재원작가의 〈뉘앙스〉와 미키키 작가의 〈빨간 깃발〉이 연결되는 방식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김재원 작가는 서간문의 형태로 내러티브를 만들어요. 편지에는 사랑의 메시지가 담기는데 애인에 대한 헌사처럼 보였어요. 워딩은 정확하지 않지만 기억에 남는 문장 중에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없기에, 모든 것을 줄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는데요. 예전 같으면 콘돔을 통해 바이러스가 전달되지 않는다는 뉘앙스가 있겠지만, 지금은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는 상황을 강렬하게 환기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 없으니, 나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게 되었다.’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게 미검출=전파불가 시대의 사랑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춰 이미지들을 더듬는 장면이나 클로즈업한 치료제 사이로 파도가 치는 장면은 당신과 내가 온전히 이어지지 않은 상황 자체가 연결될 수 있다는 동기로 작동한다는 시적 뉘앙스를 시각적으로 펼쳐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바로 이어지는 미키키의 작업은 섹스하는 장면을 보여주지만 섹스에 대한 경고보다 약물을 주입하는 데 대한 주의부터 줘요. 스스로 주사를 놓고 약을 먹는 장면이 계속해서 나오는데요, 게이들의 약물중독의 기저에는 관계에 대한 높은 문턱이 주는 부담과 스트레스가, 외로움과 우울이 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부정적인 감정과 인식들을 완화하기 위해 약물을 찾지만, 그것이 관계를 근본적으로 연결할 수 있을까...영상은 환각적인 효과가 부각하지만, 같은 화면이더라도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부 분리되어 있죠.
무엇이든 전할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 줄 수 있다는 김재원 작가의 메시지 저편에 문턱과 경계, 긴장 자체를 없애기 위한 의도로 약물에 접근하는 미키키 작가의 영상이 바로 이어지면서 내용적으로 시각적으로 대치를 이뤘던 것 같아요. 한쪽이 어둠 속에서 이미지를 더듬고 있다면, 다른 한쪽은 환각적 시야를 펼쳐내잖아요. 바이러스 미검출이 전파 불가인 시대의 사랑과 섹스인가 싶기도 하고요. 공통적으로 두 개의 영상에서 심리적 문턱을 찾을 수 있었어요. 그것이 한편에서는 사랑의 가능성을 말하며 계속해서 ‘우리’를 언급하고 있다면, 다른 작업에서는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구멍 같은 게 보였던 거 같아요. 그걸 외로움이나 우울로 당장 부르고 싶지는 않은데, 마지막에 흥얼거리는 ‘아무도 몰라’의 ‘아무도’가 ‘우리’와 대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기에는 고정파트너/애인의 유무가 큰 차이처럼 보일 텐데, 한편으로는 ‘우리’를 계속 주문처럼 언급하는 김재원 작가의 낭만에 드리운 틈새가 약물을 찾게 만드는 심연과 크게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죠.
한편으로 김재원작가는 동아시아 권에서는 2021년 대만 작가 J Triangular랑 the Women's Video Support Project의 〈滴水希望 (Hope Drops)〉(적수희망)에 이어 두 번째로 선정되었어요. 대만작가는 감염인 여성의 임신을 중심으로 질병에 대한 몸의 감각과 인식을 소재로 다뤘는데요, 그건 또 아르헨티나의 카밀라 아르세(Camila Arce)작가의 〈수직추억〉(Memoria Vertical)과 대구를 이루는 인상이었어요. 다만 아르헨티나 작가는 감염인 여성의 임신이 아니라 수직(감염)으로 태어난 생존자로서 관점을 쥐고 있다는 점이 특별했던 것 같아요.
아쉬운 건 미국 작가들의 작업이 보이는 연출의 방식이었어요. 다비나 ‘디’ 코너(Davina “Dee” Conner) & 카린 하예즈(Karin Hayes)의 〈우리가 여기 있다: HIV와 함께 살아가는 흑인 여성들의 목소리〉(Here We Are: Voices of Black Women Who Live with HIV)에서는 흑인 여성들의 서사를 시청각적으로 연결짓고 있는데,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연결성을 갖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어요. 개인의 이야기를 공통의 경험으로 직관적으로 엮어내는 인상을 주는데, 그게 마지막에서 함께 하얀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는 장면으로 마무리돼요. 아니 왜 갑자기 춤을 추지? 라는 질문이 생겼어요. ‘감염인 흑인 여성이 이렇게 어렵게 살아왔고, 이제는 함께 춤을 출 것이다’ 라는 구호가 영상으로 체화된 느낌도 들었고, 맥락이 불친절하다 보니 특정 키워드를 작위적으로 연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캠페인 영상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클리포드 프린스 킹(Clifford Prince King)의 〈키스 오브 라이프〉(Kiss of Life)는 홈비디오 화질과 화각으로 영상을 찍으면서 젊은 흑인 남자 연인들을 건강하게 보여주면서 여기에 문학적인 정조를 입히는 듯 보이는데요, 여기서 나이 먹은 감염인이 나지막이 언급하는 부분 중에 ‘내가 젊었다면 더 열심히 사람들을 만났을 거’라고 말하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식는 느낌을 받았어요. 젊은 감염인의 아름다운 몸과 스킨십을 보이기 위해 도구로 동원하는 느낌이었달까. 한편으로는 중장년 감염인의 섹스가 증발시키는 거 아닌가? 라는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뭘 저렇게 달리나 싶고.(웃음)
살펴보니까 비주얼에이즈에서 에이즈의 날에 맞춰 진행하는 이 행사 ‘데이 위드(아웃) 에이즈’가 해외 작가들에게 커미션을 준 것이 얼마 되지 않았더라고요. 이전에는 미국 작가들을 주로 지원했는데, 당시 영상들을 살펴보면 커뮤니티와 지역 기반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서 좀 더 다큐멘터리적인 인상을 받았어요. 짧은 러닝타임이지만 당사자의 내러티브에 초점을 맞춘다는 인상이었는데요, 그것이 올해는 캠페인의 성격이 짙어지거나, 자의식 강한 시적 효과가 부각 되기 쉬운 것 같습니다. 해외 작가들과 안배를 하다 보니 그런 효과를 강조하게 된 것일지, 아니면 미국 내 에이즈와 당사자를 재현하는데 대한 인식이 달라진 것인지 생각해볼 지점인 거 같아요.
