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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여기동의 레인보우패밀리

육아#31. 재롱잔치와 동성결혼 배우자로 등록하기

by 행성인 2024. 12. 24.
기획의 말

행성인의 오랜 회원인 여기동님이 필리핀에서 안부를 전합니다. 2015년 한국에서 결혼식을 하고 남편의 나라로 가서 살림을 꾸리는 여기동 님은 딸 '인보'를 입양하여 육아일기를 쓰고, 최근에는 성소수자 연구들을 리서치하며 공부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여기동(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행성인 동지들에게. 

올해도 마지막 달을 맞이했습니다. 차분한 마음으로 정중동(靜中動)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계엄이 선포된 12월 3일, 서울의 밤, 그 밤에 동생 훈이와 전화 통화를 했어요.

 

훈이: 형 큰일 났어. 한국에 계엄이 선포되었어.

나: 아니 뭔 소리야?

훈이: 지금 여러 사람들에게서 전화가 와.

 

전화를 끊고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윤석열 정권이 지옥의 불구덩이에 뛰어드는구나, Good job!’. 윤석열 정권이 계엄령을 선포하여 ‘12.3 서울의 밤’이 된 것입니다. 아니 전쟁도 아니고 무슨 계엄인가?

 

저는 고등학교 2학년시절, 1980년 전두환과 그 일당들의 계엄을 보았어요. 어느 날 등길에 광화문 앞에 탱크가 떡 하니 서있더라고요. 그리고 무장 군인들이 보였습니다. 저는 그 시설 그 누구에게도 계엄령의 진실을 듣지 못했습니다. 먼 훗날, 대학에 들어가 알게 되었지요. 폭동이 아니라 ‘광주무장투쟁’의 역사라는 것을.

 

그리고 44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계엄이라고요? 정말 사악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나쁜 정권입니다. 하루빨리 탄핵시켜달라고 백일기도를 올려야겠습니다.

 

(필리핀으로 이주한 첫 해) 2016년 박근혜 탄핵을 유튜브로 보았던 것처럼, 유튜브로 촛불행동의 집회를 보고 또다시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고등학생과 20대 청년들의 분노와 탄핵의 외침이 이 위기를 극복하게 해  것 같습니다. 모국의 촛불이여 부디 승리해서 꼭 탄핵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어린이집 재롱잔치: Children Congress

 

 

 

필리핀의 11월은 어린이의 달입니다. 그래서 각 유치원과 학교에서는 Children Congress라는 재롱잔치가 열립니다. 

 

우리 시에 소속된 24개의 공립 어린이집이 시립 체육관에 모여 재롱잔치가 열렸습니다. 

부모회 부회장님을 맡으신 찰스 아빠가 아주 신나고 분주했더랍니다. 찰스 아빠는 대나무로 필리핀 전통 가옥 만들어 무대에 올렸습니다. 어린이들은 (동남아에서 공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나무 위를 뛰어다니며 춤을 추었습니다. 잘했다고 메달을 받아왔습니다. 

 

어린이들이 예쁘게 차려입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는 모습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귀엽습니다. 

 

 

 

인보가 엄마 되고, 엄마가 인보 되기?

 

며칠 전 아이가 저보고 인보를 하고 자기는 엄마를 한다는 거예요. ‘옳지 잘 되었다’하고 인보의 말투로 떼를 써보았습니다. “ (양치질 이미 했다는 거짓말로) 치카푸 했어요. 밥 안 먹어요. 사탕 주세요.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그랬더니 이 녀석 “않돼요 치카푸카 해야 돼요. 사탕, 아이스크림 배 아야 해요…”. 

 

그동안 이 녀석은 엄마와 아빠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뻔히 알았던 겁니다. 그리고 자신이 말을 안 듣는다는 것도 알려준 셈이죠. 이번 역할 바꾸기 놀이는 아이가 처음으로 요구하여해 본 것이라 신기했어요. 우리 딸내미 많이 컸네. 그래서 아이가 가끔 말을 안들을 때 이 녀석의 떼쓰기 버전을 써먹어보려고요. 

 

올해는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한 해였습니다. 

우선 인보가 3살을 먹었어요. 8월 어린이집에 입학해서 원생이 되었지요. 머리를 예쁘게 메고, 원복을 입고 가방을 메고 아빠 세발오토바이를 타고 어린이집에 갔습니다.

