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 ‘이안’은 인권활동가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본업이었던 그래픽/편집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의 이름이기도 하다. 오늘은 ‘이안 디자이너’으로서 올해 HIV/AIDS인권팀(이후 에이즈팀)과 함께 했던 캠페인 활동 소감을 나누려한다. |
장담컨대, 인생을 통틀어 가장 많은 게이업소를 방문한 이틀이었다.
당연하다. 난 게이가 아니다.
제목만 보면 뭔 말인가 싶겠지만,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HIV/AIDS인권팀(이하 에이즈팀)에서 오프라인 캠페인으로 기획, 시행한 ‘오늘, 섹스하고 싶은 당신을 위한 게이 섹스 안내서’를 함께 만들고 배포한 아주 건전한 이야기이다. 글을 쓰며 돌아보니 행성인 에이즈팀과의 협업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멀지 않은, 그러니까 제약회사 G사의 의약품 접근권 침해와 핑크워싱 반대하는 행동이 일어났을 때 행성인이 사용한 피켓과 현수막을 만든 기억이 난다. 2022년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HIV/AIDS인권행동 알(당시에는 커뮤니티 알이었던 것 같다)과 함께 ‘HIV/AIDS 감염인의 인권은 돈벌이 수단이 아니다’와 함께 다양한 문구로 질병과 감염인에 대한 인식개선 캠페인 출력물을 디자인 한 게 첫만남이었다.
“아니, 이게 있어야 일상생활이 가능한데 이걸 비싸게 팔려고 한다고?”
디자인 할 내용을 받자마자 처음 든 생각이었다(많은 디자이너 활동가들이 이런 식으로 인권활동 이슈를 좀 더 알게 된다(나만 그런가?). 내 주변엔 아픈 사람들, 약물이나 시술이 계속 필요한 몸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한 번 알게 된 이상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HIV/AIDS라는 영역은…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나와 그다지 가깝지 않다(고 느낀다). 당시에도 HIV/AIDS라는 건 ‘인권운동 의제 영역’으로만 존재했고 거리감은 꽤 멀었다. 어쩌면 지금도 ‘나의 일’은 아니라고 느끼는 지도 모른다. 다만 몇년의 시간 동안 달라진 점이라면 당사자나 적극적 지지자인 활동가들이 사랑스런 나의 동지가 되었고, HIV/AIDS에 대한 혐오와 낙인을 철폐해야 한다는 문장을 체감, 하는 정도.
그 뒤로도 에이즈팀의 활동을 주변에서 지켜보고만 있다가, 올해 흥미로운 오프라인 캠페인을 기획했길래 인쇄물 디자인 제안에 흔쾌히 수락했다. 제목이 ‘오늘 섹스하고 싶은 당신을 위한 게이 섹스 안내서’라니. 맘에 들었다.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표현방식을 좋아한다. 예전에 만든 연극 포스터에 딜도나 성기를 직접 그려넣었을 때와 닮은 재미 포인트가 느껴졌다. 잘 모르는 영역의 언어(그러니까, 게이/MSM 문화의 언어)를 날 것으로 접하는 경험은 흔치 않으니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막 자극적인 단어나 그림은 딱히 안 들어갔다. 그래서 뭐, 아쉬웠냐고? 음…살짝? 언젠간 에이즈팀에서 더 적나라하고 낯뜨거운 시도를 하게 되리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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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차례 원고와 디자인의 수정이 오가고, 최종 시안을 내놓았을 때엔 늘 그랬듯 뿌듯했다. 음, 게이 동지들 보라고 만든 포스터이긴 한데, 이 블랙핑크 조합은… 너무 전형적인가? 아니야, 예쁘잖아. 그래, 예뻐야 한 번이라도 더 눈길이 가지. 보라고 만든 거니까. 클럽이나 바, 술집 처럼 밤길 손님을 맞이하는 가게들은 대부분 조명이 어둡기 때문에 큰 맘 먹고 반짝거리는 용지에 인쇄했다. 먹 베다 위에 연핑크 텍스트의 나열이 꽤 괜찮았다(나중에 알았지만, 공교롭게도 배경이 먹이라 종이의 은은한 펄 따윈 잘 보이지 않았다. 젠장!). 이제 기한에 맞추어 예쁘게 인쇄되면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될 일이었다.
