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R Issue 65, May–June 2009
JOHN D’EMILIO is a professor of history and of gender and women’s studies at the University of Illinois at Chicago and is author of many works including Creating Change: Sexuality, Public Policy and Civil Rights; Making Trouble: Essays on Gay History, Politics, and the University; Intimate Matters: A History of Sexuality in America; and Sexual Politics, Sexual Communities. The ISR’s SHERRY WOLF, author of Sexuality and Socialism: History, Politics, and Theory of LGBT Liberation (forthcoming from Haymarket Books, 2009), interviewed him.
존 디밀리오는 시카고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역사 및 젠더와 여성학 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또한『변화를 창조하기: 섹슈얼리티, 공공 정책, 시민권』, 『문제 일으키기: 게이 역사와 정치, 보편성에 관한 에세이』, 『친밀한 문제들: 미국 섹슈얼리티의 역사』, 『성 정치와 성적 공동체』등의 수많은 저서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섹슈얼리티와 사회주의: LGBT해방의 역사, 정치, 이론』의 저자인 ISR의 세리 울프가 그를 인터뷰했다.
YOUR GROUNDBREAKING essay, “Capitalism and Gay Identity,” published in 1983, uses the Marxist method to root the emergence of a distinctive gay and lesbian identity in capitalism. You argue, “Capitalism has created the material conditions for homosexual desire to express itself as a central component of some individuals’ lives…” What, if anything, would you add to this analysis regarding the growing emergence in recent years of those who identify as transgender?
1983년에 출판된 당신의 혁신적인 논문인 “자본주의와 동성애 정체성”은 자본주의 하에 두드러진 게이 및 레즈비언 정체성의 출현의 근간을 찾기 위해 맑시즘적 방법론을 이용한다. 당신은 “일부 개개인들의 삶에 있어 중심이 되는 구성요소로서의 동성애적 욕망을 표출해내기 위한 물질적 토대가 자본주의로부터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가능하다면, 이러한 분석에 트랜스젠더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의 출현이 증가하는 근래의 상황에 관해 덧붙여 줄 수 있나?
THE THRUST of the argument in “Capitalism and Gay Identity” was that the shift from kinship forms of production to individual wage labor opened a social and economic space that allowed individuals to live, to survive, outside a reproductive household. Same-sex desire could congeal into a personal identity and a way of life. The opportunity for that to happen was distributed differently depending on one’s relation to capitalist modes of production. In the U.S., that meant men more than women, whites more than Blacks, the native-born more than immigrants, and the middle class more than the working class. But the heart of it is individuals able to make a living rather than livelihoods being dependent on family groupings.
“자본주의와 동성애 정체성”에서 주장하는 바의 요점은, 친족 형태의 생산으로부터 개인 임금 노동으로의 전환으로 인해 재생산적인 가정의 울타리 밖에서 개개인들이 생존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장소가 개발되었다는 것이다. 동성 섹스의 욕망은 사적 정체성과 생활 방식 속으로 응고되어 갈 수 있었다. 그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기회는 생산의 자본주의적 방식과의 관계에 따라 다르게 분포되었다. 미국에서는 여성들보다 남성들이, 흑인보다는 백인들이, 이주민들보다는 원주민들이, 노동계급 보다는 중산층에게 그러한 기회가 많았다. 물론 그 중심에는 가족 집단에 의지하지 않고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개인들이 있다.
It seems to me that the emergence in the last half century or so of transgender as an identity articulated by a social group depends on something different. It’s more closely connected to the increasingly porous boundaries that have come to characterize gender roles in post-industrial capitalist societies. In the West, one can find individual transpeople in the past who “passed” successfully. But as long as gender roles were highly polarized and sharply differentiated, as they have been until the last generation or so, openly declaring oneself as a gender crosser brought great trouble and persecution. As the distance between male and female has narrowed, it has become easier for individuals to make those crossings. I say “easier” in the sense of relative to past generations, because it would be hard to claim that being trans is easy.