 

올해는 여러 가지 (법적 입양 절차가 무산되고) 우여곡절 끝에 생부모로부터 양육권 이양 각서를 받았습니다 (너무 중요해서 변호사 공증 도장도  받아 놓았어요.) 찰스 아빠와 저는 그동안 ‘아이를 빼앗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불안에 떨어야 했고 마음의 고통도 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 우환이 해소되어 마음이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국민연금 수익자로 지정받기

 

남편이 가입한 필리핀 국민연금 (Social Security System, SSS)에 저를 사망 시 수익자 지정해 달고 신청했습니다. 안 될 거라는 생각에 마음을 비웠어요. 그래야 나중에 거부당해도 화가 덜나게.

 

그런데 이게 일입니까. 그냥 아무 소리 없이 직원이 변경해 주는 겁니다. 기존에 지정되었던 조카를 삭제하고 제가 등록된 것입니다. 과거에 민간 보험회사 3곳에서 사망 시 수익자를 저로 지정받았는데 국가기관에서 인정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이곳 필리핀에서 배우자/파트너로 인정받았던 몇 가지 사례를 들려드릴까 해요.

 

 

 

FWD 보험회사

 

트랜스젠더 언니 마이클이 다니는 은행 지점에 FWD보험회사가 하나 있어요. 5년 전 찰스의 명의로 이 회사의 펀드에 가입했어요. 그러나 가입 당시 제가 사망 시 수익자로 지정될 수 없어서 이종 사촌 누나(인보의 친할머니)를 지정해야만 했었지요. 

 

그런데 며칠 전 마이클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험사 직원에게 문의하더라고요. 그런데 웬일이니, 어머나(?)였습니다. 회사가 정책을 변경하여 동성파트너가 가능하다는 거예요. 

 

우리 같이 퀴어한 부부는 배우자의 권리는 소중하잖아요. 사실 필리핀에서 이런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결혼증명서(Marriage Certificate)를 요구받아요. 이번에도 보험회사가 결혼증명서를 요구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결혼할 때 작성한 혼인서약서를 제출했어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서류 제출 후 수익자로 지정되었다는 메일을 받았습니다. 보험회사 앱을 확인해 보니 ‘배우자 Spouse’라고 떡하니 찍혀있더라고요. 너무 기뻐서 남편에게도 보여주었더니, 찰스 왈 “좋아”.

 

행성인 여러분, 위 사진에서 보이시나요? 제 영문이름(Kidong Yeu) 배우자 (Spouse)라고 찍혀있지요?

 

앞으로는 저희 결혼식 때 작성했던 주례자님과 증인의 서명이 담겨 있는 이 영문 혼인서약서를 들이밀어 보려고요. 이내 심정은 ‘이 혼인서약서에는 우리의 결혼한 역사적 팩트가 담겨 있어, 그러니 아~제발!’

 

 

영문 혼인서약서의 파워

 

 

 

혼인서약서를 작성하면서 우리에게 배우자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 항목을 나열하여 아래와 같이 작성하고 서명해야 했습니다.

 

…‘아직까지 필리핀과 한국에는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결혼계약서를 통해 서로의 동성결혼 배우자 권리를 보호하고자 하며,

또한 주님께서 우리 중 한 사람을 천국으로 부르실 때,

살아있는 동성 배우자는 다음의 모든 권리를 갖기로 이미 합의했다:

 

장례 및 매장권, 주택 토지, 건물 및 거주권, 부동산, 현금, 연금, 보험, 은행 계좌 및

필리핀 (영주권 획득을 위해) 은퇴청에 예치한 예치금 등의 자산.’…

 

 

 

과거의 사례: Sunlife Canada & AXA 보험회사의 배우자 지정

 

첫 사례는 2021년 캐나다계 민간 보험회사에 찰스의 건강 Healh Care  보험 가입입니다. 상담 과정에서 문의했더니 동성파트너 등록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가입 후 보험증권에 ‘동반자 Partner’라고 등재되었습니다. 

 

 번째 사례는 결혼 전 찰스가 가입한 프랑스계 AXA 보험회사입니다. 사망 시 수익자를 누나 둘로 지정해 놓았었지요. 그런데 저희가 지점을 방문하여 동성결혼한 커플이라고 했더니 수익자를 변경해 주었습니다. 아주 쉽게 말이죠 (캐나다와 프랑스가 동성결혼이 가능한 나라라서 그런가?). 