발주 직후, 인쇄소 P업체에서 담당자가 결제단계를 멈추더니 잠시 정적 뒤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 죄송한데 여기서는 이런 내용은 못 뽑아드려요.”
다시 말하지만 나는 행성인에 오기 전까지 디자이너였다. 대단히 오랫동안, 엄청나게 많은 디자인을 한 것은 아니지만 몇년 간 인쇄 발주 넣는 일을 하며 이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런 선정적인, 이런… 내용이 들어간 거는 저희 인쇄소에서 못 해드려요.”
오, 담당자님, 오늘 저와 하신 통화 내용은 이제 제 387번째 인권썰 되는 거예요.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곧장 스피커폰으로 전환해 사무실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설정하고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용 때문에’ 인쇄가 안 된다는 말씀이세요?”
“여기 ‘이런 단어’ 들어가고 그러면 청소년 보호법 그런 거에 걸려서요.”
Where is my 어처구니.
“정확히 뭐가 어떻게 문제인 건데요?”
“그러니까 여기 보시면… 뭐 셔츠룸, 이런 용어같은 게 들어가면 안돼요.”
“저희가 이런 내용으로 처음 만드는 것도 아니고, 홈페이지나 뭐 공지사항에
이렇게 내용 때문에 인쇄 안 된다고 적혀있는 건 본 적이 없는데,
그냥 안 된다는 말씀이신 거죠?”
“아니 근데 원래 이런 건 안돼요.
저희 뿐만 아니라 다른 인쇄소에서도 안돼요.”
말을 듣자마자 통화 끊고 다른 업체에 발주했다. 20분 만에 교정하고 인쇄 들어갔다. 안 되기는 뭐가 안돼요… 결과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런 업소 용어 같은 거 일절 들어가지도 않았다. 무슨 생각 하신 거예요, 대체… (용지가 다소 특수한 수입지라서 원하는 사이즈에 원하는 재질로 만들기 어려워져 포기하려던 찰나, 불꽃같은 서치 능력으로 새 업체 찾아주신 오소리 활동가 님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최고!) 허탈한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불현듯 떠올라 열불이 터지기도 하고, 아무런 조치도 못 한 것에 무력해지기도 하는. 이 사소하고 웃지 못할 해프닝 덕분에 포스터는 배송이 조금 늦었지만 어찌저찌 무사히 도착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행동 개시하는 12월 첫 주간. 우리의 목표는 종태원 게이 업소 곳곳에 붙인 이 내용 많은 포스터를, 오늘 섹스하고 싶은 게이/MSM들이 한 줄이라도 읽는 것. 그러니 최대한 잘 보이는 곳에, 조금이라도 더 밝고 넓은 곳에 붙이는 것이 주요 포인트. 2일간 걸쳐 다닌 결과 종합적으로 느낀 건… 생각보다 캠페인 포스터 부착하는 데에 흔쾌히 동참하는 업소가 대부분이었다는 점. 물론 기존에 이미 다른 단체 포스터가 붙어있는 곳을 위주로 찾아가긴 했지만서도 ‘좋은 일 하시네요’ 라던가 ‘힘내세요’ 라던가, 응원과 지지의 한 마디 씩 덧붙여주는 가게들이 너무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어떤 곳은 아예 비타민 음료까지 챙겨주셨다더라. 포스터를 받자마자 망설이는 업소도 없지 않았지만, 솔직히 ‘한두 군데 정돈 거절할 수도 있겠다’ 싶어 조금은 긴장했는데 그래도 면전에 대고 ‘이런 건 안 돼요’ 라던 곳은 없었던 걸로.
