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원고는 필자가 플랫폼C 월례토론에서 '성소수자 운동의 투쟁과 연대의 역사'를 키워드로 발표한 내용입니다. |
이호림(행성인, 무지개행동, 윤석열즉각퇴진 사회대개혁 비상행동 공동의장)
작년 12월 3일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해야할 것 같다. 당시 태국 방콕에서 열리는 AWID Forum이라는 진보적인 페미니스트 포럼, 성소수자 활동가들도 많이 참여하는 행사에 출장을 가 있던 중이었다. 그동안 성소수자 운동의 국제연대 활동을 많이 하면서 홍콩 활동가들을 만나왔다. 현재 홍콩의 다수의 활동가들은 더이상 홍콩에 남아 활동할 수 없어서 캐나다, 영국, 일본, 대만 등에 살고 있고, 그래서 지금을 “새로운 홍콩 디아스포라 시대”라고 부른다. 홍콩의 시민사회는 전농의 반세계화 투쟁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할 정도로 한국의 투쟁적인 운동 방식에 놀랐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들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 역사를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지금의 젊은 세대 활동가들도 '임을 위한 행진곡'을 알고 있다.
홍콩의 활동가와 2시간 가까이 홍콩의 민주주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 그날 밤, 한국에서는 윤석열의 위헌적인 비상계엄 선포가 있었다. 나에게 제일 먼저 연락해서 ‘괜찮아?,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줘’라고 이야기 한 이들도 홍콩의 활동가들이었다. 윤석열의 계엄령은 단지 한국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며, 이것은 거시적인 지정학적 문제만이 아니라 이 지역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구체적인 삶의 문제임을 알게되는 순간이었다.
2024년 12월 7일, 윤석열의 위헌적인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표결을 앞두고 첫 주말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민주노총의 사전 집회가 끝나고 본집회를 시작하며 사회자가 평등하고 민주적인 집회를 위한 약속문을 낭독했을 때, 내 주변(무지개존 참여자들)에서는 어떤 발언보다 더 큰 함성이 터져나왔다. "우리는 성별·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장애·연령·국적 등에 관계없이 모두가 동등한 참여자"이며,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청소년, 이주민 등 사회적 소수자를 배제하거나 차별하는 말”은 이곳에서 허용되지 않는다는 내용의 집회 참여자를 위한 안내였다. ‘운동권’을 준거집단으로 살아온 나는 이쯤은 한국의 시민사회가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오히려 집회에 함께 한 성소수자 참여자들의 열광적인 함성에 놀라며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순간이야말로 성소수자 참여자들이 지금의 광장에서 안전함을 느끼며 참여하고, 자신의 삶의 배경과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말할 수 있게 한 중요한 기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펼쳐진 광장에서 성소수자 시민들의 정치적 욕구와 연대의 움직임이 폭발적으로 드러나고, 새롭게 발견되고 있다. 누군가는 왜 이렇게 많은 성소수자들이 정체성을 드러내며 말하기를 하는지 놀라워 하고, 또 누군가는 연대의 현장에서 만나는 환대에 감동하기도 한다. 우리가 함께 놀라고, 감동하는 순간들은 ‘우리’의 범위를 넓히고, 우리의 ‘연대’를 깊어지게 한다. 동시에, 지금 광장에 모인 우리의 힘을 예외적인 상황에 펼쳐진 일시적인 감동의 순간으로 남기지 않고, 우리를 모이게 한 계엄과 내란, 폭동 사태 앞에서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고, 모두가 존엄하고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보다 장기적인 투쟁의 힘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 중 하나는 지금의 광장의 모습이 우리의 오랜 투쟁과 연대의 역사 위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함께 확인하는 것이다.
#성소수자는 언제나 광장에서 싸워왔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이하 ‘행성인’)는 1996-1997년 노동자 총파업 당시 만들어진 ‘노동법 안기부법 개악에 반대하는 동성애자연대투쟁위원회’를 그 전신으로 한다. 성소수자 시민들은 무지개깃발이 지금처럼 광장에서 커다란 환대를 받지 않던 시절부터 중요한 사회적 투쟁에 함께 해왔다. 모두의 노동권을 지키고, 생명과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운동, 여성과 장애인, 이주민 등 다양한 소수자들의 권리를 지키고 민주주의를 확장하기 위한 운동은 성소수자 운동에게 차별금지법 제정과 동성혼 법제화, 트랜스젠더 성별정정을 위한 법제정 만큼 중요한 활동으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많은 성소수자들이 성소수자 운동만이 아니라 노동, 여성, 장애, 법률 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 영역에서 활동가로 우리 사회의 변화를 위해 일하고 있기도 하다.