 

 

 

국가기관에 도전하다: 필리핀 국민연금(Social Security System, SSS)

 

결혼서약서의 효력으로(?) 민간보험에서 인정받은 후, 우리는 곧바로 국가기관 가운데 하나인 필리핀 국민연금 SSS Pension에 문을 두드렸습니다. 융통성 없는 국가의 공공 기관은 더 까다롭게 굴고 최종적으로 거부당할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멈출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중대사이지요. 

 

잠시 긴장을 했는데, 직원은 서류를 받고 아무 말없이 바로 전산처리를 하더라고요. 너무도 쉽게요. 아마도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이 우리가 제출한 (종교기관의 직인이 찍힌) 영문 결혼서약서를 보고 받아준 것 같습니다. 

 

이렇게 공공기관의 첫 관문을 넘었습니다. 매년 1월엔 찰스의 국가건강보험료를 내러 갑니다. 필리핀 국가건강보험 PhilHealth에 피부양자 등록을 신청해보려고 합니다. 

 

 

 

한국 대법원의 동성배우자 인정과 보수기독교 동성애혐오세력의 발악

 

 

필리핀 국민연금에서 배우자로 인정을 받고 난 후, 성욱과 용민 아우님 커플이 국민건강보험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리한 뉴스가 떠올랐습니다. 대법원이 사실혼 관계에서 동성부부 배우자를 차별했다고 판결한 거죠. 국민건강보험은 배우자를 피부양자로 인정했습니다. 동생 커플이 감격한 순간을 페이스북에 올려놓은 것을 보았는데 저의 심정이 딱 그 마음이었답니다. 

 

대법원에서 동성커플을 배우자로 판결한 (위대한?) 돌멩이 하나로 (반동성애적, 동성애혐오세력인) 한국 보수기독교가 10.27 2백만 연합예배로 모이게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차별금지법과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성커플 배우자의 법적 인정은 향후 동성결혼으로 곧바로 이어진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죠.

 

그러나 이 어리석은 혐오충들아,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거늘, 혐오하는 반그리스도적 만행은 하느님이 용납하지 않으신단다. 하느님은 퀴어 자녀들을 창조하시고, 사랑으로 복을 내리신단다. 그러니 너희의 오만 방자한 ‘방파제’는 사랑의 쓰나미에 떠밀려 개박살이 날 것이다. 기다려라 동성결혼이 법제화되는 그날 너희는 통곡의 밤을 맞이할 것이니라. 아멘. 

 

 

 

결혼: 이성애자들만의 특권이 아니라 모두에게 평등한

 

배우자의 친권을 확보하기 위해 금융이나 보험 관련 저축을 할 때마다 험난한 산을 넘어야만 합니다.왜 이성애자 부부는 혼인신고서 한 장만 제출하면 모든 것이 자동빵으로~ OK 인데, 동성결혼 커플/파트너는 사사건건 아다니며 해결해야 하는가? 문의와 상담도 해야 하고, 관련 서류를 떼어서 제출해야 합니다. 아 솔직한 심정으로 너무 귀찮고 속상해서 정말이지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요.

 

곰곰 생각해 봐요. 배우자로 기재된 서류를 보고 동성커플은 집안의 경사(?)로 탄성을 지르고 감탄하는 일이, 이성커플에게는 그냥 자동으로 등재되어 자동으로 보장되는 이 해프닝이 정말로 공정한 처사인가? 평등한 대우인가?

 

대한민국 사회와 국가야, 바로 이런 이유로 동성결혼 법제화,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되어야 하지 않은가?. 성소수자 시민도 편안한 나라가 좋은 나라가 아닐까? 

 

 

 

모국의 동성커플 동지 여러분 

 

최근에 모국에서 동성결혼 위헌소송에 11쌍의 커플이 소송을 걸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뻤어요. 오늘 아침에 양치를 하다가, “앞으로 많은 커플들이 계속 소송을 걸 거야, 그러면 우리가 이길 거야, 혐오세력들은 우리를 막을 수 없어”라고 혼자 말이 나왔어요. 힘내서 승소하시길 두 손 모아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리고 행성인 동지 여러분,

올해가 저물어 갑니다. 올 한 해 저희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연말연시 즐겁게 보내시고 새해에 인보와 함께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