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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

[회원에세이] 활동가, 칼럼, 지면의 미덕- 경향 오피니언을 마무리하며

by 행성인 2023. 6. 23.

 

남웅(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2023년 5월 경향신문 오피니언 NGO 발언대에 칼럼을 넘기면서 연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담당자는 힘드셨냐고 걱정어린 인사를 건넸지만, 솔직히 힘이 들어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오피니언 

 

2020년 5월 코로나19 이태원사태 이후 성소수자 긴급대책위원회를 꾸려 미디어 모니터링을 하게 되었고, 그 기회로 미디어 투데이 독자권익위원과 경향신문 오피니언의 지면을 얻었다. 바로 나에게 제안이 온 건 아니었고, 이전에 역할을 했던 활동가 동료가 추천을 하거나 자신에게 들어온 지면을 나에게 제안한 것이었다. 성소수자 운동의 의제를 알리고, 활동의 견문을 넓힐 좋은 기회여서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때마침 새로 찍은 증명사진의 쓰임이 생겼다는 뿌듯한 생각도 들었고.(지갑을 잃어버린 터였다) 성소수자 운동의 의제가 다양해지고 그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깊어지면서 주류 미디어들도 관심을 갖고 관계를 도모하려는 의도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독자권익위원은 1년을, 경향 오피니언 칼럼은 3년 가까이 담당했다.

 

경향 오피니언 칼럼을 쓰는 동안 담당자가 세 번이 바뀌었고, 다행히 마감일을 어기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조금 버벅였다. 오피니언은 200자 원고지 6장 반 페이지를 요청했는데, 초반엔 간혹 분량을 조금 헷갈려서 6째 페이지를 반만 채운다거나 8번째 페이지까지 넘어가버려 마감 직후 부랴부랴 분량을 조정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6주에 한번 씩 각 분야의 필자들이 돌아가며 쓰는 패턴은 필자들이 한명 두명 빠지면서 5, 4주로 좁혀졌다. 그래도 몇 주 전부터 특정 주제를 써야겠다고 미리 마음먹고 조금씩 썼지만,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이 나라의 성소수자 이슈는 초보 칼럼니스트의 살뜰한 성의를 보란 듯 져버리곤 했다. 이전 주제를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고개를 들면 이미 다른 이슈가 터져 있다. 눈은 다른 데로 돌아가고, 한참 준비한 글을 폐기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시의성 있는 주제를 다루는 것이 중요하겠다고 생각하지만 더러 운동의 발걸음과 속도를 맞추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가끔은 대응이 먼저 있던 활동들을 갈무리하는 방식으로 쓰게 되면서 텐션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요령이 생겨 마감 사흘 전까지 기다리다 이슈들을 리서치하고 바로 쓰는 벼락치기 패턴에 익숙해졌다. 

 

까다로운 작업이라고? 제대로 짚으셨다. 물론 그만큼 일간지 지면에 칼럼을 기고하는 것은 활동가에게 적지 않은 학습과 훈련이 된다. 성명과 논평, 토론문 등 소위 운동방언에 익숙한 활동가에게 지면의 칼럼은 대중을 향한 문장을 쓸 수 있는 감각을 익히게 한다. 실제로도 운동단체와 크게 관계 없는 주변의 동료와 친구들이 글을 보고 먼저 인사를 하거나 피드백을 주기도 했다. 당연히 글쓰는 입장에서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1300자 남짓한 분량은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무엇을 넣고 뺄지, 무엇이 사족이고 핵심인지 판별할 것을 요구한다. 사실 쓰는 작업보다 더는 작업이, 단어를 바꾸고 문장을 세공하는 작업이 더 길었고 공이 들어갔다. 하여 기사를 보면서 필자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썼는지, 어떤 효과를 노리면서 단어를 고르고 하이라이트를 줬는지 조금은 가늠할 수 있게 된 것도 배움이라면 배움이다.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다보면 관심 있는 분야에 전문성을 갖게 되고, 어느 순간 전담하다시피 하면서 특정 의제를 중심으로 세계관을 좁히기 쉬운데, 칼럼은 내가 주로 몸담는 운동의 이슈들을 소개하면서도 운동의 지류를 정치사회의 큰 흐름 위에 다시 엮어 읽을 수 있는 시야를 넓힌다.

 

쓰면서 느끼는 건 성소수자 이슈가 기대만큼 사람들에게 매순간 관심이 높지는 않다는 것이다. 더불어 모든 의제의 흥미도도 저마다 달랐다. 종종 여론의 관심이 높은 이슈에 손을 얹고 싶은 유혹도 들었다. 관종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관종을 하게 만드는 여론의 생리가 있음을 체감하게 되지만, 나는 성소수자 운동에 몸담은 이로 지면에 초대되었다는 사명감을 다잡는 '초심'을 새삼 견지했다. 그럼에도 같은 날 올라오는 원고들을 보면서 호응의 척도는 뭔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런 점에 줄곧 순위권 밖을 맴도는 나의 칼럼은 줄곧 아픈 손가락 같은 인상을 준다. 물론 개인적으로 전혀 홍보하지 않는 나의 책임이 있을 것이고, 문장과 의제가 갖는 매력의 부족도 있겠지만, 글쓰는 입장에서는 호응도의 높고 낮음을 원고의 좋고 나쁨의 문제로 평가하지 않는 태도 또한 필요할 것 같다. 중요한 건 활동가로서 자기 글이 무엇을 말하는지 대중에게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일 것이므로.