지난 반세기에 걸쳐 사회집단에 의해 분명한 정체성으로서의 트랜스젠더가 출현한 것은 다른 원인에 근거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후기 산업 자본주의 사회에서 젠더 역할을 특징화해 왔던, 점진적으로 흡수되어 온 경계들과 보다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우리는 과거 서구에서 성공적으로 “성전환passed”을 한 개별 트랜스젠더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젠더 역할이 고도로 양극화되고 명확하게 분화되어 있는 한, 마지막 세대까지도 그래왔던 것처럼, 젠더 경계를 넘어선 자로서 스스로를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와 학대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점차 좁혀져 왔기 때문에 개개인들이 이러한 경계 넘기를 하는 것은 좀 더 수월해졌다. 나는 과거 세대와 비교해서 좀 더 수월해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 전환을 한다는 것이 쉽다고 주장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WHAT DO you attribute to the rising chorus—both inside and outside contemporary LGBT circles—that insists sexuality is not fluid, but fixed if not at birth, then at an early age?
오늘날의 LGBT 단체들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섹슈얼리티가 유동적인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 혹은 어린 시절에 고정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증가하고 있는데, 당신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THE IDEA that people are born gay—or lesbian or bisexual—is appealing for lots of reasons. Many of us experience the direction of our sexual desires as something that we have no control over. We just are that way, it seems, so therefore we must be born gay. The people who are most overt in their hatred of queer folks, the religious conservatives, insist that being gay is something we choose, and we know we can’t agree with them. Hence, again, born gay. Liberal heterosexual allies love the idea. If gays are born that way, then of course they shouldn’t be punished for it. “Born gay” is also a relief to any of us who have some doubts about our sexuality or who feel ourselves sinking under the weight of the oppression. If we’re born gay, then it’s not our fault, and we’re certainly not choosing to be oppressed: we just can’t help it, so leave us alone. It also answers those who worry about the effect of too many out-of-the-closet gay men and lesbians: if people are born this way, then young people won’t be influenced by us.
타고난 게이-혹은 레즈비언이나 바이섹슈얼-이라는 개념은 많은 이유에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성적 욕망의 방향성을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서 경험한다. 그저 우리는 보이는 그대로 살아가는 것뿐이고, 따라서 게이로 타고난 것이 분명하다. 퀴어에 대해 가장 공공연하게 혐오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인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은 게이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잘 알듯이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그리하여 또 다시 타고난 게이로 돌아온다. 자유주의 이성애 동맹은 이러한 개념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만약 게이가 타고나는 것이라면 그들이 게이라는 이유로 당연히 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 “타고난 게이”는 우리의 섹슈얼리티에 관해 어떤 의심을 품고 있거나 스스로 그런 억압에 짓눌려 침잠해가고 있다고 느끼는 우리들이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게 해준다. 만약 우리가 게이로서 타고나는 것이라면, 그건 우리의 잘못도 아니고 따라서 우리는 억압받을 필요도 분명 없을 것이다: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냥 우리를 내버려 둬라. 그것은 또한 커밍아웃한 너무 많은 게이와 레즈비언들이 끼칠 영향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답을 줄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태어나는 것이라면, 어린 아이들이 우리한테 영향을 받을 일도 없을 테니까.
I hope you see where I’m going with this: “born gay” is an idea with a large constituency, LGBT and otherwise. It’s an idea designed to allay the ingrained fears of a homophobic society and the internalized fears of gays, lesbians, and bisexuals. What’s most amazing to me about the “born gay” phenomenon is that the scientific evidence for it is thin as a reed, yet it doesn’t matter. It’s an idea with such social utility that one doesn’t need much evidence in order to make it attractive and credible.