집회가 안전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몇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당연히 경찰이 시민들의 집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아가 여기 이 공간의 모두가 안전하고 평등하다고 느껴야합니다. 안타깝게도 조금 전에 소수자들이 발언을 할때 온오프라인 상에서 이를 조롱하거나 비난하는, 혐오발언을 하는 몇몇 분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성별,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장애유무, 장애정도, 출신배경 등이 서로 다르며 그럼에도 모두가 민주주의를 바라는 민주시민으로서 여기에 있습니다. 함께 혐오없는 평등한 집회를 만들어갑시다. 혐오 없어야 더 다양한 사람들이 여기 모일 수 있고, 더 다양하고 풍성해져야 우리 세력과 힘도 더 강해집니다.
마지막으로 간단히 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아까 강원도 동해분이 계시더라고요, 저는 강원도 삼척 사람입니다. 네 너무 반가웠습니다, 강원도의 힘입니 다. 그리고 저는 강릉 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강릉고등학교는 남자고등학교입니다. 저는 법적 성별이 아직 남성인 트랜스젠더 여성, 트랜스젠더 여성 변호사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공간에서 낯섦과 다름, 다양성과 평등을 함께 배워가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윤석열을 퇴진시키고 윤석열을 체포하고 구속하는 그 날까지 함께 서로 끝까지 지치지 말고 투쟁합시다. 투쟁! - 박한희 변호사 (2025년 1월 5일 한남동 관저 앞 농성에서 집회시위 인권침해감시단 현장 발언)
이런 운동의 역사가 있었기에 성소수자 운동은 12.3 계엄사태 이후 발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이하 ‘무행’)은 12월 5일 긴급회의를 열어 ‘윤석열 퇴진 성소수자 공동행동’을 결성하고 퇴진 운동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기로 결정했다. 공동의장단으로 일하게 된 나를 포함해 여러 무행 동료들이 윤석열즉각퇴진 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하 ‘비상행동’)에 함께하고 있으며, 집회에 참여하는 성소수자들이 안전하고 힘있게 함께할 수 있는 거점이 되는 ‘무지개존’을 운영한다. 또한, 무행은 다양한 사회운동 연대체들, 노동운동단체들, 노동당·녹색당·정의당 등 진보정당들이 함께 하는 ‘윤석열 퇴진, 세상을 바꾸는 네트워크(이하 ‘세바넷’)’에 참여하며 윤석열 퇴진 이후 보다 평등한 세상을 열어나가기 위한 움직임에 함께 하고 있다. 세바넷은 ‘평등으로 가는 수요일’이라는 제목으로 매주 수요일 저녁, 평등의 요구를 확장하는 집회를 진행하고, ‘평등으로’라는 제목으로 매체를 발간하여 서울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다양한 활동을 전하고, 이를 온라인과 전국의 집회에서 배포하고 있다.
#우리의 연대가 변화를 만든다
지금의 광장은 성소수자의 목소리만이 아니라, 영역과 의제를 가로지르는 뜨거운 연대를 확인하는 장이기도 하다. ‘남태령’, ‘키세스’, ‘말벌동지’와 같은 키워드로 응집되는 공통의 기억이 만들어지고, ‘그렇구나 알아두겠다!’, ‘괜찮다! 문제없다!’와 같은 문장으로 알려지는 미담들이 SNS를 통해 전해진다.
성소수자 운동에 대한 시민사회의 연대를 집단적으로 확인한 계기는 2011년 성적지향 및 성별정체성이 차별금지사유로 포함된 서울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서울시의회 점거농성과 2014년 성소수자 차별금지 사유를 이유로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선포하지 않은 서울시에 항의하는 서울시청 점거농성이다. 성소수자 운동의 두 번의 점거농성은 당시에도 어딘가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던 전장연과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보내준 침낭과 농성물품, 김진숙 지도위원의 전화 연결 연대발언, 농성장에 식사 반입이 안 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2014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대량 해고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고공농성 중이던) 씨앤엠 노동자들, 쌍용차 노동자들의 연대발언 등으로 기억된다.
동지들 반갑습니다. 민주노총 부위원장 무지개동지 권수정입니다. 투쟁!
