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소수자와 가족

입양에 대해 말하기 전에 여성의 권리에 대해 말하기

by 행성인 2014. 10. 15.


모리 (동성애자인권연대)

 

 

입양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길에서 아장아장 걷는 아기를 마주칠 때마다, 내게서 박탈된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빨리 동성 커플의 입양에 대해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시작해도 내 동기들보단 분명 늦겠지만, 그래도 되도록 빨리 동성커플의 입양이 가능해졌으면, 나도 그런 가족을 이루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입양이 그저 내가 하고 싶다고, 동성 커플에게도 이성 커플과 똑같은 권리가 있다는 근거만으로 논의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입양(물론 대리모 출산도 마찬가지다)은 명백히 여성의 권리에 대한 문제이고, 그렇기 때문에 여성의 권리를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은 상황에서 논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폭력적인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작년에 처음 동인련 웹진기획팀에서 내가 이 주제에 대해 다뤄보겠다고 했을 때 팀원 중 두 명이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는데, 그 두 사람이 여성이었다는 것이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동성애자라고는 해도 어찌 되었든 나는 사회에서 남성 권력이 갖는 수혜를 받고 있고, 그 수혜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반대로 여성이 받는 차별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남성 동성애자인 나에게 출산과 낙태 같은 이야기는 이성애자 남성에게보다도 더 먼 이야기였다. 동인련에 들어오고 난 뒤 여성주의 운동에 지지와 연대는 하지만 그것이 내 운동은 아닌 그런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게다가 사회에 퍼져있는 여성 혐오는 생각보다 깊고 넓어서, 남성 동성애자들의 여성 혐오 수준은 이성애자 남성과 별반 다르지도 않은 것 같다. 운동 사회에 속한 내가 아무리 여성의 권리를 전제로 입양을 이야기해도, 결국 시스젠더 남성 동성애자 커뮤니티에서 이야기되는 입양 논의에서는 여성의 권리에 대한 내용은 배제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애초에 여성의 권리에 대한 공감이 남성 동성애자 커뮤니티에 퍼질 때까지 입양 이야기를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게 여성주의에 대한 진정한 연대가 아닐까.

 

그래서 이 글은 죄송한 글이다. 물론 내가 이 글 하나 쓴다고 갑자기 없던 운동이 생기진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운동을 앞당기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에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변명을 하자면 정자를 빌리는 것에 비해 자궁을 빌리는 것은 훨씬 더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고, 그 윤리적, 제도적 장벽 또한 높다. 물론 이런 논의를 거치지 않고 자본으로 그 장벽을 뛰어 넘는 경우 남성이 훨씬 쉽게 재생산권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라도 이 논의를 여성주의적인 시각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글을 써 보려고 한다.

 

 


윈-윈-윈?

 

많은 사람들이 입양을 ‘윈-윈-윈(win-win-win)’이 되는 상황으로 여긴다. 입양 삼자(생부모, 입양아, 입양부모)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이다. 아이를 키울 여건이 안 되는 생부모는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고, 아이는 새로운 가족을 찾고, 입양 부모는 자식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이렇게 간단하고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입양도 존재하겠지만, 사람이 자기 자식을 키울 수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 단순한 문제이기만 할 순 없다.

 

얼마 전부터 미국 남부침례교회를 비롯한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는 입양을 새로운 전도와 후원 조직의 방법으로 채택하고 있다. 교인들이 주님이라는 새로운 “아버지”에게 “입양” 되었듯, 자신들도 전 세계의 가난한 아이들을 입양함으로써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것이다. 이렇듯 때로 “전세계에 입양되기를 기다리는 고아의 수가 10억명(참고: 전세계 인구수는 70억명 정도)이나 된다”고도 말하는 ‘고아 신화’에 사로잡힌 교인들의 수는 엄청나서, 정말로 입양이 필요한 아이들보다 입양아를 열렬히 원하는 부모들이 더 많은 상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실제로 교회-입양기관-미혼모쉼터로 연결된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의 입양 시스템은 “입양 산업”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공급보다 수요가 훨씬 많다보니 전세계 곳곳에서 입양이 필요하지 않은 아이들까지 기록이 위조되거나 납치되어 미국의 가정으로 보내지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비이성적인 믿음에 사로잡힌 이들의 섣부른 동정심이 입양과 아동 밀매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상황을 만들면서 유니세프와 세이브더칠드런 등 국제 아동구호단체들이 나서 무분별한 국가 간 입양에 제동을 걸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아동이 당하는 고난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악의 세력”이라는 비난이었다.