당신은 내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 지를 알거라 믿는다: “타고난 게이”라는 개념은 LGBT를 비롯해 많은 지지 세력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동성애혐오적인 사회의 뿌리 깊은 공포와 게이와 레즈비언, 바이섹슈얼의 내면화된 공포의 동맹으로 고안된 개념이다. “타고난 게이” 현상에 있어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에 대한 과학적 증거가 마른 갈대 마냥 빈약하지만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 개념은 매력적이고 신빙성 있게 보이기 위해서 많은 증거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사회적 유용성을 지니고 있다.
ON THE one hand, there is growing social acceptance of LGBT people and pop culture reflects that on TV and movies; on the other, social and legal repression persist—including alarming rates of violence against those who are or appear to be lesbian, gay, bisexual, or transgender. How do you explain this apparent schizophrenia in modern U.S. society regarding LGBT people?
한편, LGBT에 대한 사회적 수용이 증가하고 있고 대중문화는 TV나 영화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반면에, 사회적이고 법적인 억압은 지속되고 있다.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혹은 트랜스젠더이거나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폭력이 위험수위에 있다는 사실을 포함해서 말이다. 당신은 LGBT에 관한 현대 미국 사회의 명확한 정신분열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I DON’T find it surprising at all. I think you could notice contradictory patterns for almost any identity-based movement of the last fifty years. We could talk about racism and sexism, for instance, and make analogous comments: on the one hand, formal legal rights have expanded dramatically for people of color and for women since the 1960s. Large numbers of women and people of color have experienced expanded educational opportunities, more economic opportunities, and more freedom of movement. And, at the same time, structural racial and gender inequality is still alive and well, and for those who are most in the line of racist and sexist fire, the price is very high. In other words, identity-based movements have brought great gains, but the benefits don’t get distributed equally.
나에게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난 50년간의 운동이 기반 했던 어떤 정체성에서라도 모순된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도 유사한 언급을 할 수 있다: 한편으로 형식상의 법적 권한들이 1960년대 이후로 유색인들과 여성들에게까지 극적으로 확장되어 왔다. 많은 수의 여성들과 유색인들이 확대된 교육의 기회와 더 많은 경제적 기회, 그리고 더 많은 운동의 자유를 누려왔다. 그런데 동시에 구조상의 인종적이고 젠더적인 불평등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 해고의 줄에 서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그 대가는 너무 비싸다. 다시 말해 정체성에 기반 한 운동은 큰 수확을 얻었지만 그 수확물은 골고루 나눠지지 않는다.
For gays, lesbians, and bisexuals (I’m deliberately excluding transgender people here, because I don’t think there’s been nearly as much beneficial change for gender-crossing), there’s been an expansion of legal protections against discrimination, the solidification of gay-identified urban neighborhoods, much more cultural visibility, the elimination of criminal penalties for private consensual sexual behavior among adults, and the end of science and medicine classifying us as ill. This is all wonderful. But, depending on where one grows up, on one’s access to economic and educational privileges, on one’s religious upbringing, and especially on the degree of one’s overt gender nonconformity, one has either more or less access to these favorable changes.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에게 있어, 차별에 대항한 법적 보호의 확대, 동성애 정체성을 지닌 도시 주거지의 단결, 훨씬 더 두드러진 문화적 가시성, 우리를 환자로 분류하는 과학과 의학의 종결, 성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합의에 의한 사적인 성 행위에 대한 형사상의 처벌 조항 삭제 등이 있어왔다. (난 의도적으로 트랜스젠더를 여기에서 제외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젠더-넘기에 대한 수혜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너무 훌륭하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에서 성장하느냐에 따라, 경제적/교육적 특권에 대한 접근의 용이성에 따라, 종교적 양육 방식에 따라, 특히 명백한 젠던 비순응성의 정도에 따라, 이러한 호의적인 변화에 대한 접근 가능성에 다소 차이가 난다.
I can’t begin to pretend that I can identify what the deeper structural changes are that would be necessary to eliminate homophobia. But I suspect it involves the de-institutionalization of heterosexual marriage as a source of legal and economic privileges. That’s different from saying we should campaign nonstop for same-sex marriage. What I mean is that marriage shouldn’t get you easier access to health insurance or retirement benefits or tax breaks, or any other kind of special deal. Instead, if we value a broad spectrum of household arrangements, we will be making it harder for heterosexual privilege to reproduce itself. The other side of heterosexual privilege, of course, is homophobia and queer oppression.