오늘은 오래전에 제가 했던 여성가족부앞 농성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2011년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사내협력업체 여성노동자가 8년동안 관리자에게 당한 직장내성희롱을 고발하며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냈고, 국가인권위는 직장내성희롱이 맞다고 판결해지만 현대자동차는 피해자를 해고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사건 피해자 대리인이었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6월에 당시 여성가족부가 있던 청계광장에서 피해자 복직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천막도 없이 피해자 언니와 둘이 침낭만 깔고 자는데, 둘째날 비가 왔어요. 여성가족부 건물 처마밑에 서서 내리는 비를 보며 어찌해야 하나 막막한데, 소식을 들은 동지들이 하나둘 모여 들고, 그때 한 동지가 주황색 1인용 텐트를 가지고 왔습니다. 경찰이 천막도 못치게 막는걸, 비는 피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싸워서 천막을 쳤고, 그 천막을 집삼아 투쟁이 승리해서 피해자가 복직했던 12월까지 6개월을 살았습니다. 그날 그 천막을 가지고온 동지가 성소수자 였습니다.
제가 무지개동지가 되지 않을 방법이 없습니다. 사람이 양심은 있어야 하고, 은혜는 갚으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동지들께 은혜를 갚고 있습니다. 평생, 두고두고, 이자 쳐서, 왕창 갚을 생각입니다.
- 권수정 민주노총 부위원장 (2025년 1월 15일 평등으로 가는 수요일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 집회 발언)
성소수자 운동과 다양한 사회운동의 연대의 기억이 켜켜이 쌓이며 당연해진 것들이 있다. 민주노총이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하는 것, 금속노조가 모범단협안에 성소수자 배우자의 경조사비를 넣는 것, 집회에 성소수자 단체만이 아니라 다양한 시민사회 단체의 무지개 깃발이 휘날리는 것, 공공운수노조 건물에 성중립 화장실이 있고, 거통고 조선하청지회가 성중립 숙소를 운영하는 것(거통고지회 사무실에 달려있는 무지개 깃발은 2022년 파업투쟁 당시 인권활동가 긴급대응에 함께한 행성인의 성소수자 활동가들이 선물한 것이다.).
지금 광장에 모인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연대의 기억도 더 큰 변화를 향해 뻗어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함께 보낸 추운 밤과 서로의 다름을 포용하는 환대의 순간들이 모인 지금의 광장은 우리의 연대를 더 깊어지게 할 것이다. 물론 그 사이 우리의 연대를 훼손하고 우리의 다름을 분열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을 것이고, 상처받는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달라진 광장의 공기를 기억한다면, 평등한 광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과 다양성과 연대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함께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시대를 다르게 만들기 위해 남은 과제
지금의 광장에서 성소수자 시민들과 운동의 존재감이 크게 드러나면서, 그 이유를 새삼스럽게 궁금해 하거나 이를 조금 불만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이 시점에서 내 나름의 답은 성소수자 시민들과 운동은 윤석열이 ‘내란 수괴’만이 아니라, 혐오와 차별의 수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란 선동에 앞장서는 국민의 힘과 극우 세력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를 조장하며 그 세를 불려왔다. 극우 기독교 세력은 작년 10월 27일 ‘차별금지법’, ‘동성애 반대’를 내걸며 ‘연합예배’라는 이름으로 광화문에서 대규모 집회를 개최했다. ‘자유마을’ 류의 극우 풀뿌리 대중운동 역시 ‘주사파 종북 세력 척결’과 ‘동성애 합법화 반대’를 기치로 조직화를 이어왔다. 성소수자 운동과 시민들은 내란 선동에 앞장서는 이들이 우리의 평등하고 존엄한 삶을 위한 변화를 가로막아왔던 바로 그 자들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성소수자도 이 싸움에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성소수자이기 때문에 함께하는 것이라고 집회에서 말하기도 했다.
지난 주말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동 사태를 바라보며, 혐오와 차별을 먹고 자라난 극우 세력이 이 국면을 지나며 어떻게 뻗어나갈지에 대해 너무나 큰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동시에 ‘성소수자 차별도 윤석열도 없는 사회로’라는 성소수자 공동행동의 구호가 성소수자 운동만의 구호가 아니라 극우 대중운동을 넘어서기 위한 우리 모두의 구호가 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기도 했다. 저들이 결집하는 핵심에 성소수자에 대한 뿌리깊은 혐오가 자리해 있다면, 저들을 넘어서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우리의 행동의 핵심에도 성소수자 혐오가 극우 결집의 힘으로 작동할 수 없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 자리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한 더 넓고 깊은 논의가 앞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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