 

입양이 “절대적인 선행”이라는 믿음은 입양 시스템 그 자체의 문제점을 쉽게 가려버린다. 사실 많은 경우 입양은 ‘윈-윈-윈’이 아닌 ‘제로-섬’ 게임이다. 얻는 쪽이 있으면 잃는 쪽이 있는 것이다. 아이를 키울 자본이 부족한 사람은 아이를 빼앗기고, 그럴 자본이 충분한 사람은 아이를 얻는다. 자본이 얼마나 부족해야 아이를 키울 수 없는지 결정하는 기준은 모호하고 주관적이다. 가끔 그 기준은 입양기관과 입양부모들에 의해 높아지기도 한다.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났다고 절대 행복할 수 없다고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심지어 그런 아이들의 부모를 마음대로 바꿔버리는 것은 그 자체로 심각한 폭력이다. 누가 아이를 키울 자격이 있는지, 어떤 가정이 “정상적”인 가정인지 함부로 판단할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다.

 

 

한국의 미혼모들

 

2011년 한국에서 입양되어 해외로 나간 아이의 88퍼센트가, 그리고 공식적으로 국내 입양된 아이의 약 94퍼센트가 미혼모의 아이였다. 한국에서는 매년 약 6천 명에서 1만 명에 이르는 미혼모가 아이를 출산하는데, 그들의 70퍼센트 정도가 친권을 포기하고 아이를 입양 보낸다. 여성이 결혼하는 연령이 늦어지고 혼전 섹스가 더 이상 놀랄 만한 일이 아니게 되었지만, 결혼하지 않고 임신한 여성에 대한 비난은 여전하다. 2009년에 실시된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미혼모들은 동성애자 다음으로 사회적 낙인이 강하게 찍힌 집단이다. 그들 중 많은 수는 가족으로부터 의절 당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무책임하다”거나 “피임을 잘할 것이지” 같은 말을 듣는다. 주변으로부터 고립되지 않는 경우에도 가족 혹은 아이의 생부로부터 낙태를 강요 당하는 경우가 많다. 여전히 임신/출산/낙태에 대한 무거운 짐을 여성에게만 지우는 한국 사회에서 생부(그리고 그의 부모)는 뱃속 아이에 대해 나 몰라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다고 미혼모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많은 것도 아니다. 2013년 한국 정부가 미혼모를 비롯한 한부모 가족에게 지원한 금액은 만 24세 이하인 경우 (최저생계비 150% 이하 기준) 월 15만원에 불과했다. 사회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미혼모가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사회로부터 고립된 채 낙태하지 않고(/못하고)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 여성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미혼모쉼터 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해외입양을 통한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전통을 가진 많은 입양기관들은 친권 포기를 더 부드럽게 받아내기 위해 1980년대 후반부터 미혼모쉼터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미혼모쉼터에서 출산을 기다리는 동안 미혼모들은 분명한 메시지를 받는다. 혼자서 돈은 어떻게 벌 것인지, 국가적 지원이 얼마나 쥐꼬리만한지, 한국 사회에서 미혼모의 아이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불행할지, 궁극적으로 자신이 얼마나 부모로서 “불충분”한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아이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선택인지, 그에 반해 다른 “정상적인” 가족에게 입양 되었을 때 아이가 얼마나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이런 현실은 입양기관들이 운영하는 미혼모쉼터에서는 10명 중 겨우 3명만 자신의 아이를 기르겠다고 선택하는데 비해, 미혼모가 자기 아이를 기르는 것을 지원하는 쉼터에서는 8명이 넘게 그런 선택을 한다는 통계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가난한 사람은 자식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런 사회적, 경제적, 감정적 지원을 받지 못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그런 메시지는 꽤 잘 먹혀들고, 입양기관은 그렇게 유지된다.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물론 아이가 더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면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꼭 생부모와의 단절을 통한, 입양을 통해서여야 하는 건 아니다. 아이를 키우기로 결정한 한부모 가정에 더 많은 복지를 제공하고, 미혼모와 그 자녀에 대한 사회적 낙인 해소를 위해 더 많은 돈을 투자하면 된다. 한국 정부가 한부모 가정에 지원하는 금액은 월 15만원에 불과하지만, 가정 위탁의 경우 월 40~50만원의 지원금을 받고, 고아원은 아동 1인당 105만원을 지원 받는다. “고아”에겐 동정을 베풀지만 “고아가 되려는 아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이다. 입양 지향적인 복지 제도가 아니라 애초에 입양이 필요하지 않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족한 복지를 놓고 미혼모와 입양 부모가 다투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어처구니 없이 낮은 국가 복지를 더 받아내는 것이다.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려면 시스템의 밖으로 나가 진짜 적을 찾아야 하는 법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입양아들