나는 더 심오한 구조적 변화라는 것이 호모포비아를 제거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법적/경제적 특권의 원천인 이성애 결혼의 탈제도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한다. 그것은 우리가 동성 결혼을 위한 끊임없는 캠페인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내가 의미하는 바는, 결혼이라는 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건강보험이나 퇴직 수당, 감세 등의 어떤 특수한 거래에 대한 접근을 더 용이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신, 우리가 가족 배합의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가치 있게 여긴다면 우리는 이성애적 특권이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것을 더욱 힘들게 만들 것이다. 물론 이성애적 특권의 이면은 동성애혐오와 퀴어 억압이다.
YOU HAVE been quite critical of identity politics, arguing that “movements based on identity probably act as a barrier to solving class-based injustices because they place a premium on group loyalty across class lines.” Since then, queer theory has arisen in academic circles to challenge identity politics. How do you explain queer theory and do you believe it can advance the struggle for LGBT liberation?
당신은 “정체성에 근거한 운동들은 계급 구획을 넘어 단체에 대한 충성에 우선순위를 두기 때문에 계급에 근거한 불평등을 해결하는데 있어 장애가 된다”고 주장하면서, 정체성의 정치학에 대해 꽤 비판적이었다. 그 이후로, 퀴어 이론이 정체성의 정치학에 도전하기 위해 학술 진영에서 제기되어왔다. 당신은 퀴어 이론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며 그것이 LGBT 해방을 위한 투쟁을 진일보할 수 있게 한다고 믿는가?
I’M REALLY not the right person to be speaking about queer theory. It seems to me that at its best, queer theory is a perspective that asks us to question normalcy, to be skeptical of seeing both gender and sexuality as fixed categories. Who can argue with that? And, again, at its best, this can be an angle of vision on society that allows us to critique, to rebel against, to organize against, normative systems that oppress people who refuse to follow the rules of gender and sexuality. That’s invigorating. I’m not sure I know how that might lead to collective mobilization as opposed to the individual’s assertion of a right to be who and how we want to be.
사실 난 퀴어 이론에 대한 말할 수 있는 적임자가 아니다. 내게 있어 퀴어 이론은 기껏해야 우리에게 정상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고착된 범주로서의 젠더와 섹슈얼리티 양쪽 모두에 회의적이도록 요청하는 하나의 관점인 것 같다. 누가 이에 반박할 수 있는가? 또한 기껏해야 이것은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규율에 따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규범적 체제를 우리로 하여금 비판하고 거기에 저항하여 조직을 구성하도록 해주는, 사회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일 것이다. 그것은 활력을 준다. 나는 퀴어 이론이 우리가 원하는 그 무엇이 되고자 하는 권리에 대한 개별적 주장에 맞서서 어떻게 우리를 집단적 동원으로 이끌지는 확실한 순 없다.
YOU WERE a student at Columbia University in 1969 when the Stonewall Riots took place in New York City. What impact did it have on you as a young gay man? And what do you believe are the most important lessons of that upheaval?
당신은 뉴욕에서 스톤월 항쟁이 벌어졌던 1969년에 콜롬비아 대학교의 학생이었다. 그 사건은 젊은 게이였던 당신에게 어떤 영양을 미쳤는가? 그리고 그 항쟁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IF I were to use my own personal story to get at the meaning of Stonewall, I’d have to say Stonewall wasn’t of much significance. That’s a pretty heretical statement to make, so let me try to explain.
