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한 조각 - 퀴어버스 이야기

Posted at 2011. 10. 14. 14:16// Posted in 연대

희망 한 조각 - 퀴어버스 이야기

5차 퀴어버스 웹홍보물


희망버스. 퀴어버스. 희망을 싣고 달리는 버스. 그 단어가 들릴 때 마다 나는 생각하고 따질 겨를도 없이 되묻는다. “가야지. 언제냐?”


기억 한 덩이


내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IMF가 터졌다. 한진에서 10년 넘게 일하신 아버지는 팀 규모보다도 작은 중소기업에 버려지듯 내던져졌다. 팀의 2/3는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잘려나갔다.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의 월급은 1/3이 뭉텅 깎였나갔다. 대학생인 두 남매를 둔 아버지에겐, 단지 그 시간을 견뎌내는 것 외엔 선택할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다.


죽어도 블루칼라로 살지 말기를 당부하던 아버지가 마음에 지금도 박혀있는 나는 주류사회에 편입하고 싶었다. 그래서 당시 꽤나 인정받던 IT기업에 비정규직으로 취직했다. 나는 만 2년간 꼬박 월급 한 푼 올려 받지 못한 채 언젠가는 정규직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만으로 혹사당했다. 그리고, 내쳐졌다. 사장은 꽤 이름을 날리던 민주투사였다.


또 다른 기억 한 덩이


대학시절 나는 첫사랑을 만났다. 학내 여성주의 웹진을 만들며 연대했던 학교는 내 첫사랑이 다니고 있던 학교였고 그네들과 함께하며 많은 레즈비언을 만났다. 그런데 그녀와 같은 단과대 학생들이 그 학교의 여성주의 모임에 소속되어있었다. 홀로 인정하는 내 정체성이 외로워도 그녀에게 피해가 가는 것이 더 싫었고 두려웠다. 그래서 끝까지 내 정체성을 부정하며 부산생활을 끝냈다. 다시는 부산에 돌아가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내게 부산은 이런 곳이었다


2011년, 서른셋의 나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와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부산역에서 영도까지 무지개깃발을 들고 걸었다. 내가 그렇게도 증오하던 기업 때문에, 내가 그렇게나 내 정체성을 외면하고 싶었던 부산에서 나는 무지개깃발을 들었다. 폭우보다 최루액에 더 많이 마음이 젖은 채, 경찰에 둘러싸인 채, 나는 끝까지 깃발을 놓을 수 없었다. 지겹게 과외 다니던 봉래동 교차로와 첫사랑과 소곤소곤 속삭이던 남포동 광복로는 이제 투쟁의 공간이 되었다. 그 곳에서 나는 무지개깃발을 들고 꿋꿋이 밤을 지새웠다.


스산한 10월의 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그 길었던 밤을 버티고서도 우리는 경찰의 벽을 뚫지 못했다. 나는 한 번도 85호 크레인에 다가갈 수 없었다. 달리는 시내버스 안에서 스쳐 지나간 85호 크레인을 보며 나는 꼭꼭 쟁여놓았던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이 희망을 품고 달려가야만 그녀를 만나고 그녀에게 닿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녀는 언제쯤이면 환호성 속에서, 박수갈채 속에서 이곳으로 내려와 우리와 같은 눈높이에서 이야기하고 눈 마주쳐 줄 수 있을까. 하지만 이렇게 허우적대다 보면 손가락 사이로 모두 흩어져 빠져나가는 듯 했던 희망 중 어느 한 조각이라도 내 손가락 사이 어딘가에 걸리지 않을까.


또 다시 나는 퀴어버스를 타고 부산에 내려갈 거다. 또 다시 나는 묵묵히 무지개깃발을 들 것이다. 여전히 덜어내지 못한 상처의 땅에서 고통의 기업을 향해 무지개깃발을 들고 다시 소리지르련다. 그녀를 내려오게 하라고, 비정규직 철폐하라고, 정리해고는 진정 살인이라고.


그리고 꼭 그녀가 환호성 속에서 우리와 같은 눈높이로 내려온 뒤, 전국 각지에서 그녀의 귀환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이는 것을 보고야 말겠다.


그게 나의 희망이며, 지금 내가 걸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유결_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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