보경: 저는 웅님의 관점과는 다르게 〈우리는 여기 있다 - HIV 감염 흑인 여성들의 목소리〉가 제일 직관적으로 잘 이해가 되서 재미있었어요. 처음엔 흑백이어서 여성들의 나이를 잘 모르게 하였다가, 나중에 컬러로 바뀌면서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해주는데 컬러로 바뀐 화면이 더 활기차서 나이듦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지점이 있었어요. HIV 감염인이나 에이즈 환자가 아니라 HIV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people living with HIV)로 부르자는 게 전세계적인 HIV 인권 운동에서 중요한 개념인데요, 이 작품에서는 내가 HIV랑 사는 게 아니라, HIV가 나랑 살고 있다고 역으로 말하는 부분이 인상 깊었어요. 내 인생이 멋진 곳으로 향할 때마다, 내가 HIV 역시 멋진 곳에 데려다준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감염을 동반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느껴졌어요.
타리: 에이즈 운동의 역사 속에서 예술작업 특히 미술작업이 가지는 저향적 의미에 대해서 배울 기회들이 있었는데, 한국에서도 HIV/AIDS 이슈를 다루는 작가나 작품이 여러 차원에서 생겨나고 있어서 도움을 받고 있어요. 운동의 문법과는 다른 방식이나 양식을 가진 작품을 통해서 어떤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를 배우는 면이 큰 것 같습니다. 올해 비주얼 에이즈 영상 작품들을 보면서 무엇보다 그동안 서구에서, 또한 한국에서 HIV 예방이나 치료의 주체로 나오지 않았던 인종이슈, 식민화의 역사, 약물사용자, 수직감염의 주체들의 몸을 볼 수 있어서 의미가 깊었어요.
우선 김재원 작가의 〈뉘앙스〉에서 다루고 있는 안전과 위험의 경계를 재정의하는 과정의 문제는 나의 활동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인상적일 수밖에 없었는데요. 피엘의 성적 권리를 다루는 것이 한국사회에서 전파매개행위죄가 있는 상황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는데, 특히 이 작품은 피엘의 장기간 파트너십에서의 섹스를 다루기 때문에 그동안 충분히 하지 못한 화두를 던져요. U=U가 HIV/AIDS운동에 큰 패러다임으로 도래한 지금, 위험과 안전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는 시의적절한 영상이었어요. 요즘 ‘시간’이라는 자원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데요. 돌아볼 시간을 갖는 다는 것이 개인의 차원에서 불안과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힘이 아닐까 생각해요.
또한 여러 작품들을 보면서 HIV/AIDS와 다른 질병이나 장애의 이슈와 좀더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콜롬비아에서 활동하는 산티아고 레무스(Santiago Lemus) & 카밀로 아코스타 헌터텍사스(Camilo Acosta Huntertexas)의 〈노란 사람들〉(Los Amarillos)을 보면서 HIV/AIDS가 가시적인 질병이었을 때를 다시한번 환기하면서도, 현재 가시적인 장애인이 아니라 차별에 맞서는 것이 더 힘든 것 같다고 말했던 어떤 피엘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비가시적인 장애, 질병, 억압이 주는 힘겨움과 그런 것들이 신체화 되어 드러나는 것이 주는 고통과 또다른 가능성에 대해서 좀더 이야기해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수직 추억〉을 보면서는 2세 산재의 이슈가 떠올랐어요. 원폭피해가 2세, 3세로 이어지는 것 또한 떠올릴 수 있겠어요. 이 문제를 법적인 인과관계로 밝혀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무엇을 피해로 주장할 것인가에 대한 어려운 고민을 포함하는 이슈이지만 잘못된 정보와 불평등한 의료접근성의 문제를 폭로하는 주체로서 “수직자”들의 존재가 매우 소중하다고 느꼈어요. 세대를 잇는 부정의의 문제, 성적 낙인과 관련된 이슈, “생존이 복수”라는 강력한 표현의 말을 들으면서 재생산 정의 운동에도 던져주는 화두가 묵직하다고 느꼈습니다.
전반적으로 의약품접근권의 문제와 식민화 이슈와 연결된 한국의 상황을 떠올렸어요. 한국은 2022년 신규감염인 통계에서 내국인과 외국인의 비율이 8:2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보험이 없는 미등록 이주민과 난민의 치료는 사실상 공백상태에 있어요.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 또한 의약품접근권의 심각한 위기를 담고 있는 사회인 것이죠. 또한 켐섹스 이슈와 연결해서 교도소 수감이 증가하고 있고, 그 안에서의 차별과 인권침해, 사회적인 분리와 배제의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두가지 문제 모두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올해 작품을 보면서 한국사회에 놓인 과제를 다시금 떠올렸어요.
호림: 김재원 작가님께 몇가지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저는 작가님 작품을 보면서 뭔가 가슴이 말랑말랑 해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뉘앙스〉가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 되는 지점은 HIV/AIDS와 연결된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지만, HIV/AIDS를 생각할 때 곧 바로 떠올리게 되지는 않을 때가 많은 ‘사랑’을 주제로 삼았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이 작품을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합니다. (비주얼에이즈라는 프로젝트에 함께 하시게 된 계기를 포함해 답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재원: 먼저 참여한 계기를 말씀드릴게요. 비주얼 에이즈는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예술로 연대를 해오고 있는데요, 세계 에이즈의 날에 HIV+아티스트의 영상들을 상영, 배포하는 《데이 위드(아웃) 아트》, 밸런타인데이를 기점으로 HIV 여성 감염인을 케어하고 연대하는 커뮤니티인 《러브 포지티브 우먼》(LOVE POSITIVE WOMEN)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비주얼 에이즈의 프로젝트는 다음 링크에서 자세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https://visualaids.org/projects - 편집자 주)
제가 참여한 《데이 위드(아웃) 아트》는 2010년부터 비디오를 배포하는 활동을, 2014년부터는 커미션으로 프로젝트를 확장하여 진행하게 되는데요. 매년 테마를 정해 오픈콜로 참여 아티스트를 선발합니다. 저는 작년 초 동료의 제안으로 본 프로젝트를 알게 되었어요. 계획하고 있던 작업과 프로젝트 테마와의 접점을 발견해서 지원했는데, 4-50여 팀의 지원 중 7팀에 선정되어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음, 사랑이라... 저는 오히려 HIV/AIDS를 생각할 때 ‘사랑’이 자연스레 떠올랐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감염 사실을 오픈하고 작업을 진행하면서는 줄곧 사랑에 대해 만들고 이야기했네요. 이전 작업에서 모텔이라는 장소에서 불특정 다수와의 만남을 통해 찾으려 했던 것도 (아마)사랑이었고, HIV 바이러스와의 관계도 시간이 흘러 어쩌면 저와 바이러스는 서로 사랑하고 보살펴줘야 하는 사이라고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또 질병에 대해 많은 사건과 억측이 난무하는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자 지켜야 할 것이 사랑이 아닌가 생각되어 계속해서 접근했다고도 볼 수 있고요.