그리고 장담컨대, 인생을 통틀어 가장 많은 게이업소를 방문한 이틀이었다. 당연하다. 난 게이가 아니다. 하긴 게이여도 하루에 20곳을 돌아다니진 않지. 아마도…? 한 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눈이 오고 손발이 시려운 것보다도, 난 십중팔구 여성패싱이 되기 때문에, 장사 중인 업소에는 들어가기가 아무래도 망설여졌다는 점. 거기 있는는 손님들이 놀랄까봐? 음… 불쾌할까봐? 개인적으로 남을 깜짝 놀라게 하거나 기분 나쁘게 하는 일을 무서워해서 말이다. 어떤 방향으로든 트러블이 일어날 것 같은 쪽으로는 가지 않으려다보니 입구에 멀뚱히 서서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상냥한 나의 인권 게이 친구들은 모두에게 열린 공간은 ‘여긴 이안도 들어올 수 있어’ 라며 입장을 적극 권유했다. 뻘쭘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고마웠다. 이 자리를 빌어 나의 사랑 동지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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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와서, 디자이너가 본인이 디자인한 인쇄물을 직접 들고 배포/부착까지 하는 일이 흔할까? 글쎄, 일단 난 아니다. 위에서 말했던 길리어드 비판하는 출력물도 현장에서 보고 혼자 내적 친밀감 쌓고 도망갔다(나중에서야 밝혔지만 팀원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지도). 기획에 참여한다거나 직접 원고를 쓴 것도 아닌, 순수 ‘디자인’으로만 참여한 결과물에 대해 현장에서 디자인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까지 직관하는 경험은 아직 많지 않다. 그래서 이번 캠페인 행동 참여에 대한 소감도 꽤 신선했다.

한편으로는 ‘디자이너로서’ 인권활동에 참여한다는 건 뭘까, 오랜만에 골똘해지게 만든 시간이기도 했다. 그동안 행성인을 비롯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많은 의제, 분야에서 다양한 깊이로 협업을 해왔다. 그리고 어떤 디자인을 하기 위해선 평소 전혀 알지 못했던 사전 지식들이 요구되기도 한다(앨라이라는 말은 몰라도 퀴어 프라이드 플래그는 6색이라던가, 빨간 리본은 HIV/AIDS의 상징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인권 디자이너’에게는 일종의 상식이다).
그러니 디자인이 나의 ‘돈벌이’에 불과할 수는 없다. 하지만 ‘노동’으로서 나라는 개인과의 거리감도 필요하다. 창작하는 인권활동가들이라면 누구나 갖는 고민과 어려움일 것이다. 디자인이라는 분야가 서비스와 예술의 경계 혹은 혼합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그러다보면 의미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디자인은 디자인으로서의 의미를 잃는다고나 할까, 이것에 대해선 이후에 다시 기고할 기회가 생기면 좀 더 깊게 털어놓고 싶다. 분명 예술이라는 큰 틀 안에 놓인, 혹은 스스로를 위치하는 모든 소수자들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일테니까.
이러저러한 사정 끝에 기어코(?) 완성된 ‘게이 섹스 안내서’ 포스터는 1월 중으로 신림에도 찾아가 업소에 부착할 예정이다. 이렇게 한 명이라도 더 보고 한 곳이라도 더 가서 보이는 무언가를 많은 사람들과 만든다는 건 항상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어가며 황당하거나 화나는 순간을 겪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협동의 힘을 믿기에, 캠페인이라는 작업에 자연스레 몸과 마음이 따라붙는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이러지 않을까.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활동가들은 고생 끝에 또 다른 고생이 온다(진짜다). 하지만 고생과 고생 사이, 혹은 고생을 함께하는 그 시간 동안 다른 것을 발견하는 순간이 온다. 그것은 사람이기도, 앎이기도, 힘이기도 하다. 이번 활동에서 나는 어떤 순간들이 있었을까? 글쎄, 일단 1월달에 가기로 한 신림도 같이 하고 싶어서 26년도 달력 좀 확인하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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