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내가 사는 곳은 서울시 은평구다. 그리고 여기에는 많은 성소수자들이 산다. 지역 모임에도 퀴어가 많지만, 앱을 켜면 100미터도 안 되는 곳부터 사람이 잡히는 걸 보면 신기하다. 그 중 하나인 나는 오픈리로 사는 직장에서 재택으로 일을 받아서, 역시 오픈리로 지내는 공동 작업실로 출퇴근하며 생활한다. 일하지 않을 때는 동네 퀴어들을 졸라 술자리를 갖고, 혹은 혼자 퀴어프렌들리한 바에 가서 혼술을 하거나 수다를 떤다. 그러다 가끔은 내 정체성을 아는 공간에 가서 상담을 받거나 약을 타거나 활동을 한다. 이러나저러나 이곳은 아직 성소수자 실버타운이 아니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자면 반대의견으로 게시판이 뒤덮이는 나라의 한 귀퉁이에 있는 곳이므로 완전히 자유로운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이곳저곳에 거점을 만들며 어느 때보다 안정적으로 살고 있다고 느낀다.
이 이야기는 올해로 마흔을 두 해 정도 넘기는, 동시에 솔로이면서 게이이자 퀘스쳐너로 정체화하고 있는 내가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며 살아온 이야기다. 데뷔로부터 20년쯤 되는 것 치고는 별다른 것이 없지만, 그래도 이런 삶이 있다는 것을 나누고 싶었다. 오늘 띵동에서 온 메일을 읽는데 '성소수자란 이름 빼곤 다 다른'이란 표현을 보고 무릎을 쳤다. 청소년 성소수자들에 대한 이야기지만, 성인들 역시 서로 다르다.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짐작이 가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면 나보다 화려한(?) 퀴어라이프를 즐기고 있는 사람도 얼마든지 많다. 그렇지만 혹시 사람 사귈 줄을 모르고 미래도 전혀 상상하지 못한 나같은 사람이 있다면 내 이야기가 무언가 영감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이반시티와 트위터
처음 이쪽(임을 자처하는)사람을 만난지 20년 가까이 되는 것 같다. 군 생활을 마치고 당장 지낼 곳이 없어 누나가 있던 수원에 머물렀는데, 호기심에 이반시티라는 사이트의 채팅방에 들어갔다가 지역 채팅방을 발견한 게 모든 만남의 발단이었다. 무슨 대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들과 몇 마디 나누다가 역 인근 번화가에서 보기로 한 것이다. 그때부터 지인과 친구, 애인이 생겼다 없어졌다 했다. 어릴 때부터 친구가 많지 않은 채로 지내다가 관계가 확 커진 셈이다. 그만큼 사람 사귀는 법도 잘 몰라서 미숙했다. 그때 나에게 보험을 설계해준 이쪽 설계사 형을 제외하면 남아있는 관계가 거의 없다. 친구가 한 명 남아있기는 했는데, 그 친구는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이미 서너 해쯤 된다.
당시에 다녔던 대안학교의 영향이었는지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아, 정당의 지역 모임에 나가곤 했다. 처음에 인터넷에서 이런저런 곳들을 기웃거리다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에서 자원봉사자를 찾는다는 말에 응한 것이 계기였다. 그때 트위터도 했는데 정당과 트위터를 통해서 알게된 성소수자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쪽으로도 깊은 관계가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대인 관계 뿐 아니라 운동권 사람들이 공유하는 기초 지식이나 이념 같은 것도 무지했다. 돌이켜보면 모르는 것 자체보다도, 모르는 것엔 입을 다물어버리는 조심스러움이 더 큰 문제였다. 모른다고 많이 들이받고 다녔으면 혼은 좀 나더라도 많이 배울 수 있지 않았을까. 그걸 깨달은 요즘은 의식적으로 나의 무지를 드러내려고 하는 중이다.