이번 영상 〈뉘앙스〉의 경우에는 현재 저와 함께 지내는 비감염인 파트너와의 관계에 주목하게 된 것 같아요. 감염 10년과 연애 11년 사이에 일어난 감정들 말이죠. 긴장과 갈등으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 둘 사이를 은연중에 중재하던 바이러스는 점차 둘의 기억에서 희미해져 가는 과정을 담으려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안팎의 미묘한 긴장감과 끝나지 않은 둘(혹은 질병)의 이야기들도 담고자 했고요. 영상은 긴 시간 동안 모아온 이미지들을 선별하고 조합하여 어둠 속에서 하나씩 찾아가는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어요.
저는 이번 영상으로 파트너와 나눈 감정과 생각들이 과거에서 현재로 오기까지 어떤 태도 변화가 있었는지 U=U의 개념을 은유적으로 비추면서 그 과정을 되짚어 보는 기회를 만들어 보고 싶었고, 이미지와 내레이션의 흐름을 유추하고 따라가 보며 둘의 과정을, 나아가 HIV 감염인을 만나고 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고 확장될 수 있음을 언급하고 싶었습니다.
호림: 11월 30일(한국 날짜로는 12월 1일), 세계 에이즈의 날을 하루 앞두고 뉴욕에서 최초의 상영회가 있었고, 작가님도 다녀오신 것으로 알고있는데요. 상영회 분위기는 어땠는지, 작가님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는지도 궁금합니다.
재원: 이번 《데이 위드(아웃) 아트》는 28개국 140곳 이상의 장소에서 상영을 하는데요, 프로그램 초연은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려서 뉴욕을 방문했습니다. 올해는 참여 예술가들이 활동하는 도시를 위주로 방문해서 토크에 참여한 상황이라 뉴욕 행사는 저와 미키키 작가만 참여했어요. 사실 상영을 보러 와 주신 사람들의 현장 반응을 명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고요, 프로그램이 끝난 후 제가 전하고자 했던 의미에 대해 몇몇 분들과 짧은 대화와 새로운 프로젝트 제안 정도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반응이 명확하게 다가왔던 것은 다음 날 오전부터였어요. 뉴욕 상영을 포함하여 여러 장소에서 관람하신 연구자, 예술가, 활동가, 그리고 각국의 번역을 도운 번역가까지 SNS 메세지로 영상에 대해 여러 코멘트를 남겨주었어요. 특히 영상이 본인의 삶에 있어 다양한 순간들로 이끌어 주었다는 이야기와 제가 영상과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 많은 반응을 남겨준 HIV+예술가들의 코멘트가 기억에 남았고 흥미롭기도 했어요. 이들의 반응이 제가 전하고자 했던 지점에 어느 정도 닿을 수 있었던 것 같아 많은 힘을 얻기도 했고, 앞으로 풀고 싶은 실마리를 찾은 계기가 되었죠.
호림: 웅은 활동가이자, 미술평론가이기도 하잖아요. 웅은 “동성애자 에이즈 재현에 관련된 논의”라는 제목의 비평으로 2012년 제4회 플랫폼문화비평상의 미술비평상을 받기도 했죠. 에이즈가 처음 발견 된 1980년대부터 매체와 미술작품에서 HIV 감염인과 게이 남성이 재현되어 온 방식의 젼화를 다루는 글이었습니다. 에이즈 위기 시대의 미국에서 시작해, 당대 한국에서 끝나는 방대한 작업이었죠. 이 글도 벌써 10년 전이 쓰였는데요. 오늘 작품들을 보면서 HIV 재현과 관련해 눈에 들어오는 변화가 있었다면 어떤 것일까요?
남웅: 호림이 예전에 HIV/AIDS운동을 행성인 회원들에게 소개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던 게 기억나요. 에이즈운동의 역사를 알면 성소수자 운동의 역사를 아는 것과 같다고. 저는 에이즈운동의 역사가 시각예술에서 질병을 재현해온 역사와도 결부된다고 생각해요. 여기서는 비주얼에이즈의 《데이 위드(아웃) 아트》 사업의 역사를 간략하게 짚으면서 얘기해보면 좋을 거 같아요. 이 단체가 아카이브 사업을 했던 만큼 홈페이지에 전시와 워크샵 등 아카이브를 잘 정리해놓았더라고요. 따로 공부를 해왔습니다.(웃음) 이제 산을 올라가 봅시다.
비주얼에이즈는 88년도에 설립했어요. 당시 에이즈 위기가 미국 전역을 휩쓸면서 집단행동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어요. 87년도에 에이즈 액티비즘을 전면에 내건 단체 액트업이 활동을 시작했죠. 아시겠지만 에이즈 운동은 당시 시위문화를 많이 변화시키기도 했어요. 비주얼에이즈가 설립된 뉴욕에서는 당시 에이즈 합병증으로 수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요, 그 중에는 예술 문화 종사자들도 많았던 거죠. 저는 상상하고 싶지 않은데, 우리로 치면 같이 단체에 나오고 종로와 이태원, 신림 같은 동네에서 만나고 놀았던, 가끔은 몸과 마음을 섞었던, 아니면 오며가며 인사만 나누던 사람들이 갑자기 아프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곳곳에서 들려오는 거잖아요. 한데 정부는 침묵하고, 치료제는 만들 생각을 안하는데 정치인이나 방송인들은 게이 암이니, 천형을 받았느니 이야기하고 있고, 동료가 죽어나가고 커뮤니티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거리에 나올 수밖에 없던 거죠. ‘치료제를 개발해라’, ‘탐욕은 게이들에게 있지 않다, 정부와 제약회사에 있다’ 등의 구호를 들고 나왔어요. ‘침묵=죽음’(silence = death)이라는 구호는 너무 유명하죠. 그렇게 나와서 다이-인(die-in) 퍼포먼스를 하면서 집단으로 구호가 적힌 묘비를 만들어 대로에 눕고, 유골을 백악관 앞마당에 뿌리고, 출판과 전시, 방송을 막론하고 에이즈 이슈를 종횡무진으로 알렸어요. 무관심하거나 도덕적으로 비난할 줄만 알지 질병에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서 관심을 끌 수 있는 행동은 뭐든 해야했죠. 시각적인 효과를 끄는 게 중요했어요. MTV 시대잖아요.
