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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

[회원 에세이] 저 이 정도면 "애기 호모" 탈출인가요?

by 행성인 2023. 7. 26.

수풀(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어느덧 행성인 첫 오프라인 모임을 나온 지도 1년이 넘었습니다.
 

사실 그전에는 어딘가에 안전하게 속해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어요. 충동적으로 오프라인 모임을 신청했던 그때도 그랬습니다. 저는 지금 대학교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하고 있는데요. 퀴어가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써가면 "왜 주인공이 굳이 퀴어여야 하느냐" 부터 시작되는 고루한 피드백들에 너무 지쳐있었습니다. 한 번은 "좌충우돌 게이 섹스 로맨틱 코메디" 단편을 찍으려 준비 중이었는데, 교내의 연기과 학생들에게 하나같이 캐스팅을 거절당했습니다. 다들 "이런 역할"은 부담스럽다면서요. 퀴어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일상에서 크고 작은 피로함이 저를 행성인으로 이끈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고등학생 때 행성인 신입회원모임 디딤돌을 다녀온 이후 다른 활동에 참여하지 않은지라 아무도 모르는 그룹에 가는 것이 처음에는 너무 어색했어요. 그래도 처음 참여한 퀴퍼에서 폭우를 뚫고 행진을 완주한 뒤로 여력이 되는 한 여러 활동에 참여하려고 했습니다. 후원주점 스태프로 참여했던 것도 기억에 많이 남아요. 처음으로 이 단체의 구성원으로서 무엇인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너무 좋았습니다. 물론 그 다음날 너무 힘들어서 하루 종일 침대에 있었지만...


게이 클럽에 처음 간 것도 행성인 회원들과 함께였습니다. 송년회 자리에서 알게 된 한 회원분이 게이 클럽 가보셨냐고 물으셨어요. 게이 클럽이라... 20살이 되고 한 번 은 가보고 싶었지만, 코로나 때문에 가지 못한 그 곳? 왠지 이쪽 인맥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어야만 갈 수 있을 것 같았던 그곳?? 


결국 크리스마스이브에 클럽에 가기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클럽에 가기 전, 한 회원님의 집에서 간단하게 술을 마셨는데요, 그 때 "애기 호모"라는 말을 처음 들었어요. 아래의 짤을 보여주면서 저에게 어떤 호모(?)가 되고 싶은지 물으시더라고요. 저는 나름 예술 전공이니까 "러쉬 스타벅스 미술 요리" 이쪽이라고 얘기했는데, 5년 뒤 "어떤 호모"가 되어 있을지 저도 궁금하네요.

 

여러분은 어떤 호모인가요?!

 

클럽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 그 미드 같은 데서만 봤던 클럽에 간다고? 갔는데 나 혼자 뻘줌하게 구석에 서 있으면 어쩌지...'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쫄았는지 모르겠네요.

 

처음에는 너무 어색했어요. 솔직히 드랙쇼만 보고 집으로 일찍 들어가자고 이야기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술이 조금씩 들어가고, 흥겨운 케이팝 걸그룹 노래가 울려퍼지니 내 안에 숨어있던 작은 디바가 서서히 깨어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느새 저는 취한 게이들의 인파에 휩쓸려 너무도 신나게 클럽을 즐기고 있었어요.


그리고 어느덧 드랙쇼 할 시간이 되어 쇼를 보고 있었는데, 옆사람이 저를 자꾸 쳐다보더라고요. 그 사람이 수줍게 인사를 건넸고, 저도 어색하게 화답했어요. 그 사람에게 술을 한 잔 얻어먹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와 키스 하고 있었습니다...어느새 그 사람은 사라지고, 다시 또 신나게 춤을 추고, "이 정도면 성공적인 데뷔다!" 같이 온 회원분이 외치셨어요. 그리고 어쩌다보니 같이 놀고 있었던 형과 키스를 또 했고...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지친 얼굴의 회원님이 이제 집에 가자며 저를 불렀어요. 시계를 보니 어느새 4시를 훌쩍 넘었더라고요. 하지만... 이대로 집에 갈 순 없었어요. 너무너무 재밌었거든요! 결국 같이 온 회원님은 먼저 들어가고, 다시 클럽으로 향하는데 클럽 직원이 아까부터 제가 눈에 띄었다며 술을 주겠다고 저를 데리고 가더라고요. 당시에 너무 취해서 더 못 먹겠다고 이야기하니까, 자기가 대신 마시면 본인이랑 키스해야 한다고 했고, 그와 키스를 한 뒤 비틀거리다가 마감시간이 다 되어 드랙 언니들에게 쫓겨난 것이 마지막 기억이네요.


숙취에 시달리며 집에 가는 길에 생각했습니다. "나 이런 거 좋아하네..."

 

그 이후로도 행성인 회원들과 같이 몇 번 더 클럽을 갔고, 그래도 군대 가기 전에 한 번은 열심히 놀아 봐야하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어쩌다보니 지난 달에는 매주 이태원에 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생각해보면 행성인을 통해서 처음 경험한 것들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기수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아이다호 투쟁대회에서 열심히 행진하는데 한 상임활동가분이 혹시 기수 해보고 싶냐고 물으셨어요. 신나서 아무 생각 없이 한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무겁더군요. 그러면서 기수 원래 아무나 안 시켜준다고 이야기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그래도 이제 저는 행성인에서 "아무나"는 아니라는 생각에 괜히 뿌듯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제 행성인 활동에 재미를 붙인 것 같은데 군대를 가서 너무 아쉽네요. 그래도 행성인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이 있다는 것 만으로 왠지 든든한 마음이 듭니다. 지금은 따로 팀에 들어가 있지 않은데 전역하면 한 팀에 들어가서 더 열심히 활동도 해보고 싶어요. 이 에세이가 나갈 때 쯤이면 저는 아마 이미 훈련소에 있겠네요. 마지막으로 깃발 들었을 때 사진으로 글을 마무리해볼까 합니다. 다들 다시 볼 때까지 잠시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