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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와 노동

[회원에세이] 일터를 우리의 것으로. '러스콜영'이라고 들어 봤나?

by 행성인 2024. 9. 24.

코코넛(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얼마 전, 웬만한 한국인이라면 다 알 만한 화장품 및 건강식품 등을 파는 프랜차이즈 가게의 한 지점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그래, 올리브영이 맞다. 게이 4대 업종이라고 불리우는 러시, 스타벅스, 콜센터, 올리브영을 합쳐서 '러스콜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뒤에 편의점, 백화점, 미용실, 제모샵까지 합쳐서 '러스콜영 편백미제'라는 말도 있는데 나는 뒤에 네 가지는 들어본 적이 거의 없을 뿐더러 그것까지 말하면 글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러스콜영만 다루겠다) 올리브영은 퀴어들, 혹은 게이들이 많이 일하는 곳이라고 하지만, 딱히 내가 게이 수행을 하고 싶어서 올리브영에 알바를 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올리브영에서 알바를 굉장히 많이 구하고 있었고, 매장의 위치, 근무 요일, 시간, 상황 등 여러 요소가 맞아서 근무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 주변에도 '러스콜영'이라 불리우는 그 업종에서 일하고 있거나 일한 적이 있는 퀴어 지인들이 꽤 많다.(''에는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카페 업종 전반을 포함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애초에 그런 업종에서 알바생이나 직원을 워낙 자주, 많이 채용하기 때문에 퀴어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러스콜영'이 게이 밈으로 자리잡을 정도로 게이들이 좋아하고, 많이 일하는 업종인 이유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게 되었다. 본문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확실히 해두자면, 나는 게이 커뮤니티 전반이나 러시, 스타벅스(를 비롯한 여러 카페), 콜센터, 혹은 올리브영 근무자들에 대한 편견 및 스테레오타입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며, 단순히 내가 관찰하고 생각한 내용을 공유할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의견과 생각은 모두 다르니, 내가 고찰한 내용이 다른 게이들이 생각하는 것들과 다를 수도 있다. 혹시 내 글이 다른 의도로 읽힌다면 미리 사과드리는 바이며, 댓글로 피드백을 해 주면 정말 고맙겠다.

 

 

'러스콜영'이라 부르는 이 업종들을(지금부터 '4대 업종'이라고 편하게 부르겠다) 게이들이 선호하는 이유는 일단 소비자의 관점과 노동자의 관점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소비자로서의 게이들이 4대 업종을 좋아하는 이유는 꽤 간단하다. 네 가지 업종 모두 사람들이 일상에서 상당히 자주 접하지만, 꽤 많은 게이들이 끌리는 요소를 몇 가지씩 갖추고 있다. 러시는 알록달록하고 향긋하고 종류도 많다. 골라서 사거나 사용하는 재미가 있다. 심지어 세면용품 및 샤워용품, 헤어 용품 등을 주력으로 팔기 때문에 실용적이어서 일상 안에 향기와 끼와 알록달록함을 자연스럽게 들여놓을 수 있다. 시스 헤테로 남성들보다 게이들 중에 관리를 더 꼼꼼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더 높은데, 러시같이 다양하고 힙해 보이는 제품들을 사용하면 뭔가 스스로를 더 잘 관리할 수 있는 느낌이다.(이래서 내가 저번 생일에 러시 제품을 그렇게 많이 받았나?) 아무튼 이유를 더 열거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게이들이 러시를 많이 소비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다른 업종도 마찬가지다. 살면서 올리브영을 가지 않는 한국인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시스 헤테로 남성들보다 화장품에 관심을 가지고 소비하는 경향이 더 높은 게이들이 올리브영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사실 콜센터와 카페는 잘 모르겠다. 남자들은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통일해서 주문하고, 주문 잘못 나와도 그냥 마시고, 자리에 앉아도 후딱 마시고 간다는 밈이 있기는 하지만 내 주변에 있는 헤테로(추정) 남성들은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말고 본인이 좋아하는 메뉴들 잘 시켜 마실 때도 많고, 게이들도 시간 없으면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거나 테이크아웃할 때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통일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콜센터는 진짜 애매한 업종 아닌가. 소비자로서 콜센터를 특별히 좋아하거나 자주 이용할 일이 있나. 퀴어여부를 떠나서 콜센터는 그냥 통화할 필요가 있으니까 전화를 거는 곳일 뿐인데. 이렇게 소비자로서 게이들의 선호가 애매해지는 지점에서, 업종이나 브랜드의 특성을 살피고 노동자로서의 게이들에 대해 살필 필요가 있다.

 

나는 성별 이분법적으로 노동을 구분하는 편견을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소위 게이 4대 업종에서 노동자들이 하는 일을 크게 살펴보면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주로 여성이 하리라고 예상되는 일들인 경우가 많다. 화장품을 만지고 팔거나, 음식을 만들거나, 손님을 상담하는 등. 그래서 사실 4대 업종에 게이들이 많이 취직한다는 것보다도 오히려 오래 전부터 이성애자 남성들이 익숙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많이 지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평균적으로 화장품에 익숙하지 않은 헤테로 남성이 올리브영에서 일하며 고객들에게 파운데이션이나 아이라이너, 틴트와 같은 화장품을 추천해 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노동에 대한 성별 이분법적인 고정관념이 더 약한 게이들이 이런 업종에 취직하는 데 거부감이 덜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본인들이 소비자의 입장에서 익숙해하거나 좋아하는 브랜드에 취업하고, 해당 브랜드가 게이나 퀴어들이 많이 일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더 강해지고, 그렇기 때문에 게이들이 그런 브랜드의 구직 광고에 더 눈이 가는 순환이 반복되는 것으로 보이며, 사실 그 중 어느 것이 선행하는지는 굉장히 애매하다.