이듬해 비주얼에이즈는 ‘데이 위드아웃 아트’(Day without art)를 시작해요. 두 번째 세계에이즈의날을 맞아 프로젝트를 진행한 거죠. 말하자면 지금 시국에 한가하게 예술을 감상만 할 때인가를 묻는 긴급함을 의도했다고 볼 수 있어요. 지금처럼 영상작업을 주로 하기보다는 집단행동에 가까운 프로젝트들을 했어요. 초반 메시지가 ‘에이즈는 누구에게나 닿을 수 있고 영감을 줄 수 있고 감동을 줄 수 있다’ 의 톤이었는데, ‘touch’라는 단어의 함의를 여러 가지로 활용한 것 같아요. 미국 800여 개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예술품을 장막으로 덮고 전시장에 에이즈 정보를 전하고, 치료제 개발을 요구하고, 질병 낙인을 개선하는 설명을 붙이면서 경각심을 전했죠. 전시장 문을 잠그거나 조명을 어둡게 하는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 진행했어요. 그렇게 90년대 초반까지 규모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요. 규모가 커지다보니까 에이즈 운동은 스펙터클해지게 돼요. 빌딩 조명을 끄거나 TV 광고나 거리광고판, 인쇄물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시각적 전략들을 기획한 거죠.
1994년부터 《데이 위드아웃 아트》는 아카이브 사업을 시작해요. 세상을 떠난 작가들 작업과 생애를 정리하는 사업인데, 냉정하게 말하자면 분노의 게이지가 조금 빠진 거죠.(없다는 건 아니에요. 초반의 분노가 워낙 높았으니까.) 여기에도 배경을 찾을 수 있는데요, 1990년 라이언화이트법이 제정됩니다. 한국의 에이즈예방법 정도로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동안 게이 병으로만 알려졌던 HIV/AIDS였는데 초등학교 다니는 백인 아이가 수혈로 감염이 된 거죠. ‘무고한 희생자’라고 부르면서 대중사회에 크게 각인이 되었어요. 앨튼존과 마이클잭슨은 생전에 그를 응원하고 사후에 그를 추모하는 노래를 만들기도 하고요. 같은 질병을 겪는데 누군가의 죽음은 무고하다고 판단한다면 다른 이들의 죽음은 무슨 잘못이 있다는 것일까, 당장 반발심이 생기는데 그건 다른 자리에서 좀 더 이야기해보고요. 아무튼 라이언화이트법이 제정되었지만, 이 법은 경제적 자원과 능력이 없다시피 한 이들에게만 치료제를 지원하는 제한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어요. 감염에 취약한 집단을 고려하기보다는 치료 지원의 기준에 초점을 둔 법이다보니 이 법의 제정 이후 에이즈 이슈는 많은 부분 의료의 영역으로 이전되기도 해요.
이런 변화에는 96년도에 HAART, 고효능항레트로바이러스요법이 개발되는 배경이 있어요. 우리에겐 '칵테일요법'으로 더 잘 알려진 치료법인데요. 그 사이 질병에 대한 치료제 연구도 이어져온 거죠. 에이즈는 죽을병이라는 인식이 변하기 시작해요. 위기에 대한 감각도 느슨해지고요. 해서 1995년 에이즈 이슈에 급진적으로 대응했던 행동주의 예술 콜렉티브 그랑퓨리(Gran Fury)가 해산하게 돼요. 이미 액트업은 힘이 빠졌고요. 단적으로 93년 그랑퓨리가 만든 포스터의 구호 중에는 '당신은 치료의 희망을 포기했나요? 당신이 마지막으로 소리친 게 언제인가요?' 가 있어요.
웹이 보급되기 시작하는 맥락도 생각해야 해요. 1989년 즈음부터 web 1.0이 시작되는데요, 90년대에 이르면 사이트의 수가 가파르게 증가해요. 데이 위드아웃 아트는 1995년부터 웹을 통한 캠페인도 진행하죠. 백여 개의 홈페이지에 로고를 올리고 ‘웹 액션 1995’에 연결되도록 해요. 지금은 좀 소박해 보이지만 당시로선 큰 시도였겠죠. 1996년부터는 '데이 위드아웃 에이즈' 워딩 중에서도 ‘아웃’에 괄호를 넣습니다. 칵테일요법과 함께 감염인의 기대수명이 늘면서 에이즈와 함께 하는 예술로 지속성의 의미를 새기는 거죠. 떠난 이를 기리는 작업 말고도 남아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홈페이지에 담아서 열람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이 즈음이에요.
2000년대는 생존하는 감염인 작가를 집중해서 조명해요. 민속 예술 박물관 후원을 받는데, 작가를 집중 조명하는 사업 외에도 지역 고등학교와 연계해서 2004년까지 글쓰기 워크샵을 진행하기도 하죠. 거시적인 구호와 이슈에서 작가 개인에게 집중하게 되면서 지속 가능한 손상으로서 감염인의 감수성과 신체성에 대한 키워드들이 등장해요. 치유, 손상과 아름다움, 순간의 중요함 같은 키워드들이었어요. 결국 '예술만세'의 느낌이랄까.(웃음) 이후 공동체성을 강조한 기획들도 등장합니다.
2010년부터 영상프로젝트에 집중하게 돼요. 이 즈음부터 제 활동이 시작되는 시기라 저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영화 〈라잇온미〉(2012)로 유명한 아이라 잭스(Ira Sachs) 감독의 〈라스트 어드레스〉Last Address는 뉴욕을 기반으로 거주하고 활동하다가 질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티스트의 장소와 그의 작업들을 영상과 홈페이지에 남깁니다. 애도의 의미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 형식은 달라지게 되는 거죠. 영상과 웹 기반 접속방식이 주는 감각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동료에 대한 추모의 의미보다도 지나온 시간을 기억하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돼요. 그도 그럴 것이 2010년 즈음이면 우리에게 프렙으로 잘 알려진 에이즈예방 임상이 대규모로 이뤄지던 시기였죠. 2007년에는 아이폰이 등장했고, 2005년에는 유튜브가 만들어져 이듬해부터 사용자가 급증하게 되고요.
