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행성인 활동/활동 후기

[호림의 '운동' 공부 노트] Ep1. 운동을 배운다는 것

by 행성인 2026. 2. 19.

호림(행성인 상임활동가)

 

행성인 상임활동가이자 무지개행동 공동대표로 활동하는 호림님이 2026년 상반기에 참여하는 2026 Fundamentals of LGBTQI+ Movement Building Program의 경험을 활동가/활동에 관심이 있는 회원/커뮤니티 구성원들과 나눕니다.

 

 

암묵지(暗默知, tacit knowledge)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인에게 체화되어 있어서 말이나 글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지식을 뜻하는 말입니다. 레시피 없이 뚝딱 음식을 만들어 내는 ‘손맛’이나 숙련된 전문가들의 노하우, 모국어 화자가 아니면 알아차리기 어려운 언어의 미묘한 뉘앙스 같은 것들이죠. 암묵지는 다른 사람에게 말이나 글로 전달하기 어렵지만 실제 현장에서 큰 힘을 발휘합니다. 암묵지는 책으로, 강의로 배우는 것이 어렵다 보니 결국 경험이나 도제식 교육을 통해 습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암묵지가 지배하는 영역이라고 말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로, 언어로 정리된 지식보다는 개개인의 활동가가 오랜 경험을 통해 몸으로 익힌 지식이 큰 힘을 발휘하는 영역입니다. 사회운동의 특성상 암묵지로 전수될 수 밖에 없는 지식들이 많기도 하지만, 현실적인 제약 속에서 현장의 암묵지를 기록된 지식의 형태로 전환하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 못하게 되는 일도 많습니다. 그래서, 사회운동의 일원으로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고, 활동가로 일할 수 있는 역량을 전수하는 일, ‘활동가 재생산’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한국 사회운동의 오랜 과제입니다. 

 

제 경험을 되돌아봐도 ‘운동을 하는 방법’을 책이나 교육, 훈련을 통해 배운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성소수자 운동의 역사나 운동의 주요한 의제에 대해서는 정리된 책이나 글, 강연 등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최근에는 사회운동의 영역에서도 캠페인 기획이나 커뮤니케이션 전략, 모금과 같은 실무적인 지식들을 배울 기회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사회 변화를 위해 목표와 과정을 설계하고, 활동을 기획하고 수행해 나가는 방법에 활용할 수 있는 지식, 운동의 방법론을 접할 기회는 적어도 한국에서는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최근 몇 년간, 이런 운동의 방법론을 제대로 배울 기회를 가지고 싶다는 갈증이 심해졌습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는데요. 한편으로는 운동 내에서 제가 가지는 역할과 책임이 커지면서, 맡은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다는 두려움과 부담도 함께 커지게 된 것이 있습니다.  특히, 2022년부터 무지개행동에서는 외부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인권 침해 등에 대응하는 활동을 넘어서서, 실제 성소수자의 권리를 실현하는 법제도 변화를 만들기 위한 활동을 구축해 나가자는 목표를 확인하고, 모두의결혼 캠페인을 시작하고 사무국을 구조를 만드는 등의 큰 변화들이 있었는데요. 그동안 우리에게 쌓인 암묵지들은 긴급한 상황에 맞서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장기적인 전략을 설계하고 이를 수행하는 운동을 조직하는 방법은 새롭게, 다르게 익힐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활동을 통해 운동 방법론 트레이닝에 참여하거나 매뉴얼, 툴킷 등의 자료를 접할 기회가 늘어나면서, 그동안 많은 부분 암묵지에 의존해 왔던 운동의 방법론을 보다 체계적으로 도입해 볼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게 된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2-3일의 단기 트레이닝의 경험은 저의 암묵지로 남을 수는 있어도 동료 활동가들에게 제가 배운 것을 체계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역량까지 키워주지는 못했습니다. 영어로 작성된 다양한 자료들은 충분히 읽고, 소화하고, 함께 논의할 시간이 없다 보니 그저 하드디스크 용량만 차지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서론이 아주 길었는데요. 운 좋게 올해 상반기 중 그동안의 갈증을 조금은 해소할 수 있는 트레이닝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을 다시 저의 암묵지로만 남기지 않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행성인 웹진을 통해 프로그램의 내용이나 관련 자료를 소개하고, 제 생각을 글로 남겨보자고 생각한 것이 행성인 회원이 된지 15년 만에(!) 처음으로 웹진 연재를 제안하고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입니다.

 

 

 

제가 참여하는 프로그램은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스쿨의 카-라이언 인권센터(Carr-Ryan Center for Human Rights)에서 전 세계 성소수자 활동가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2026 LGBTQI+ 운동 구축의 기초 프로그램(Fundamentals of LGBTQI+ Movement Building Program)>입니다. 5개월 동안 진행되는 온라인 프로그램으로 70여 명의 활동가들이 한 학기(!)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프로그램은 성소수자 운동 구축의 기초적인 방법론을 소개하는 7회의 온라인 강의를 듣고, 각 강의마다 온라인 토론 게시판에 쪽글을 올리는 토론 과제를 수행하고, 최종적으로는 각자의 활동 영역에서 강의의 내용을 반영한 ‘변화 이론’을 개발하는 최종 과제를 제출하는 것으로 마무리 됩니다. 구성이 대학교 강의 같아서, 오랜만에 학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설레기도 했어요. 

 

프로그램은 이미 지난 1월에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2개의 세션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아직 이 프로그램의 내용이 실제 저에게 또는 한국의 성소수자 운동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지식을 얼마나 남길 수 있을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새로운 지식은 우리가 익숙하게 반복해 온 관행과 전략을 다시 바라보게 하고, 때로는 당연하게 여겨 온 전제나 기존의 관성을 흔드는 힘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새로운 기회를 경험하는 것이 지금 저에게 필요한 자극이기도 했고, 그 자극을 통해 웹진에 글을 연재해 보자는 저에게는 꽤 낯선 결심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아래는 앞으로 공유하게 될 주제들, 각 세션의 주제들입니다. 다음 글부터는 차근차근 강의를 통해 제가 배운 것과 참고 자료들을 공유하고, 강의를 듣고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제가 정리하게 된 생각들을 차근차근 풀어가 보려고 합니다. 3월 웹진에서 만나요.     

 

  • 운동 조직화 모델 (Movement Building Model)
  • 변화의 전략과 이론 (Strategy and Theory of Change)
  • 조직화와 반동: 사회 운동과 진보의 파라독스 (Building and Backlash: Social Movements and the Paradox of Progress)
  • 잘못된 통념과 낙인 (Myths and Stigma)
  • 성소수자 정치: 활동가, 정치인, 선거와 사회변화 (LGBTI+ Politics: Activists, Politicians, Elections, and Social Change)
  • 체계적 사고 (Systems Thinking)
  • 변화의 지렛대 (Levers of Change)
  • Creating Models of Change (변화의 모델 창조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