 

여전히 무엇이 옳은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 성인이 된 입양아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보면 되지 않을까. 입양은 마땅히 입양되는 아이들의 행복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고, 그렇다면 그들의 말이 가장 중요한 것일 테니 말이다. 입양 삼자가 아닌 그 바깥에서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입양이 되어도 행복하게만 살 수 있다면 괜찮은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뿌리를 알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 핏줄을 이어받은 부모와 함께 살 수 있었는데도 다른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송두리째 바뀐 삶을 산다는 것, 해외입양의 경우 인종과 문화가 다른 세상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해외로 입양되었던 사람들 중엔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한 치열한 투쟁을 하다 입양개혁운동의 가장 급진적인 활동가가 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한국으로 돌아와 문제가 많았던 기존의 입양 시스템을 바꾸고, 자신의 어머니가 겪었을지도 모르는 것들을 상징하는 존재인 미혼모들을 지원하는 네트워크와 함께 활동하고 있다.

 

 

동성 커플의 입양 운동이 가야 할 길

 

사실 나는 생부모가 될 일은 없을 것이고 동성 커플의 입양이 가능해지면 입양부모의 입장이 될 것이다. 입양 가족으로서 내가 부딪히게 될 수많은 문제들을 먼저 경험한 사람들이 있는 네트워크에서 지원하기를 바라게 될 것인데, 문제는 한국의 입양가족 모임은 입양아와 미혼모 운동단체가 주로 참여하는 입양개혁운동의 입장보다는 입양기관과 반낙태운동의 입장과 더 가깝게 닿아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입양가족 모임 온라인 카페 중 하나인 ‘건강한 자녀 양육을 위한 입양 가족 모임’에서는 입양이 어려워졌다며 입양개혁운동의 성과인 입양특례법 개정을 비판하는 것이 주된 분위기이고, 기독교 세력을 주축으로 한 반낙태운동 세력의 캠페인 웹자보도 쉽게 눈에 띈다. 여성주의적인 시각이 결여된 카페 분위기를 보면서, ‘이건 아니야!!’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동성 커플의 입양이 합법화되면 나도 입양을 하게 될 것이고, 입양은 나와 내 아이의 문제가 될 것이다. 아이는 언젠가 자신의 뿌리를 찾는 길을 걸을 것이고, 나는 그때 아이의 옆에서 함께 그 길을 걸어주는 든든한 지지자가 되고 싶다. 아이는 자신이 입양될 당시의 상황을 알게 될 것이고, 자신을 입양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생모의 이야기를 알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그녀에게서 아이를 받아올 때의 상황도, 내가 그녀에게 아이 뿐 아니라 그녀 스스로에게도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게 도왔는지 혹은 그러지 않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내가 아이의 생부모의 삶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그저 아이를 ‘데려오기’만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싶진 않다. 입양부모들의 운동은 마땅히 섣부르고 오만한 동정심이 아닌 입양3자 모두의 권리를 신중히 고려한 바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동성 커플의 입양 운동이 가야 할 길도 마찬가지다.

 

 

 


<참고한 책>

캐서린 조이스, 박준영(역), 『구원과 밀매』, (뿌리의집,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