내가 만약 스톤월 항쟁의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이용해야 된다면, 스톤월이 나에게 큰 의미를 주지는 않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너무 이단적인 언급이기에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I was an undergraduate at Columbia when Stonewall occurred. I knew where it was, had even been there once or maybe twice. Christopher Street in 1969 was the main cruising strip in Greenwich Village. Over the three or so previous years, I had pretty much come to terms with being gay. I didn’t have a political consciousness of it, but I’d broken with my Catholic upbringing, and decided that this was me, I wasn’t going to fight it, and I could lead an ethical and meaningful life while being gay. I’d come out to a set of friends, so I had something of a support network, and I had a boyfriend—actually, “lover” was the word we used then.
스톤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 나는 콜롬비아 대학교의 대학원생이었다. 나는 거기가 어딘지를 알고 있었고 한두 번 가본적도 있었다. 1969년의 크리스토퍼 거리는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크루징 거리였다. 그보다 3년 전인가 그 이전부터 나는 게이가 되는 것에 꽤 익숙해졌었다. 나는 그에 대한 정치적 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카톨릭적인 훈육과 결별했고 내 정체성을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러면서 나는 게이로서 윤리적이며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몇몇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을 하면서 지지하는 세력들도 얻게 되었고 남자친구도 사귀었다. 사실 당시에는 “애인lover"이라는 표현이 더 친숙했다.
I read about Stonewall a couple of months after it happened in an old issue of the Village Voice that I’d come upon. I remember thinking “wow, this is pretty cool.” But the reason I thought it was cool was because I was an antiwar activist, and had come to see demonstrations and protest and rebellion as what was necessary to change the world. So, the idea that these queens, which is how I think the article described them, were battling New York’s tactical police force — well, I could relate to that. I’d had the experience of running through the streets of midtown Manhattan in protest against the war, as police on horses came chasing after us. I’d marched in DC, I’d picketed the homes of draft board members, I’d rallied in front of the United Nations, and all that.
나는 스톤월에 관한 기사를 사건이 발생하고 몇 달이 지나서 우연히 보게 된 빌리지 보이스의 과월호에서 읽게 되었다. 나는 “와우, 꽤 멋진데.”라고 생각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가 그 사건을 멋지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내가 반전 활동가였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시위와 저항과 반항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곳의 퀸들-그 기사가 그렇게 표현했던 걸로 기억한다-이 전략에 능한 뉴욕 경찰과 맞서 싸웠다는 생각에 이를 수 있었다. 나는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면서 말을 탄 경찰의 추적을 피해 맨하탄의 중심가를 내달렸던 경험이 있었다. 나는 DC에서 행진도 했고 징병위원회의 회원들 집 앞에서 피켓 시위도 했으며 나는 UN 앞에서 집회를 갖기도 했다. 그게 전부다.
I guess what I’m saying is that Stonewall’s meaning came as much from the times as from the event. It was “cool” to me when I read about it, because I was living in a time and place where protests and progressive movements were a vital part of everyday life. Without that bigger context of progressive mobilization, Stonewall would have been just an event. And I think the lesson is that, short of catastrophic situations like the AIDS epidemic in the 1980s, gay mobilizations—or LGBT mobilizations—are not going to get very far by themselves. They need the deeper and bigger context. So, if you care about gay liberation in the biggest sense, build a broad movement for social and economic justice!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스톤월의 의미가 그 사건 자체에서뿐만 아니라 그 시대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그 기사를 읽었을 때 내가 멋지게 느꼈던 것도 그런 점이었는데, 그 이유는 저항과 진보적인 운동이 일상의 활력이 되어주었던 시공간에 내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적 집결이라는 더 큰 콘텍스트가 없었다면 스톤월은 그저 하나의 사건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 그 사건이 주는 교훈은 1980년대의 AIDS처럼 재앙과 같은 상황에서 게이 동원, 혹은 LGBT 동원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더 깊고 더 큰 콘텍스트가 필요하다. 따라서 만약에 당신이 가장 큰 의미에서의 게이 해방에 관심이 있다면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정의를 위해 광범위한 운동을 구축하길 바란다.
