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대하여

Posted at 2013. 2. 2. 16:20// Posted in 회원 이야기/모리의 그림일기


모리(동성애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그놈의 행복이 문제였다. 가족들이 내가 게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도, 그 녀석이 자기가 게이란 걸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던 것도 모두 행복의 문제였다.


집에 내려갔을 때 나는 비난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이성애자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오랜 시간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가족들을 기만한 것”이 그 죄목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이랬다. 내가 “30살이 되면 대부분의 동성애자가 그렇듯 이성애자가 될 수 있다”는 건 의사인 누나가 찾아본 이상한 논문이 입증해 주고 있었고(사실 그 논문을 읽기나 했는지 의심스럽지만), 내가 불행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기 때문에, 일단은 주변 사람들에겐 커밍아웃을 하지 않고 기다려 보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었다. 


재밌는 것은 가족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내가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등학생 때 아빠와 매일 같이 싸우던 맥락은 정반대의 것이었는데, 그 시절 아빠는 “부족한 것도 없이 자란 놈이 행복한 줄 모르고 반항한다”고 했고, 난 “내가 행복한 줄 어떻게 아느냐”며 대들었다. 그때도 부모님은 내 말은 전혀 듣지 않았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난 “행복하다”고 말했고, 가족들은 “네가 행복할 리 없다. 넌 스스로에게 행복하다고 주문을 외우는 것 뿐이다”고 말했다. 행복은 스스로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던가.


확실한 것 하나는 그날 이후 정말로 불행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로 일 년 반 넘게 가족과 연락을 끊었다. 처음 일 년은 분노와 증오로 몸서리쳤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잠들려고 누운 침대에서도 끔찍한 생각만 했다. 다음에 만났을 때 어떻게 말해야 지지 않고 가장 효과적으로 상처 줄 수 있을까. 어떤 욕을 해줄까, 때릴 수 있다면 어떻게 때릴까, 어떤 벌을 받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너무 끔찍하게 느껴진 게 여러 번이었다. 증오는 정말 좋지 못한 감정이다. 그 시간 동안 난 하루도 행복하지 않았다.


부모님과 화해하게 된 건 아빠가 동인련 후원회원으로 가입하면서부터다.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 받은 건 아니지만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다른 건 그저 엄마 아빠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몰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아빠가 동인련 후원회원이 된 것이 크게 작용했던 건, 비로소 아빠가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넌 절대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 생각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날 바꾸려고 하지 않겠다는 것, 더 이상 네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겠다는 것, 세상을 바꿔서라도 자식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실제로 아빠가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엄마는 아직 내가 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눈치다. 그날 내 블로그에 대해 엄마는 “그 시간 동안 공부를 했어 봐라”고 했다. 나도 못마땅하다. 전혀 못마땅하지 않은 건 아니다. 블로그를 시작하면서도 난 스스로에게 ‘난 인권운동가가 아니다’고 못박아두곤 했다. 그건 한 인간으로 태어나 마땅히 해야 할 선행의 양을 넘어서면서까지 내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이기심, 선행이 아닌 희생의 영역에 있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이기심이었다. 이성애자로 태어났다면 하지 않아도 됐을 일들. 투자하지 않아도 됐을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권운동을 해야만 했다. 가족과 사이가 안 좋아지면서, 그 녀석을 좋아하면서 그런 결심을 굳혔던 것 같다. 좋은 경력을 갖고, 좋은 직장을 갖고, 돈을 많이 벌 수 있어도 내가 정말 원하는 행복은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런 일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일어난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 사람과 손잡고 걸을 수 없는 게 미안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적어도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당하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았노라고, 당신의 행복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노력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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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재경
    2013.02.05 13:42 [Edit/Del] [Reply]
    교정보면서 너무 마음이 찡했어요ㅠ
  2. 병권
    2013.02.05 18:34 [Edit/Del] [Reply]
    충정로 사무실에 있던 어느 날 전화 한통이 왔었지.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홈페이지 후원회원 가입이 안된다고
    동인련은 어떤 활동을 하냐고 물어오셨어.
    그리고 후원회원 가입에 남겨둔 닉네임을 보고 빵~터졌지.

    전에 모리에게 잠깐 듣던 아버님인거 같더라고.
    신기하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어.

    우리 교회오빠 스똬일 모리의 글을 읽으니 찡하면서 기분이 좋네. ^^
  3. 오엔쥐
    2013.02.05 20:37 [Edit/Del] [Reply]
    이런 멋진 남자를 왜 아무도 안데려갈까
    언젠가 네가 아무 걱정 없이 至福을 느낄 그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ㅋㅋ
    그런데, 그림 일기인데 그림이 없네 ㅎㅎ
  4. 이경
    2013.02.07 15:20 [Edit/Del] [Reply]
    모리... 무미건조한 외양 속에 숨겨진 감성터지는 내면......
    조금 있음 "남의 인권말고 니 인권이나 신경쓰라"는 이야기를 듣게 될지도ㅎㅎㅎ
    그런데 지난 날 충정로역 앞에서 당신을 어색하게 처음 만난 그 때
    모습을 떠올려보게 되네.^^ 그 때쯤 어떤 마음이었을지^^
  5. Hagen
    2013.02.14 14:07 [Edit/Del] [Reply]
    네 맞아요
    이성애자 로 태어났으면 신경쓸일도 없는 일들 많이 겪고 있는것 사실 입니다
    그래도 동인련에서 열심히 활동 하고 계시는 모리님 존경합니다
    모리 부모님 의 사랑 믿으세요 당신의 행복을 진심으로 원하는 것 입니다
    자식을 사랑안한다는것 정말 불가능한 일이에요
  6. 계영
    2013.03.16 22:43 [Edit/Del] [Reply]
    잘 읽었습니다. 마음이 찡, 덜그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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