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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

게이들의 여성비하적인 언어사용에 대한 소고

by 행성인 2014. 4. 1.

웅 (동성애자인권연대)



찰진 언어 생활, 쫄깃한 관계를 위하여





이달 초 웹진팀은 여성의 날을 맞아 게이들이 사용하는 여성비하적 언어를 주제로 글을 제안했다. 주제만 따진다면 게이들의 언어에 여성비하적인 표현이 있다는 문제를 사전에 설정해 ‘꽂은’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게이들의 언어세계에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다분히 발화자보다는 청자의 입장에서 건넨 제안일 터, 아마도 게이들의 언어에 대해 평소 느낀 불편함의 발로가 아닐지 유추해본다.

 

그런데 왜 하필 게이의 언어를 대상으로 삼은 걸까. (하필 내게 청탁을 넣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묻지 않는다) 사방이 여성혐오의 비아냥과 공격으로 넘쳐나는 지금, 그 어떤 여성 개인도 ‘김치녀’의 자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폭력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게이들의 언어에 초점을 맞춘 의도 말이다. 추측은 어렵지 않다. 성적 규범에 있어 게이들의 위상은 언어사용에 모호한 위치를 점한다. 남성 동성애자는 성별이분법적 젠더규범에 의해 완전히 해석되지 않지만, 섹스와 젠더 상으로는 남성으로 구분되기에 완전히 자유롭다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는 게이들의 언어가 그리 단순하게 평가될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하지만 복잡한 남성성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트랜스젠더 남성이나 레즈비언 강부치의 언어문화를 다루는 것도 흥미롭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청탁하는 입장이야 게이로서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다는 제안이었을 것이다. 사실 게이들의 언어가 여성비하적이라는 지적은 하루 이틀 나온 얘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논의가 풍부하게 이뤄졌던 것도 아니다. 나 역시 당사자로서  나의 언어를 반성적으로 생각해본 경험이 부족한 터라 제안 받은 주제에 대해 해명이나 변명을 할 것인지, 아니면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할지 주판알을 굴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비당사자라고해서 이러한 문제에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같은 주제의 또 다른 필진인 조나단은 문제를 적시하는 것에 어려움을 표하며 여성비하적 언어를 여성‘화자’적 언어로 바꿔 읽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민을 정리할 수 있을까. 언어는 몸에 밴 경험이기에 게이당사자로서 거리를 두고 경향을 분석하는 것은 그리 편한 글쓰기방식이 아니다. 그렇다고 여성 비하적인 언어사용여부에 찬반을 따져 결단을 내리자는 것 역시 억지주장이 될 공산이 크다. 오히려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물음을 다시 세공할 필요가 있다. 왜 게이의 언어가 여성비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가. 이를 위해서는 게이의 언어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를 살필 수밖에 없다. 가능하다면 여성비하적인 평가의 관점을 견지하며 살펴보는 방식도 가능하다. 


하나 짚고 넘어갈 점은 게이들의 언어 속 여성비하적인 면면들이 단순히 현실에서 게이와 여성이 맺는 관계로 수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와 현실이 무관할 리 없지만, 표면적인 언어의 속성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불어 게이들이 여성비하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게이언어로 일반화될 수 없다는 점도 언급해둔다. (개중에는 여성비하적인 표현을 불편해하는 게이들도 적지 않다.) 오히려 논의는 평소 사용하는 언어들에 잠재적으로 또는 의도적으로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들이 사용되고 있음에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이다. 결국 주관성이 다분할 수밖에 없을 필자의 글은 게이언어에 대해 거리를 두는 게이의 언어가 될 것이며, 거리를 두기 위해 나부터 도마 위에 올라가 관찰과 분석의 대상을 자처하는 자충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대상이 될 수 있는 언어의 형식들이란 욕과 은어, 혹은 발화태도 등을 망라한다. 게이의 모든 언어적 특징들을 여기 모두 나열할 수는 없을 것이고, 임의적으로 몇 가지 살펴볼 수는 있으리라 본다. 그 중 다소 쉽게 접할 수 있는 특징이라면 여성화자적인 언어 사용일 것이다. 여성 정체성을 수식하는 소속과 계급, 특정 캐릭터의 차용은 게이 언어가 전유한 여성성을 보여준다. 커뮤니티 안에는 각종 ‘여대’ 출신 게이들이 수두룩하며, ‘-순이’, ‘-자’ 돌림의 호칭들, ‘나 이런 녀자’ 식의 자기 수식 문장이 어색하지 않게 사용되기도 한다. 