2014년에는 데이 위드(아웃) 에이즈가 25주년을 맞으면서 다른 방식을 시도하게 됩니다. 지금의 방식이랑 유사한데요, 작가를 선정하고 커미션 작업을 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거죠. 초반에는 국내 작가들 중심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그리고 2017년 경부터는 아예 흑인 커뮤니티에 초점을 맞추게 돼요. BLM 운동이 확산하는 배경도 있지만, 미국 감염인 중 44%가 흑인이라는 문제의식은 이 질병이 누구에게나 노출될 수 있다는 과거의 구호를 재고하게 만들었죠. 질병 정보와 예방 및 치료 서비스에 접근하기 어려운 이들,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낮은 집단일수록 질병 노출이 더 취약해지는 것이죠. 아무튼 2017년부터 프로젝트의 주제 문구가 상당히 급진적인 느낌을 갖게 돼요. 2017년은 ‘대체 엔딩, 급진적 시작(ALTERNATE ENDINGS, RADICAL BEGINNINGS)’ 2018년은 ‘대체 엔딩, 액티비스트 봉기(ALTERNATE ENDINGS, ACTIVIST RISINGS)’ 2019년은 ‘여전히 시작(STILL BEGINNING)’으로 이어지죠. 2010년대 후반에는 미국활동하는 타지역 출신 비흑인 유색인종의 작업들도 선보기에 돼요.
그리고 2020년부터 미국 너머 해외 작가로 커미션을 주게 되면서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돼요. 모두가 알겠지만 코로나 시국에서 서로 강제적 언택트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연결의 확장을 고안하게 된 것 같아요. 이렇게 프로젝트의 성격이 달라진 데에는 치료 예방기술이 발전한 것과 더불어서 당대의 사회문화적 지형이 변화하고 미디어 환경이 달라진 점들도 두루 살펴야 하는 것이죠.
호림: 따로 글을 쓰셔야...다음 질문인데요. 한국에서는 지난 10년 사이에 김재원 작가님을 포함해 자신의 HIV 감염사실을 밝히고 활동하는 게이 작가들이 여럿 등장하기도 했어요. 여러 작가님들이 작품 활동을 열심히 하시면서, 웅도 여기저기 글을 쓰느라 바빠지기도 했죠. 한국의 당사자 작가들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이 지금 한국 사회와 게이 커뮤니티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남웅: 여럿이라고 하지만 바깥에 자신의 감염사실을 스스로 드러내고 작업하는 분들은 이정식, 김재원, 최장원 작가 세 분밖에 없어요. 다른 나라에 비하면 자신을 감염인으로 드러내고 활동하는 작가 수가 터무니없이 적은 편이죠. 외국 동료들에게 얘기하면 놀라더라고요. 그것밖에 안 되냐고. 그 나라들에 비하면 인구수에 비해 감염인 수가 적은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치료 잘 받으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환경에서 질병을 드러내는 것이 아직도 낙인으로 작동하는 한국사회에서는 굳이 나를 드러내서 위험부담을 안고 갈 필요가 없는 거죠. 그래서 세 분의 용기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이분들이 용기를 낼 수 있던 동료와 공동체를 새삼 고민하게 되는 거죠.
아무튼 세 분도 각기 다른 결의 작업을 해나가고 있어요. 이정식 작가가 감염인으로서 이전과 다른 몸의 감각과 서사들을 오브제와 영상, 인터뷰와 출판 등 다매체적으로 작업한다면, 최장원작가는 유리와 사탕같이 투명하고 깨지기 쉬운, 반짝이지만 날카로운 소재들을 활용해요. 일테면 유리에 파란 잉크를 올리고 불을 입혀 표면에 착색하는 작업이 있는데요, '혈관벽'이라는 제목을 가졌던 작업은 제목만큼 신체적인 뉘앙스를 줬던 것 같아요. 날카롭지만 취약하고 안팎을 투영하지만 안팎을 가르는 벽처럼 말이죠. 이정식과 최장원 작가는 서로 결이 많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나름의 '드라마퀸 플레이'가 있어요. 최장원작가의 경우 액세서리처럼 장식적으로 꾸미면서 제단을 만들고 그래픽 영상을 제작하는데요, 살롱처럼 전시장을 활용하고 관객들을 맞는데 그게 나름의 조우와 연결을 만드는 장치로서 전시를 활용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방식은 다르지만, 연결에 대한 욕망은 이정식작가에게도 보이는데, 가령 2018년 작업 '프로젝트 김무명'은 작가가 일부러 다른 감염인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비감염인에게 필사를 시킨다던지, 감염인 인터뷰이들에게 선물까지 달라고 하면서 오브제로 삼는 어떤 뻔뻔함이 되려 연결을 넓혀가는 방식이 되는 거죠. 저는 취약함을 분명하게 인지하면서도 연결과 공동체를 고민하는 작업방식이 U=U 시대에 여전히 혐오와 낙인이 작동하는 '낙차'의 감수성 속에 만들어지는 자기주도적 작업이 아닐까 생각해요. 감염인으로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면서 관계를 주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거죠. 그걸 자신의 작업적 방법론으로 삼는 거고요.
