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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인 활동/활동 후기

[제 16회 성소수자 인권포럼] “내 몸은 고통의 몸인가?” – <트랜스젠더 수술과 비수술> 세션 후기

by 행성인 2024. 2. 20.

빌리 (행성인 트랜스젠더퀴어 인권팀)

 

 

 

 

<트랜스젠더 수술과 비수술: 트랜스젠더들의 당당한 비/수술 이야기> 세션은 2024년 성소수자인권포럼에서 가장 기대하는 세션이었다. 치밀하고 첨예한 운동 이론과 인권 담론 대한 세션도 좋지만 활동가들의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우러나오는 감각과 통찰,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받게 되는 위안의 소중함을 느낀 바가 있어서 이번에도 기대했고, 그 기대는 적중했다. 그 동안 들어볼 수 없었던 트랜스젠더의 몸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는 젠더가 얼마나 몸과 결부되어 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흔히 섹스와 젠더를 구분짓기 위해 생물학적 성징과 나의 내적인 감각을 설명으로 제시하는데, 글로 표현하면 또렷해 보이는 둘의 경계가 실제 삶에서는 명징히 구분되지 않고, 상호작용적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수술이라는 키워드로 잡아낸 세션이었다. 

 

 

이 정도는 해야 트랜스젠더지 

 

트랜스젠더의 경험을 모으는 자리에서 은 젠더가 자리잡는 육신인 것을 넘어서 이들의 젠더 정체성의 진정성의 증거로 위치되고 있었다. 트랜스젠더는 지정 받은 성별과 다른 젠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이해를 기반으로 당연히 젠더 정체성과 맞는 몸을 욕구한다는 전제가 형성되어 있고, 이는 한국 사회 뿐 아니라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서도 통용되고 있음을 또 다시 확인한다. 그것이 옳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모두가 획일적으로 수술을 통한 트랜지션을 원할 것이라는 전제가 자신의 실제 경험을 대변하지 않았다고, 패널로 나온 모두가 이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특히 한희님 같은 경우, 처음 트랜스젠더 커뮤니티를 접할 때만 해도 모두가 수술을 했거나 원하고 있어서 당연히 자신도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많은 트랜스젠더를 만나고 “몸이 정체성을 구분 짓는 잣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게 되고 법적 성별 정정을 하지 않아도 현재 자신이 생활 함에 있어 큰 문제가 없기에 수술을 하지 않을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러니까, 수술은 트랜스젠더가 되기 위한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수술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희망서사는 수술에 대해서 공유될 수 있는 후기와 그렇지 않은 후기를 나눈다. 에디님은 자신보다 먼저 트랜지션을 한 언니들을 언급하며, 그들과 나눈 이야기들을 세션에서 들려주었다. 수술을 하고 나면 으레 힘든 일이 있기 마련인데, 이에 대해서 언니들에게 푸념을 늘어놓으면 그제서야 “맞아, 그거 힘들어”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주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왜 진작 이야기 안했어?” 라고 되묻기도 했지만, 그에 대한 답도 이미 알고 있다.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곳도 할 곳도 없기 때문에 한 번도 수술과 결부된 힘듦을 토로할 필요조차 못 느껴서 그랬으리라는 것이다. “수술을 마치고 나면 행복하다고 말을 해야 하는 압박”과 “원해서 한 수술인데 (이후 불편함에 대한 것은) 감내해야 할 몫”이라는 분위기도 한 몫 했을 것이라 얹었다. 블레인님도 이와 결을 함께 하며 FTM 커뮤니티의 경우, 마초적인 감성이 함께 더해지며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수술 후의 애로사항을 말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하였다. 트랜지션 여부에 따른 커뮤니티 내의 갈등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이는 결국 커뮤니티에서 선망/욕망의 대상이 되는 수술을 한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할 뿐이지, 그들의 불만 호소는 단지 가진 자의 투덜거림이 될 뿐이란 것이다. 그래서 쟁취한 수술, 그리고 이후의 성별정정을 해서 ‘행복’했는가 하면, 사실 온전히 그렇지만도 않았다고 한다. 블레인님은 성별정정 이후 “이 종이 한 장 받고자 내 20대를 다 받쳤구나 싶은 감정”이 들었었고, 에디님은 36살에 그 과정을 마치고 나니 이제 시작점에 선 “20살이 된 것 같은 상황에 현타”가 왔다고 한다. 흔히 트랜지션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일 뿐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셋의 이야기를 통해 트랜지션에 왜 이리 많은 행복이 달려있는 것 처럼 서사가 만들어지고 있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희망을 보장하는 수술의 서사가 만들어내는 정보 불균형 속에서 누락되는 이야기에는 재생산건강도 있었다. 블레인님은 자신의 계획적인 성격과 이후 구직활동이 늦어지면 안된다는 위기의식 하에 최대한 신속하게 트랜지션을 진행했다고 말한다. 달리 표현해 주시기를, “제도가 나를 밀어붙여 허겁지겁 트랜지션을 진행”하는 동안, 난자 냉동과 같은 재생산권에 대한 고민은 할 수 없었다. 심사숙고해야 하는 문제는, 학업 이후 노동으로 이어지는 한국 사회의 컨베이어벨트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생략되었던 “제도가 허락하지 못한 고민”이 된 것이다. 에디님은 바텀수술 이후 협착증을 예방하기 위한 이후 대처도 대처지만, 여성질환으로 불리는 질환에 노출되는데, 이에 대한 정보도 치료 방법도 공유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증상이 심해진 어느 날 들어간 약국에서 산 연고가 그렇게 잘 들었다는데, 이런 일상 생활 속의 건강 지식에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고려사항이 없다는 문제의식은 트랜스젠더 커뮤니티 뿐 아니라 의료계에서도 공유되어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 몸을 긍?정?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세 패널의 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주제도 주제지만,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듣겠어 싶은 인권포럼의 묘미였다. 자위를 하는 것은 내게 주어진 성기를 곧이곧대로 쓰는 것인데, 이는 내 젠더를 거스르는 행동인가? FTM으로서 섹스를 할 때 삽입하는 포지션을 맡지 않으면 내 젠더는 진정성있게 받아들여질까?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을 청중들과 나누는 패널을 보며 나는 MTF는 초-성적화되고 FTM은 자주 잊혀지는 트랜스젠더의 가시화의 과정 속에서 이들의 성적 욕구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마주했다. 몸을 젠더의 진정성을 증빙하는 증거로 만드는 기존의 담론이 편리하게 망각한 이야기들 중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한희님이 좀 더 직접적인 질문을 던졌다. “남에게 나의 알몸을 보인 적은 언제인가?” 목욕탕과 워터파크와 같은 곳에서 개방된 샤워실이 기본적인 문화로 자리잡혀있는 한국에서 세 패널 모두 고민해 본 적이 있는 부분이기도 했고, 기존 운동에서 화장실과 더불어 성별분리된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다루어 왔던 부분이기도 했다. 세션에서는 더 나아가 내가 위화감을 느끼는, 아니면 수술자국이 있는 몸을 어떻게 바라보고, 남에게는 어떻게 보여야 할 지에 대한 고민도 이야기했다. 수술 이후 환부가 너무나 징그러워 숨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이야기와 의사가 그 환부를 꾸준히 들여다봐야 익숙해진다고 조언해주었던 이야기. 성기 노출이 신경쓰여 건강검진에서 내시경 항목을 추가하지 않았던 이야기. 그리고 성적 관계를 나눌 때 상대방이 나와 나의 몸을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위화감이 너무 크게 올 것 같아 오는 무섭다는 고백. 내밀한 이야기를 30명도 넘는 청중 앞에서 나누게 된 데에는 이런 이야기가 이후에도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나눠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과 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가?” 묻는 질문에 성소수자 활동가들하고도 나눌 자리가 없었다고 세 패널 모두 동의했다. 앞서 수술을 통한 트랜지션은 희망을 약속한다는 서사가 자리잡고 있다고 했는데, 반대 지점에는 트랜스젠더가 트랜지션을 하지 않은 자신의 몸을 고통의 원인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인식이 존재한다.[각주:1] 그렇기에 트랜스젠더에게 있어 고통을 전제하지 않은 자신의 몸에 대한 이야기는 선뜻 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고 한희님은 밝혔다. 에디님은 으레 수술을 통한 트랜지션이라 하면 성기성형까지 포함해서 생각하곤 하는데, 이런 고정관념을 벗어난 트랜지션, 가령 (상대적으로 쉬운) 가슴수술은 했거나 하고 싶지만, 성기성형은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였을 때 이를 과연 트랜스젠더 커뮤니티는, 그리고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있다고도 말했다. 결국 우리는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어떤 정상성을 부여해버린게 아닐까 하는 걱정인 것이다. 세 패널의 이야기는 규격 외 존재인 트랜스젠더 마저도 그에 맞는 규격이 만들어지고 있는 이 사회에서 트랜스젠더의 몸과 수술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하는 숙제를 던진다.