특히 커뮤니티에서 선별되어 회자되고 차용되는 여성성의 모델이 있다면, 여성들의 사회 진입이 어려운 가운데 온갖 협잡과 대찬 성격으로 남성중심사회의 한가운데 권력을 점하고 자리를 차지한 인생역정의 캐릭터, 여왕과 여신 류의 서사들이다. 드라마와 영화에 등장하는 독한 여성캐릭터는 기갈의 표본으로 게이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기세고 독한’  여성상에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열광하는 경향은 오랜 게이 스테레오타입으로 꼽힌다. 이는 일견 여성과 게이들의 주변적인 사회적 입지를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성화자적 언어는 여성의 주변적 입지를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게이 언어의 또 다른 특징이 발견되는데, 바로 욕설난망의 성적 노골성 짙은 표현들, 대표적으로 ‘-년’자 욕을 사용하는 경향이 그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년’은 남녀를 막론하고 붙이는 호칭이다. 상대 뿐 아니라 스스로를 가리킬 때도 사용한다. 왜 ‘-년’자 욕을 사용하는지에 대해 장광설을 풀기보다 내 느낌을 더듬어보는 편이 낫겠다. 일단 경험을 더듬어보면 많은 경우 ‘년’을 붙여야 거리가 좁아지는 느낌이 들고, 딱딱한 분위기를 말랑하게 만들 수 있었다. 언어는 거칠어도 효과는 반대였던 셈이다. 수식어를 붙인다면 ‘바닥으로부터의 언어’를 통한 관계 맺기 정도 되지 않을까.

 

한편 ‘년’자 호칭은 나의 자의식을(자긍심까지는 아니더라도) 끌어 모았던 것 같기도 하다. 어딘지 민망하지만 굳이 기술하자면 타자로 지명되고 대상화되어 괄시받고 억압받으며 짓밟히고 배제되는 게이로서의 입지, 존재적 궁지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이 나를 만들고 나의 언어를 만든다. 게이들의 쫄깃한 언어는 소위 하위주체로서 게이들의 ‘엣지’를 표현하는 형식들 중 하나이다. 고통 속에서 구강에 집중된 분노가 성대를 쥐어짜 울리며 밖으로 튀어나온다. 내뱉어진 단어들은 세지만 우습고, 싸지만 찰지다. 영혼을 모아 뱉어낸 단어들은 나의 삶에 구심점이 된다. 언어는 비루하지만 거친 날로 외부의 눈총과 공격에 맞선다. 구사하는 단어들이 농익을수록 만족감은 높아진다.

 

그런데 하필 왜 ‘놈’이나 ‘새끼’보다 ‘-년’자 욕을 사용하느냐는 질문이 들어온다. 핵심적인 질문일 테지만 대답은 쉽지 않다. 살펴보자. 말은 인격의 반영이라지 않았던가. 매우 주관적인 설명이지만 ‘놈’이나 ‘새끼’는 입에 붙지 않을 뿐더러 욕하는 입장에서도 불편하다. 가끔 욕하면서 남성이 되는(!) 어색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년’은 나름의 절충이자 ‘최적’의 호명이다. 내 안에 눌려있던 여성성을 활짝 펼쳐놓는 느낌도 든다. 다시 말해 사회적 타자로 호명된 여성 비하적 언어를 전유하면서 나는 ‘타자-되기’를 시전한다.

 

타자-되기를 통해 바닥에서 우러나오는 분노의 욕질은 한편으로 친밀함과 유대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놈보다 년으로 통하는 동질감은 너와 나를 우리로 묶어둔다. 이는 스스로를 뒤집어진 ‘갈보’로 불러온 한국 게이, 뿌리부터 여성비하적 언어로 구성된 ‘보갈’의 역사가 오늘에까지 이르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거친 언어사용으로 자신을 정체화하고 집단적 유대감을 이끌어내는 것은 하위문화의 오랜 속성이지 않은가.


헌데 문제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말인 즉, 나는 사회적 타자임을 실천하지만 동시에 남성이기도 하다. 여성성을 전유하고 ‘년’자 돌림의 다종다양한 자매어들을 뱉는 게이는 생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남성으로 분류된다는 말인데, 게이의 언어로서는 이미 내재적으로 분열된 셈이다.

 

여성성을 전유하거나 그 자체로 혐오적 의미를 담는 언어 사용은 여성의 대상화를 피할 수 없다. 비단 여성비하적 욕만 그런 건 아니다. 욕을 발화하기 위해서는 각종 사회적 금기 위에서 줄타기를 해야 한다. 더욱이 인종과 계급, 질병과 장애를 망라하는 현실의 분리와 차별의 선 위에서 널을 뛰지 않을 수 없다. 자의식의 구축, 현실타파와 기분전환을 위해 욕을 쓰지만 욕을 뱉기 위해서는 기존 도덕이 아로새겨진 단어를 반복하게 되는데, 이는 간접적이나마 타자를 타자로 낙인찍는 행위를 수반한다. ‘년’이 욕임에도 친근했다면 이는 그동안 여성을 낮춰온 사회에서 여성비하적인 호칭들이 부지기수로 사용되었던 환경과 역사를 방증하는 것이리라. 