동성애자인권연대
당시 트위터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 중에 동성애자인권연대(동인련) 사람들이 있었다. 가입을 해두었고 당시 정당이나 노조를 통해 집회를 나가는 길에 종종 무지개 깃발을 보았지만 내 일이란 생각은 딱히 안 했다. 일반 회사에 다니면서 게이란 것은 꾹꾹 숨기고 살았다. 퀴어퍼레이드에 대해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그러는게 별로인 것 같다고 친구와 좋지 않은 평을 했던게 기억난다.
그러나 신촌 퀴퍼에서 혐오세력의 난동을 온라인으로 목격하면서 축제에 나가게 되고, 단체에도 본격적으로 문을 두드리게 됐다. 얼마 안 되어 서울역 대중 집회에서 커밍아웃하는 활동가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고, 곧 회원모임에 나가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정당과 노조 활동을 했으니 당시 있던 활동팀 중에는 노동권이 가장 친숙해서 자연스럽게 노동권팀에 합류했다.
단체에선 친구와 애인을 사귀고 지인이 많이 생겼다. 그렇지만 대인관계에 젬병(금방 눅눅해지거나 으깨지는 전병이 유래라고 한다.)인게 어디 가겠는가. 사실 팀에서도 아주 친하다고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팀 활동을 하면서 인터뷰로든 뒤풀이에서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나의 숨통을 틔워주고 일하는 퀴어로서의 바람직한 삶도 상상하게 해주었던 것 같다. 점차 일에서도 사회운동을 하고 싶고 회사에서도 오픈리로 지내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이사와 상담
단체 활동에서 조금씩 사람들과 어울리는 즐거움을 알게 된 나는, 수원에서 서울로 다시 이사를 했다. 친구들이 자주 드나드는 집을 만들고 싶었다. 그때 온 지역이 은평구다. 하지만 그 즈음 단체의 여러 문제들이 공론화되고 이를 돌아보기 위해 비상체제로 전환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떠났고 누군가와 어울려 놀 만한 분위기도 아니어서 기대는 유야무야 되었다.
한데 그런 일이 없더라도 기대만큼 잘 풀리지는 않았을 거다. 그때까지도 소통하는 일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끄덕이며 잘 들어주기는 했지만, 내 의견이나 불편을 말하는 일이 어렵고 실수를 하거나 반박을 들으면 하루가 넘도록 괴로워하곤 했다. 사람과 소통하는 일은 하고 싶은 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괴로움이 비정상적이라고 느껴졌던 어느 날 지금의 상담사님과 함께 심리상담을 시작하게 되었다.
기대처럼 답답했던 속이 후련해진다거나 마음을 완전히 바꾸게 되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에 대해 정말 많이 배웠다. 기질과 상황별 대처 방법에 대해 이해하고 코칭을 받으면서 전에 해보지 않던 관계에서의 시도도 하게 됐다. 상담은 수년간 지속했고 변화는 느리게 일어났지만 결과적으로 지금의 나는 전보다는 훨씬 자유롭고 솔직해졌다고 느낀다.
상담은, 대신할만한 지인이 있었다면 필요 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살면서 제일 잘한 일 중 하나라고 여기고 있다.