 

 

 

연초에 고등학교 동창과 그의 젠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바이섹슈얼로 정체화를 했었던 오픈리 퀴어 였던 친구는 10+년이 지난 지금 트랜스남성 범주의 어딘가로 살고 있었다. 그 과정 속에서 너무 “‘트랜스남성’스럽지 않으니” 탑수술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글을 인터넷 어딘가에 올리고 조언을 구하던 와중 그 글이 탑수술을 하지 않은 트랜스남성들이 마주하기 어려운 글일 수 있다고 친절히 짚어주는 메세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 이후 자신은 진짜로 “잘못된 몸”을 가지고 태어난게 아니라 그냥 자기 몸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것이었단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몸에 대한 성별위화감이 크게 없고 젠더퀴어로 정체화를 하고 있는 나도 젠더퀴어됨이 무엇일까 고민한 세월이 있었기에 나와 함께 자라온 친구도 그런 비슷한 젠더 경험을 했다는 것이 크나큰 위안과 안심으로 다가왔다. 나도 그래도 될 것이라는 안도감. 규격이 없는 우리들은 비슷한 이야기를 찾아 위안을 삼을 수 밖에 없어서 커뮤니티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잘못된 몸”에서의 탈피에 대한 서사가 이끌어 온 트랜스젠더 운동의 움직임이 있다면 이젠 거기에서 좀 더 다양한 이야기의 실타래를 뽑아낼 필요가 있다. 

 

몸에 대해서도, 섹스에 대해서도, 아픔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고 학습된 사회에서 그에 균열을 내고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들을 들려준 한희, 블레인, 에디님에게 큰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후기에서 다루지 못한 이야기들이 남아있어 (예: 트랜스젠더의 연애와 가족에 대한 욕구) 후기로만 이 세션을 접하실 분들에겐 죄송하단 말과 함께 우리는 이런 자리를 좀 더 많이 만들 필요가 있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1. 이에 대해서는 같은 날 오전에 있었던 연구포럼에서 윤세진님의 발제가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오전에 해당 발제의 토론을 맡았었는데, 이후 오후에 발제문에 나오듯, 트랜스젠더에 대한 의료적 담론이 수술을 통해 고통에서 행복으로 가는 선형적 서사를 만들어내고 고착화하고 있다는 비판을 그대로 담아낸 세션이 열린 것에 연구와 활동의 연속성을 느낄 수 있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