 

 

애증의 데스크

 

칼럼의 장점은 편집자가 있다는 것이다. 원고를 넘기면 데스크의 승인을 기다려야 하는데, 바로 다음날 게재하는 칼럼 특성상 짧은 시간동안 기다림과 협상이 이어진다. 데스크 담당자들은 저마다 스타일은 다르지만 일선에 신문의 독자를 의식하며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를 따져 독자에게 어떤 표현이 좋을지 계속 생각하게 해준다. 이들은 해당 이슈가 법적으로 저촉되지 않는지, 근거가 있는 이야기인지, 표현이 적절한지 저자에게 확인하고 판단한다. 손에 보이지 않는 일반 독자의 언어를 가늠하고 그에 맞는 논리를 조정하는 역할은 다소 주관적이고 보수적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법적·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무게를 고려하면 이러한 태도는 수 년에 걸쳐 훈련된 태도라는 생각도 든다. (나를 담당한 편집자의 경우, 에이즈 요양병원에 대해 글을 쓰다가 해당 병원 원장 염ㅇㅇ에게 항의를 받느라 애먹었다고 하니 데스크 역할은 이래저래 고된 것이다.) 쓰다보면 이 작업이 필자로서 자율성이 온전히 보장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이 오히려 협업의 감각을 갖도록 하고 단어 하나하나 고려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오히려 편집자의 개입은 자신의 책임을 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데스크의 요청과 피드백을 모두 수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감을 보내면 글은 내 손을 떠난다고 하지만 글과 저자가 온전히 분리되지는 않는다. 어떤 담당자는 나의 입장이 사람들에게 설득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해당 사안에 대한 사실 확인과 증거를 과도하게 요구하기도 했다. 무엇을 풀어 쓰고 설명할지 학습하는 훈련은 주장에 좀 더 책임을 갖도록 만든다. 하지만 가끔은 특정 사안에 너무 많은 것들을 설명해야 하는 경우들이 있다. A4 반 장 남짓 분량 안에 이야기를 풀어내려면 압축적일 수밖에 없고, 하여 짧은 문장에 표현을 고려하게 되는데, 드라마틱한 표현에 대한 유혹을 떨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쓰고 싶은 표현을 모두 쓰면 자극적인 맛에 금세 물리고 속을 들켜 부끄러워진다.) 

 

그런 점에 칼럼을 쓰면서 활동가로서 자기 기준을 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데스크는 나의 글을 객관화하면서 피드백을 주고 받는 중요한 파트너지만, 지면의 편집자이자 담당자라고해서 무조건 그의 뜻에 동의할 수는 없다. 대개는 점잖은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탈없이 지나갔지만, 누군가는 개인을 겨냥해 쓰는 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지양해달라고 했고, 어떤 편집자는 나의 주장이 흑백논리라고 평가하며 나의 글이 편파적이라 나무라기도 했다. 사회적 소수자 이슈는 항상 논쟁거리로 소모되었지만, 언제고 논쟁을 만들어 변화를 이끌어야 하기에 당연히 편파적으로 보일 수 있다. 편파적인 글을 쓰지 말라고 할 거라면 활동가에게 글을 왜 받는가를 묻고 싶었지만, 그 거리를 좁혀 나가는 것이 운동의 책임이고 여기에는 나의 한계도 있을테니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데스크가 성소수자 운동에 지면을 내어준 것에 큰 결단이 있었음을 이야기하면서 그에 응하는 책임을 다하라고 말하는 점은 최대한 감정을 섞지 않으려는 고삐쥔 손을 놓고싶게 만들었다. 주류 언론은 사회적 소수자의 이슈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지면을 내어줬으니 책임을 다하라는 말은 어떤 거만을 품고 있는지 기어이 묻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팩트만큼, 혹은 그보다 중요한 것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데 방관하는 민주당을 비난하는 글에 대해서, 또는 HIV/AIDS예방약과 치료제 등에 높은 약가를 유지하면서 천문학적 이윤의 일부를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지원하는 초국적제약회사를 비판하는 글에 대해 담당자는 편파적이라고 코멘트 했다. 주관적인 판단은 어느정도 수긍하더라도 참기 어려운 것은 나의 주장을 팩트로 입증하라는 요구였다. 특히 최근에 벌어진 에이즈와 약물과 같은 첨예한 의제의 경우가 그러했다. 당시 붙잡힌 61명이 모두 HIV감염인인 것이 설령 경찰의 발표이고 사실이라 할지라도, 인권의 관점에서는 다른 질병과 달리 유독 HIV를 표적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사실에 기반 하는 서술일지라도 '아'와 '어'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사실의 프레임에 벗어나지 않아도 뉘앙스와 해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말인즉 오피니언 발언대는 논증 과정 자체 보다 방향이 중요한 경우가 있다. 관련해서 데스크를 상대로 날을 세워야 할 때가 종종 있었다. 숫자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해야 하고 사실만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설득해야 했다. 