 

러시는 특히 그렇다. 러시는 원래부터 천연 재료, 비거니즘, 크루얼티 프리, 사회적 정의, 소수자 존중과 같은 가치를 표방하는 기업이었고,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세계 여러 지점에서 밈이 된 외향적인 인싸 사풍의 이미지가 강하다고 알고 있다. 마침 그런 가치와 사풍을 추구하는 기업인 러시는 게이들이 좋아하는 상품들을 만들며 대중에게도 힙한 이미지를 굳히는 데 성공했고, 러시라는 브랜드를 즐겨 소비하는 게이들이 러시에 점점 취직하게 되었고, 이런 순환이 반복되어 러시는 끼 많은 게이들이 일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대중에게도 굳혀졌으며(실제로 내가 작년에 러시에서 알바를 하려고 알아보고 있을 때 아직 내가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헤테로 남성 친구들이 나에게 맨 먼저 한 말이, 러시에 게이들이 많이 일한다더라 하는 것이었다)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더욱더 퀴어프렌들리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또한 4대 업종과 같은 곳은 애초에 여초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형님'문화라고 불리우는 남성들의 비공식적인 친목 문화가 덜하고, 서로를 평등하게 호칭하며 일하기가 쉽다는 것도, 게이를 포함한 퀴어들이 이곳에서 일하는 것을 정서적으로 더 쉽게 만들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4대 업종이 모두 퀴어 프렌들리하고, 다양성을 존중하고, 모든 퀴어 구직자들의 안식처이고 그런 것은 아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러시, 스타벅스, 콜센터, 올리브영에서 일하는 것도 업무 강도가 낮지 않다. 러시를 제외하면 나머지 업종들은 퀴어 프렌들리를 대놓고 표방하지도 않는다. 다만 비공식적으로 게이들이 많이 찾는 구직처일 뿐이다. 또한 러시가 퀴어 프렌들리를 표방하며 비건페스타와 퀴어퍼레이드 같은 곳들에 나타난다고 해서 러시가 정말 구조적으로나 회사 정책 면에서 찐으로 퀴어 프렌들리하냐 하면 거기에도 의문을 표할 여지가 충분하다.(해외 대기업들을 위주로 한 대기업의 핑크워싱에 대한 논의는 나중에 내가 기고할 글에서 더 심도있게 다룰 예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4대 업종이 애초에 퀴어 프렌들리하거나 게이 프렌들리한 가치관을 반드시 표방하지 않는다 해도 그곳에서 일하는 게이들은 상당히 많고, 그들은 해당 업종에서 본인들의 자리를 찾았다는 것이다. 마치 종로3, 이태원, 신림, 홍대가 원래부터 게이나 레즈비언의 집합 장소로 시작되지는 않았고 지금도 공식적으로 이를 표방할 리가 만무하지만 퀴어들이 이 지역들을 차지해서 그 안에 우리들만의 자리를 만들어 놓은 것과 같다. 세상 어느 누구도 쉽게 일하고 쉽게 돈 버는 사람이 없다고는 하지만 퀴어들은 한국 사회에서 더더욱 일하기가 힘들다. 자신을 숨겨야 하고, 거짓말을 해야 하고, 자신과 맞지 않는 분위기에 억지로 적응해야 하고, 끊임없이 불편함이나 불안감을 느껴야 할 수 있다. 애초에 우리에게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은 노동 시장에서 우리가 작은 구석을 찾아 비공식적으로, 혹은 공공연하게 우리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많은 의미가 있다.

 

앞으로도 러시, 스타벅스(를 비롯한 카페), 콜센터, 올리브영에서는 게이를 비롯한 많은 퀴어 당사자들이 일할 것이다. 내가 올리브영에서 일하면서 화장품을 팔고, 러시를 집에 쌓아 놓고, 러시에서도 일할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헤테로 남성들이 나보고 올리브영이나 러시는 너무 게이같다고 한들 뭘 어쩌랴. 난 게이가 맞는데. 올리브영, 러시, 카페에 게이들이 몰리는 게 꼴보기 싫다고? 다른 직장에도 게이들은 많이 존재한다. 사회의 다수로서 권력을 차지하는 시스 헤테로 남성들이 4대 업종이 아닌 곳에서도 우리가 스스로를 표현하고 끼를 펼쳐도 혐오하지 않는 자세를 보인다면,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게이가 존재하고 퀴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주변에 성소수자가 한 명도 없다고, 그들은 모두 러스콜영에 몰려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성소수자들이 스스로를 드러낼 만큼 안전하지 못한 사람이니까, 반성하고 더 좋은 직장 동료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