김재원작가는 관계에 대해 좀 더 내밀한 방식의 시나리오를 만드는 모습이에요. 이전에 바이러스를 오랜 연인관계처럼 여운을 남기는 얄궃은 재치를 발휘하면서 묘사했다면, 이번에는 자신의 고정파트너에 대한 헌사처럼 영상을 만들죠. 보통 에이즈를 이야기하게 되면 섹스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 하는데, 김재원작가는 섹스의 뉘앙스를 견지하면서도 사랑을 이야기하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그 사랑의 방식에 대해 작가는 오랜 모노가미 모델을 따르는 것 같지만, 가끔은 그것이 다른 형태의 관계에서 말해지는 사랑일 때 이 서사는 어떻게 가지를 낼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호림: 다음은 보경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7편의 작품 중 3편이 직접적으로 의약품 접근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노란 사람들〉은 콜롬비아 정부가 제공하는 저가의 항레트로바이러스 약물로 인한 부작용인 황달과 그로 인한 낙인의 가시성을, 〈수직 추억〉은 수직 감염인으로 태어나 자란 감독이 아동에게 특화 된 HIV 의약품 공급의 필요성을 다루고, 〈벌레 두 마리〉에서는 작가들이 황금빛 약통을 마라카스처럼 활용하며 춤을 추는 장면으로 초국적제약회사의 이윤추구의 문제가 은유적으로 다루어 집니다. 올해 한국에서는 서울퀴어퍼레이드에 초국적제약회사인 길리어드가 차량으로 참여하면서 이러한 문제가 환기되기도 했고, HIV/AIDS 인권활동가 네트워크에서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염인들이 HIV/AIDS 치료제에 무상으로 접근할 수 있는 2022년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의약품 접근권 이슈는 조금 멀게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우리가 초국적 제약회사와 의약품 접근권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보경: U=U (검출 불가=전파 불가)는 기본적으로 감염된 모든 사람들이 적절한 치료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전제로 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정말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적절하고 효과적인 치료제를 복용할 수 있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란 사람들〉에서 보여주는 부작용의 문제는 사실 HIV에 효과적인 항바이러스제가 1997년 한국에 처음 도입되면서 한국의 감염인들도 경험했던 상황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면에서 연결된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치료 지속성이 정말 중요하지만, 만약 집근 가능한 치료제가 많은 부작용을 야기한다면 치료 지속은 정말 어려운 일이 됩니다. 따라서 단순히 치료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데 그칠 수 없고, 더 나은 치료를 받을 권리, 그래서 더 나은 삶의 질을 누릴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매우 복잡한 정치 경제학적 질문들이 얽혀 있습니다.
풀어서 이야기해보자면, 지난 10년 간 HIV 치료제에 획기적인 발전이 일어났지만,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부작용이 적고, 복용이 쉬운 신약에 모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새롭게 나온 치료제의 높은 가격을 누가 부담할 수 있는지, 어느 국가가 보험 재정을 통해 감당할 수 있는지에 따라서 여전히 심각한 불평등이 존재합니다. 〈노란 사람들〉에서 콜롬비아의 기본 치료 방침은 에파비렌즈(Efavirenz, EFV)라는 약을 사용하고 있는데, 2019년 WHO는 모든 나라에서 에파비렌즈가 아니라 돌루테그라비르(Dolutegravir, DTG) 기반 치료제로 전환할 것을 권고한 바 있습니다. 에파비렌즈 기반 치료의 경우 생겨날 수 있는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지만 더 나은 치료가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이 작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한 알만 먹으면 되는 더 간편한 복합제제를 복용할 수 있는데요, 이처럼 복용이 더 쉬운 복합제제는 대부분 의약품 특허권의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중저소득 국가에 살고 있는 많은 감염인들은 복용할 수가 없습니다.
HIV 치료의 전지구적 양상은 의약품 특허에 기반한 다국적 제약회사 중심의 생산과 공급 체계가 정말 모두에게 필요한 약을 개발하고, 배분하는데 최선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수직 추억〉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아동을 위한 치료제가 더 많이 보급되어야 하지만, 이 분야에 대한 투자, 개발은 매우 더디기만 합니다. 현재 약 백칠십만명 어린이가 전세계적으로 HIV에 감염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중 절반만 치료를 받고 있고매해 십만명의 어린이가 여전히 에이즈로 사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동을 위한 치료제가 필요한 경우는 대부분 모자 수직 감염 예방이 충분하지 않은 나라들, 특히 산전 검사와 출산 전후 치료가 제대로 이뤄지기 어려운 저소득 국가들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지역들은 의약품 시장에서 구매력이 낮고, 따라서 시장 자체가 작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아동이 복용하기 쉬운 약이 제대로 개발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의약품 특허와 관련된 문제는 앞으로 더욱 제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치료 지속성과 관련되어 있는데요, 장기간 항바이러스제를 투약할 경우 생겨나는 여러 문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물론 꼭 에이즈 치료제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장기간 복용해야 하는 모든 약에는 부작용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는데, 항바이러스제의 장기 복용이 신장과 신장, 뇌신경 등에 여러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 이미 보고된 바 있습니다. 결국 더 부작용이 적고 효과적인 약, 더 나은 치료제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가 중요해질 수 밖에 없는데요, 이를 위해서는 의약품 생산 체계의 문제, 불평등의 문제를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소수의 이윤이 아니라 모두의 필요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치료제 개발을 이끌 수 있을지의 문제를 에이즈 운동이, 인권 운동이 계속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특허 독점 체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래서 필요에 따라 의약품의 가격을 통제할 수 있는 집합적 힘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의약품에 대한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두 작품들이 모두 불평등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약에 대한 상상력을 확장하는 데 큰 영감을 줍니다.
호림: 저는 오늘 함께 본 작품 중 〈벌레 두 마리〉가 가장 어렵게 느껴졌어요. 멕시코의 제국주의, 식민주의의 역사와 HIV/AIDS 감염인의 경험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 제가 그 맥락을 잘 모르기 때문에 더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은데요. 제국주의, 식민주의의 문제와 HIV/AIDS가 연결되는 지점에 대해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보경: 제가 라틴아메리카 전공자가 아니어서 지역적 맥락을 충분히 잘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그래도 매우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느꼈고, 특히 국가와 지역의 역사, 그리고 몸의 역사가 이렇게 연결될 수 있구나 하는 걸 가르쳐준 작품이어서 조금 공부를 해왔습니다.