 

그토록 언론의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저 사실에 기반 한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1차 저널의 문장이 차후 2차 생산물에 오용되어 악의와 음모가 가득한 내용들로 재생산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책임을 다하라는 일종의 미디어 비평적 태도이기도 했다. 대중에게 낯선 인권운동 언어의 벽을 인식하게 만드는 데스크의 태도는 운동에 익숙하지 않거나 항상 급진적인 생각을 하지는 않을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최소화하면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접근과 표현을 요청하지만, 거꾸로 인권운동은 어떤 가치를 끝까지 사수할 것인가를 또한 생각하게 만든다. 일요일 오후 전화로 이어지는 짧은 설전은, 결국 지면을 갖는 칼럼니스트의 책임 저편에 민감한 이슈를 다뤄야 하는 언론의 책임이 무엇인가를 토론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마무리

 

그런점에 성소수자 활동가로서 칼럼을 꾸준히 남기는 경험은, 소위 진보 언론을 표방하는(일단은 이렇게 불러본다) 메이저 신문사일지라도 성소수자 관련 의제에 대해 온전히 고르게 환대하지는 않음을 깨닫게 한다. 글을 쓰면서 독자의 호응을 비교적 많이 받은 이슈는 여성과 트랜스젠더, 노동자와 이주민으로서 성소수자의 일상을 말하고 외부에서도 확실하게 차별로 인정받기 쉬운 경우들이었다. 더러 데스크는 성소수자 인권활동가로서 대중 독자에게 주류화 이슈의 관점으로 동성혼과 시민권을 다루기를, 또는 동료 시민으로서 일터와 성별정체성의 이슈를 적극적으로 다루는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어떤 담당자는 이런 의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요구하기도 했다.) 소위 기성 사회의 시민권을 확보하기 위한 '주류화' 의제나 '피해자' 서사는 내가 지지하는가 여부와 별개로 일선에 제일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해를 거듭하며 느끼게 된 건 신문사가 상정한 일반 독자를 향해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성소수자를 독자 삼아 하고 싶은 이야기와 논점이 분명해진다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따로 있는데 그것이 아직은 성소수자 운동에서 온전히 소화되거나 논의되지 못한 이슈라는 생각이 들 때, 나는 어떤 방향의 운동을 해야 하는가를 좀 더 고민한 것 같다. 

 

햇수로 4년차이지만, 개월 수로는 3년을 못 채웠다. 생각해보면 이 작업은 삼삼오오 끼리끼리 떠들기 쉬운 인터넷 환경에서 끝없이 기준을 확인하고 조정하며 나의 위치를 의심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집필 기간에 대한 특별한 계약이나 협약 없이 써달라는 요청을 받아 계속해서 쓰는 작업은 종종 내가 언제까지 쓰고 어느 시점에 나의 문장에 최종 마침표를 찍을 것인지, 그 기준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게 한다. 사고처럼 갑자기 지면을 제안 받았지만 이런 저런 동기로 올해 여름 중으로 그만 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류 언론의 지면에 글을 쓰는 건 나의 언어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며 수정하는 작업이지만, 그만큼 나의 지향을 확인하며 날을 다듬는 시간이기도 하기에. 나보다 더 적합한 다른 이들의 관점이 더 많이 소개되면 좋겠다는 판단이 있었고, 길게 생각하면서는 일반 대중만큼이나 성소수자 독자들을 향한 메세지를 만들어낼 중요성을 또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도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동안 4주에 한번씩 해당 주 화요일마다 마감 공지를 받고 일요일 오전 원고를 보낸 이후부터 은근하게 조이는 데스크의 연락을 더는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 섭섭하기보다는 시원하다. 어떤 데스크 편집자는 일요일에도 출근 해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자조적으로 남기며 필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는데, 그의 마음도 나처럼 가벼웠기를 바란다.

 

활동에 구력이 생기고 이런저런 발언과 성명을 쓰다 보면 언제고 주류 언론의 지면을 제안받을 날이 있다. 그런 비슷한 자리를 담당하면서 조금 막막할때, 마감을 앞두고 모니터를 보면서 이런저런 고민과 상념들이 생길때, 이 글이 조금이나마 당신의 외로운 길에 잠시나마 말벗이 되기를 바라며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