THE MOVEMENTS that emerged after Stonewall raised ideas about Gay Power and gay liberation, yet those notions receded in decades since. How would you define LGBT liberation today and what, if anything, do you believe can be done in the here and now to attain it?
스톤월이 게이 파워Gay Power와 게이 해방에 관한 개념들을 제기한 후에 발생한 운동들은, 최근 수 십 년 동안에 퇴보했다. 당신은 오늘날 LGBT 해방을 어떻게 정의내릴 것이며 또한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말해 달라.
ONE OF the interesting things to me about the course of the gay and lesbian, and now LGBT movement, is that the periods when radical activism has dominated the movement have been relatively few and short-lived. There was the historical moment of the founding of the Mattachine Society in 1950–51, when this new notion of homosexuals as a minority achieved organizational expression through the work and leadership of gay men who were in the Communist Party or who were fellow travelers. Then there was the post-Stonewall moment when gay liberation and radical lesbian feminism exploded into the world and, through the insistence on coming out, helped create a whole new gay and lesbian world. Two decades later, the assertive activism of ACT UP pushed queers into the heart of both American political debate and popular culture. All three were of great consequence. They each embodied a radical visionary analysis with tactics that were militant for their times.
게이와 레즈비언 운동, 즉 오늘날 LGBT 운동의 추이에 있어 내게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급진적 액티비즘이 그 운동을 지배하고 있던 기간이 비교적 짧았었다는 것이다. 1950~51년에는 매타친 협회Mattachine Society의 건립이라는 역사적 순간이 있었다. 그때는 소수집단으로서의 동성애자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공산당에 가입했거나 공산당을 지지하던 게이들의 리더쉽과 작업을 통해 조직적인 표현을 이뤄냈다. 그 후 커밍아웃을 강조하는 게이 해방과 급진적 레즈비언 페미니즘이 폭발하듯 세상에 등장하여 완전 새로운 게이와 레즈비언 세상을 창조하는데 일조했던 포스트-스톤월 시대가 열렸다. 20년이 흐른 뒤, 액트 업ACT UP의 공격적인 액티비즘이 퀴어들을 미국 정치 논쟁과 대중문화의 심장부로 밀고나갔다. 이 모두는 위대한 결과였다. 그들 각자가 당대를 위한 호전적인 전략으로 급진적 비전에 대한 분석을 구체화했다.
But, none of them lasted long. What they had in common were two things. They emerged because of a larger context of change: the upheavals in sexual mores provoked by World War Two and the Kinsey studies; the mass movements and widespread challenges to authority that we associate with the sixties; and the AIDS cataclysm. In other words, they couldn’t be wished or planned into existence. But, when circumstances changed, when something destabilized the normal routines of life and politics, queer radicalism of one sort or another got its opportunity.
그러나 그들 모두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공통점은 두 가지이다. 그들은 변화에 대한 더욱 넓은 콘텍스트가 있었기에 등장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과 킨제이 보고서에 의해 발발된 성 의식의 대변동; 우리가 60년대에 겪었던 대중 운동과 권위에 대한 광범위한 도전; 그리고 AIDS 격변. 다시 말해, 그들은 등장을 바라거나 의도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환경이 변하고 무엇인가가 삶과 정치의 규격화된 일상을 뒤흔들어 놓을 때, 일종의 퀴어 급진주의가 기회를 잡게 되었다.
I think we’re in a period—provoked by the new opportunities of the Obama presidency—when some small and not so small changes will occur that will move things farther along in the direction of formal equality. What might happen that would propel a larger, more progressive wave of activism into existence? Boy, do I wish I had an answer to that question!
나는 우리가 형식적 평등이라는 방향을 따라 무언가를 더 멀리 밀고 나아갈 시기, 그리고 또 어떤 작은, 그러나 그렇게 작지만은 않은 변화들이 일어날 시기-오바마 대통령이 건네는 새로운 기회에 영향을 받을 시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무엇이 더 크고, 더 진보적인 액티비즘의 물결이 등장하도록 이끌 것인가? 오, 나는 정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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