비하적 언어는 가벼운 말의 무게에 힘입어 손쉽게 쏟아져 나온다. 발화자는 언어에 내재된 위험부담을 무시하거나 위험으로 인지하지 못할 뿐 더러 인지하기를 포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특별한 의도 없이 뱉어질지라도 욕설은 제 부정적 의미를 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게이들이 자신의 긴장된 심리를 표현하는 ‘자궁이 떨린다’는 표현은 은연중에 여성을 특정부위나 행위로 수렴시킨 경우에 해당한다. 이는 여성을 호명할 때에도 적용되는데, 단적으로 ‘뽈록이’라는 호칭은 여성을 특정 부위로 축소하고 대상화하여 지칭하는 대표적 예이다.

 

사회적 배제로부터 거칠고 찰진 언어를 통해 역설적으로 자긍심을 키워온 게이들의 엣지는 성별규범에 소환되면서 타자를 비하하는 자조적인 ‘갑’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 자기만족의 향유를 위한 언어사용이 타인에게 모멸감과 수치심을 안기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재미로 사용하는 단어들이 사회에 편재하는 여성혐오에 젖어있고 부합하며 나아가 그에 의해 생산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도 있다. 상상력의 오지랖을 좀 더 키워본다면 언어에 함의된 여성혐오의 정서는 끼스럽고 ‘여성스러운’ 게이들을, 남자답지 못하다고 평가되는 말투와 태도와 포지션을 수행하는 게이들을 비하하고 혐오하는 맥락과 그 뿌리를 같이 하는 것은 아닌지를 함께 고민해볼 수 있겠다.

 

하지만 욕하는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욕설의 대상인 하위주체들- 이른바 여성, 유색인, 외국인, 빈곤층, 장애인에게 타자화된 제 모습을 넘어설 수 있는 주체성을 기르거나 갖추면 되지 않느냐고 뻔뻔하게 자세를 취해 되물을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비하적인 언어 앞에서도 처연할 수 있는 인격, 상대의 공격을 세련되게 밟아줄 수 있는 보다 높은 ‘클래스’로 도약하면 되지 않느냐는 요구이다. 사실 길고긴 갈등과 타협의 과정에서 몇몇 단어들은 관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처럼도 보인다. 상대와 상황에 따라 ‘년’ 정도의 호칭은 여성과 게이들의 정서적 연대의 표현으로, 적어도 애교 섞인 단어로 통용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비하적 언어를 주체적으로 전유하고 친화적으로 변모시켰을지라도 관성화된 성별이분법의 권력을, 여성혐오의 사회분위기를 완전히 정화시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소통을 위해 당사자들에게 높은 자의식을 요구하는 것은 자신의 언어폭력을 용인하기 위한 다소 기만적인 포석으로 비쳐질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주변의 비판에 기대어 게이들의 언어문화를 바꿔보자는 캠페인으로 결론 맺을 의도는 없다. 평생 누적해온 언어습관을 바꾸라는 요구 자체도 다른 관점에서는 강요와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글은 선언이나 결단을 결핍하고 있으며 결핍할 수밖에 없다. 이후에도 나는(적어도 분노하는 내 몸은) ‘놈’ 보다는 ‘년’을 선호할 것이며, 찰지고 드립 넘치는 언어생활을 향유할 것이다. 한마디로 ‘년’자 욕이 없는 세상은 재미가 없다!

 

다만 충돌과 비판에 부딪히면서 태도와 생각에 변화가 있다면, 언어사용에 대해 나를 표현하는 수단임과 동시에 타인과의 소통으로 접근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어느 경우에서건 소통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자기만족, 비하와 자긍심 사이에서 언어를 다듬고 조율할 필요가 있다. 이는 여성 비하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주장보다는 타인의 불편함을 귀담으며 우회적이나마 소통의 기술을 고민해보자는 제안일 것이다. 연장선상에서 또 하나의 노력을 들면 충돌과 비판을 동반한 소통의 기술연마 속에서 성별이분법의 경계, 권력의 틈에서 타자화를 유쾌하게 전유하거나 비하를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언어를 양성하고 분위기연출들을 고민해본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비속어사전까지 사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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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9 - [무지개문화읽기] - 성소수자들의 언어 사용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