동게(동네 게이) 친구
그사이 나는 일터에서도 커밍아웃을 하고, 점차 사회적인 일을 하는 직장으로 옮기는 등 좋은 변화들을 겪고 있었다. 단체에서는 운영위원을 권유받았는데, 운영위 활동을 하면서 상임활동가들과도 전보다 가까워졌다. 그즈음 같이 활동하던 너구리(가명)네가 동네로 이사를 왔다. 이쪽 사람- 여러가지 의미로-이 거의 몇 집 건너라 할 정도로 가까이에 사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같이 활동도 하던 터라 같이 오가고 술자리도 함께하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그러던 중 코로나가 터지고, 검사를 받으러 가다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이 생겼다. 집과는 연락하지 않은 지 오래라 보호자로 멀리서 온 애인의 간호를 받고 간간히 너구리네의 도움을 받아 짐을 옮겼다. 돌이켜보니 퀴어가 퀴어를 돌본 교과서적인 일화가 아닐 수 없다. 병상에서 간병인 보험 광고가 나오는 티비를 보고 있으면서 미래와 혼자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기 전에는 내 평생 가장 오래 알고 지냈던 친구가 꽤 오래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땐 정말 고통스러웠다. 그렇지만 다행히 상담을 정기적으로 받고 있던 와중이었고, 활동가였던 너구리네의 상담과 행성인과 무지개행동의 추모 활동들이 마치 집중 케어처럼 작동해 겨우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처음 우울증 진단을 받은 중학생시절 이후 잘 가지 않았던 정신과 병원에 다시 방문하기 시작했는데, 기술이 진보한 것인지 약발이 전과 달리 끝내주게 잘 받았다.
밴드와 해물탕
이런저런 일들과 업무에 치여 숨 막히던 어느 날, 갑자기 무대에서 공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예전에 직장인 밴드 권유를 받고 샀던 베이스가 집에 있었다. 이를 본격적으로 배우면서 트위터에서 찾은 퀴어 밴드팀에 겁도 없이 들어갔다. 행성인이 아닌 곳은 정말 낯설어서 내 나이도 성별도 모두 신경쓰였지만 다행히 모두가 잘 대해준 덕에 정말 즐거운 한 해를 보냈다. 아쉽게도 밴드는 해산했지만 대신 행성인에서도 악기를 잡게 되면서, 예컨대 삼식(가명)네 같은 사람들과 꽤 친해졌다.
삼식네는 나에 비하면 단체에 합류한 게 최근이다. 처음엔 이들과도 여느 회원들과 그랬듯이 데면데면했다. 하지만 음악을 할 줄 안다는 것을 접하고 행성인에서도 뭔가 연주를 하고 싶었던지라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하면서 가까워졌다. 게다가 삼식네도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다. 그 사이 너구리네는 지역 모임을 만들었는데, 나는 너굴과 삼식의 음식 취향을 알고는 나대로 또 같이 해물 모임을 만들었다. 이런 모임들을 통해 둘과는 많이 친해졌고 데면데면하던 다른 사람들과도 말을 섞게 되었다.
계엄이 터지면서 오래 알던 사이와 가까워지기도 했다. 같이 집회에 나가던 이와 극우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책 모임을 시작한 것이다. 그 즈음 은평구에서 구민들에게 보낸 문자를 보다 갓 40대가 된 나도 중년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또 이 모임은 다들 나보다 나이가 많아 중장년 모임이라는 느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 모임에서는 사람들과 친해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돌봄과 우리가 같이 할 수 있는 활동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편이다.
전하고 싶었던 것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요즘 나는 꽤나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긴다. 근거리에 친숙한 퀴어와 앨라이들이 살고, 오픈리로 지내며 정체성과 관련된 삶의 전망을 보여주는 활동에 참여한다. 공동체와 돌봄의 중요성을 아는 이들과 함께 미래를 상상할 수도 있다. 물론 축복이라고 해도 여전히 천국과는 거리가 멀다. 데뷔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아직 본가의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하지 못했고, 퀴어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면서도 위험회피와 내적 억압이 강해 공공장소나 거리에서 퀴어성이 균열을 일으키는 순간들엔 여전히 마음을 졸인다.
하지만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런 생각도 든다. 그때 나는 친구들과 같은 자리에 서줄 수 있을까? 나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활동에 대한 마음도 다시 커지는 느낌이다. 한편으론 여기서 거의 언급하지 않은 노동자로서의 나도 쉴 새 없는 불안을 마주한다. 하지만 이런 관계들을 떠올리면 계속 살고 싶고, 지키고 싶고 미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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