이 작품에서 식민주의의 문제는 두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듯 합니다. 먼저 이 작품이 처음 시작할 때 무용수들 뒤로 벽화가 보이는데요, 이 벽화는 16세기에 현재 멕시코, 당시 아즈텍 제국을 스페인 침략자들이 정복하는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유럽 식민주의의 사상적 기초는 헤르난 코르테즈로부터 비롯한다는 나래이션이 들리는데요, 헤르난 코르테즈는 틀락스칼라를 비롯한 여러 원주민 집단들과 연합을 형성하여 다른 원주민들을 정복하는 전쟁을 이끈 사람입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식민지 만들기가 원주민, 즉 이미 그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완전히 절멸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게 내부의 공모자를 만들고, 이들을 식민자와 유사한 방식으로 전환 시키는 과정으로 진행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이 정복의 과정에서 새로운 인종 개념이 만들어지는데요, 메스티사헤는 라틴아메리카 원주민과 스페인계 백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식민주의의 역사 속에서 사고할 때, 지금 현재 멕시코 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강제적 혼혈의 역사, 즉 지배와 피지배의 역사를 내 몸 안에, 내 피 안에 가지고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스티사헤는 한편으로는 식민자 백인의 지배로 태어난 사람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사백인으로 다른 원주민을 탄압해온 식민 대리인의 후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메스티사헤로 자신을 명명하는 두 명의 남성 무용수가 백인 가면을 쓰고, 치마를 입고 춤을 추면서 의도적으로 인종과 젠더 구별이 어떻게 강제되고, 연행되는지를 보여주려고 하는 듯 합니다.
이 작품은 한 축에서는 멕시코의 역사에서 식민주의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다른 한 축에서는 HIV 감염이라는 상태와 식민의 문제를 연결시킵니다. 병원 공간에서 시작해서 풀밭으로 장소를 옮기는데요, 이러한 공간적 구별을 식민주의의 역사와도 연결시켜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병원이 근대성의 공간이자 식민주의의 공간, 즉 정복자로서 서구 문명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공간이라면 풀밭과 태양의 공간은 원주민의 공간이라고도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풀밭에서 무용수들은 그저 춤추고 축하하기 보다는 일종의 갈등을 경험하는데, 이 곳은 온전히 나를 빛내고 감싸안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메스티사헤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모든 이들이 나의 피, 나의 뿌리에 여전히 식민자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는 공간으로 그려집니다.
은유적 측면에서 우리는 흔히 HIV 감염을 바이러스가 우리 몸을 침략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감염된 몸은 이미 식민지화된 몸, 식민자의 흔적, 즉 바이러스의 흔적을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메시티사헤의 상태라고도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작품 중간에 칼로 자기 피부를 도려내고 싶은 충동이 그려지기도 하는데요, 이는 인종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태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HIV 역시 한번 감염되면 완치가 없는, 벗어날 수 없는 상태로 흔히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 식민주의의 역사를 단지 부정하는게 아니라 축하의 춤으로 맞이하는 전환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걸 더 확장해서 사고한다면, 감염된 상태 역시 식민지적 상태이자 그것으로 완전히 결정되지 않는 새로운 전환을 예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중간에 "이 긴 의료대기 시간을 반란으로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라고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저는 이 질문을 좀더 확장해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즉, 바이러스에게 감염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언제 올지 모르는 완치의 시간을 그냥 기다리고만 있는 게 아니라, 이 시간을 전환의 계기로 만들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는 듯 합니다. 지금 현재를 수동적인 대기 시간이 아니라 반란의 시간으로 여긴다는 건 HIV에 감염된 상태를 오염된 상태, 식민화된 상태로만 여기지 않고 어떤 변화의 시간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고 청하는 듯 합니다. 감염을 계기로 만들어진 새로운 유대와 연합을 어떻게 살아 가는지에 따라서, 어떻게 질병과 춤 출 수 있는지에 따라서 다른 역사를 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호림: 마음이 뜨거워지는 답변이었습니다. 보경님은 강의를 해주셨네요.(웃음) 마지막으로 타리님께 질문드립니다. 타리님은 여러 영역, 여러 단체에서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요. 그 중 하나가 퀴어 커뮤니티의 약물 이슈를 다루는 연구모임POP입니다. 〈빨간 깃발들, 어느 사랑 편지〉는 영상과 음악, 소음 등을 통해 약물과 섹스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상황을 매우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마지막에 깔리는 음악의 가사, “나는 아무도 없어.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어. 아무도 몰라, 아무도 몰라..” 를 들으며 올해 POP가 발간한 〈켐섹스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한국 상황에 대한 보고서〉에서 POP가 주목하려는 키워드가 ‘외로움’이었다고 하셨던 것이 떠올랐어요. 보고서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함께 왜 퀴어 커뮤니티의 약물 이슈에서 ‘외로움’이라는 키워드가 중요한지 설명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타리: 〈빨간 깃발들〉은 다른 영상과 확연히 다른 정서, 분위기, 음악, 충격적인 영상으로 구성됩니다. 미술관에서 권위있는 재단의 커미션을 통해서 켐섹스 영상을 블랙박스에서 함께 본다는 경험이 평범하지 않죠. 집에서 혼자볼때와 분명히 달랐어요. 관객들도 많이 충격적이라고 느끼셨을텐데 영상을 통해서 달라진 감각을 공유하면서 켐섹스 이슈를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기를 바랍니다.
〈켐섹스〉 보고서 (< 누르면 연결됩니다) 작업은 연구모임POP가 약물사용자 7명을 인터뷰하고, 이들의 서사와 맥락을 부여하고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편지 형식으로 구성한 작업이었습니다. 약물사용자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출현해야 이들의 경험이 인간 경험의 일부로 인식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도 켐섹스와 외로움의 관계를 다루는 칼럼이나 이론적 작업을 접했고, 한편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이 시대를 설명하는 매우 보편적인 감정이기도 해서 특수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왜 어떤 게이/퀴어는 그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약물을 사용하는가?를 깔끔하게 해명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워요. 섹스를 통해서 외로움을 해결하고자 하는 게이 섹스 문화라는 형식이 있고, 그 문화를 만들고 있는 지금의 조건에는 데이팅 어플과 엄청난 속도, 익명성이 있고 그 문화에 포함된 다양한 위계들이 있죠. 외모, HIV, 언어적 장벽… 이런 위계 속에서 그 외로움을 문화적, 구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 상황에서 섹스에 사용하는 약물이 게이 섹스 문화에 제공되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약물이 거래가능하고, 원한다면 접근이 가능한 상황, 그리고 미리 예비 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만난 파트너에게 제안을 받고 있는 상황, 구입이 가능할 만한 가격의 형성 속에서 가능해진 것이죠.
그리고 약물을 사용했을때 자신감이 고양되고, 성적 쾌감이 극대화되고, 낯선 파트너에게 강렬하게 친밀감을 느끼는 효과들이 이러한 장벽과 위계를 뛰어넘게 하는 작용이 있어요. 그래서 약물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약물없이도 언제나 섹스할 수 있고, 외로움을 해결할만한 자원이 있는 사람에게 약물이 다가가는 방식과 그 약물을 매개했을때만 자신이 원하는 섹스 파트너를 만날 수 있는 사람 사이의 위계는 더욱 심화돼요. 그래서 켐섹스와 외로움이라는 이슈는 복잡한 접근을 요구하죠.
한편으로는 〈빨간 깃발〉 작가가 말하는 이해받지 못함, 도움받지 못함은 약물사용의 원인으로서의 외로움이라기 보다는 약물사용 자체가 가진 외로움이라고 느꼈어요. 그 외로움이라는 것은 캐나다 상황과 한국 상황과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범죄화라는 구조 속에서 강력해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호림: 타리님도 〈빨간 깃발들〉을 보면서 POP 활동과 관련하여 여러 고민이 드셨을 것 같아요. 인터뷰이 제임스의 “왜 좋은 중독자가 되도록 가르치지는 않”냐는 도발적인 질문, 위해감소 전략과 자기 결정권의 같은 것이 퀴어 커뮤니티의 약물 이슈에 접근하는 중요한 관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리다가도 함정수사와 처벌 중심의 한국의 약물 정책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기도 합니다. 보고서 발간 이후 POP에서는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신지 공유해주실 수 있을까요?
타리: 한국의 기조는 처벌과 단약 밖에 없고 단약을 다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떤 관용도 베풀지 않습니다. 의존과 중독의 문제를 그런 식으로 다루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고, 건강권을 해치고 사람의 삶을 망가뜨리는 정책기조이기 때문에 어떻게 그 사람의 건강과 인권을 걱정하면서 이 문제를 다룰 것인가의 측면에서 함리덕션 정책의 중요성이 다가왔어요. 이 행사의 자료집에서도 함리덕션의 한 실천 방식으로 프렙(PrEP)을 제시해요. 프렙은 HIV의 예방법만이 아니라 소위 문란한 섹스, 켐섹스를 하는 사람의 건강을 지키는 함리덕션(harm reduction)일 수 있다라는 것 자체가 강력한 의미를 준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요.
연구모임POP는 활동가로 이루어진 아주 작은 모임이기때문에 직접 상담을 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어렵지만 약물사용경험을 가진 동료와 계속해서 이야기하면서 켐섹스의 이슈를 어떻게 HIV/AIDS 운동과 연결할 수 있을지, 성 건강을 증진하고 성적 권리를 위해서 투쟁하는 운동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 게이 커뮤니티의 문제와 같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말을 건네는 작업을 계속 하려고 해요. 저는 인권활동가로서 어떤 문제를 절멸 시킬 수 있다고 믿고 실행하는 것이 실제로 거기에 연루된 사람들에게 얼마나 반인권일 수 있는지 환기하고, 실제로 약물이 제조, 유통되는 글로벌한 상황속에서 개인에게 다가왔을때 인권을 지키는 방식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켐섹스를 용어를 만들고 이 이슈를 선구적으로 다루어온 데이비드 스튜어트(David Stuart)라는 활동가가 있어요. 얼마전 작고하셨는데, 그 분의 작업중에 하나가 켐섹스 케어플랜이라는 것이죠. 약물사용자가 스스로 자신의 약물 사용 패턴을 돌아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갈 수 있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게 돕는 프로그램인데요. 수십개의 언어로 번역이 되어 있고, 우리도 한국어로 번역해서 유통하는 작업을 진행했어요. 최근에 좀더 케어(care)라는 단어를 붙잡고 있습니다. 쾌락을 증진하고 친밀성을 느낄 수 있는 조건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약물에 더 의존하게 되는 상황이라면 그 상황 자체를 돌봄이라는 거대한 이야기들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중이에요. 동료와 이야기하는 것은 약물이 개인적인 이슈임에도 결국 사람들이 관계속에서 인정과 사랑을 갈구한다는 거잖아요. 약물에 대한 의존을 낮추려면 의미있는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의 밀도가 깊어지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약물사용으로 인해서 그것이 단절되지 않는 방식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핵심이 될 수밖에 없는 거죠. 그것을 위해서는 상대방이 단약을 조건으로 걸지 않고 이 상태에서 만날 수 있는 역량 또한 갖추어야 하고요. 적절한 선을 함께 설정하고 서로 지키면서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장기적인 방향을 보면서 만나가는 것, 결국은 서로를 케어하는 거예요.
최근 서구에서 진행되는 켐섹스 관련 연구에서는 켐섹스를 통해서 맺어지는 일시적이고 여러명의 파트너들과 만들어지는 매우 강력한 친밀성을 대안적인 혹은 급진적인 관계성으로 의미화 하려는 이론적인 시도들이 많이 있다고 해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한 건 이 쾌감이 약물과 나와의 2자적인 관계에서는 결국 신체에 미치는 화학적인 작용이 핵심인데, 거기에만 몰두하면 켐섹스 파트너들을 신경쓸 수 없고, 그 외에 다른 관계도 단절되고 파괴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이였어요. 약물과 나와의 관계만을 놓지 않고 약물 사이에 있는 관계까지 케어 안에 포함하는 것, 약물로 부터 자유로운 시간을 확보하는 것, 일상을 계속 유지하는 것, 그것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죠.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비범죄화, 성적 낙인의 제거라는 운동의 지향 속에서 케어의 문제를 급진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어요. (좀더 자세한 내용은 「행복이 들어갑니다? - 쾌락과 돌봄을 다시 발명하기」, 『문학동네』, 2022년 겨울호에서 다루었습니다.) 사실 이건 HIV 운동에서 이야기했던 방법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기도 해서 잘 연결해보려고 해요. 운동간의 연결도 잘 되면 좋겠고요. 《데이 위드(아웃) 에이즈》 프로그램 자료에 켐섹스, 함리덕션에 대한 용어설명(< 마우스를 가져가면 설명이 나옵니다) 이 있고, 함리덕션의 방식 중 하나로 프렙, 콘돔, 안전벨트를 제시하고 있더라고요. 프렙은 HIV 예방약을 넘어서 함리덕션의 방법이 되고 있는거예요. 앞으로 운동간의 경험과 지혜를 계속 공유하면서 우리의 문제를 잘 다룰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호림: 제가 욕심을 내서 세 분 패널분들께 무거운 질문을 보내드렸는데요, 알찬 답변들을 들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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