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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회원 인터뷰

HIV/AIDS 인권활동가 윤가브리엘이 말하는 불행과 행복

by 행성인 2009. 6. 1.
 

<2010.11.25 덧붙임>
HIV/AIDS 인권활동가 윤가브리엘의 자전적 에세이 <하늘을 듣는다>가 2010년 11월말에 발간되었습니다. 12월8일에는 윤가브리엘의 삶을 위로해 왔던 노래로 엮은 북 콘서트가 열립니다. 윤가브리엘의 삶과 사랑, 그리고 희망이 담긴 이 책은 그의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국 사회에서 숨죽여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HIV/AIDS 감염인의 삶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 수만 해도 수 백 명은 될 것입니다. 시력을 잃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희망은 사람의 몫’이라는 주제로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에 1년 동안 연재해 왔던 글들을 다듬고 보완해 드디어 출간하였습니다. 그래서 발간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치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하늘을 듣는다>를 통해 HIV/AIDS 감염인의 인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로 삼길 바랍니다. 



윤가브리엘은 꽉찬 마흔두 살의 9년차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입니다. 2004년부터는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플러스' 활동에 주력하고 있지요. 가브리엘은 에이즈라는 병과 싸우며 우리에게 감염인의 현실과 에이즈 문제의 본질을 몸소 가르쳐 주었고,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다른 한편 8-90년대 청소년기를 거치며 동성애자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절 힘겹게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아간 과정을 경험한 그의 삶은 그 세대 동성애자들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8-90년대에 태어나 성소수자의 존재가 어느 정도 가시화된 상황에서 비교적 올바른 정보를 비교적 수월하게 접할 수 있었던 세대에게는 낯선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세상을 살고 있고, 함께 차별과 천대, 불의에 맞서고자 합니다. 가브리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우리 삶이 아름다워 보일 거에요.


5월 22일 금요일 안암역 근처에서 가브리엘을 만났습니다. 그는 몇 년 전 복용하던 에이즈 치료제에 내성이 생겼는데 새로운 에이즈 치료제는 다국적 제약회사가 한국에 공급하지 않아 필요한 치료를 받을 수 없었어요. 그는 청력과 시력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엔 외출을 하거나 일상생활에 불편함도 많습니다. 만나자마자 그는 며칠 전 검사에서 면역수치가 그 어느 때보다 높게 나왔다고 자랑을 하더군요. 이렇게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데,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고 회사가 약을 팔지 않아 신체적 자유를 빼앗겨버린 것이 또 한 번 너무 억울했습니다. 가브리엘과의 인터뷰는 장장 2시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동인련에는 어떻게 오게 됐어?


내가 2000년 3월에 HIV 양성 통보를 받았어. 원인 모르게 아프다가 발견을 해서 병원을 가서 치료를 받았어. 발견했을 때 너무 늦은 상태여서 면역력이 다 파괴돼서 폐렴이라든가 거대세포바이러스 같은 여러 기회질환이 와서 병원 치료를 한 달 정도 받고 퇴원해서 쉼터에 들어가게 됐어. 돌봐줄 사람이 없었으니까. 처음 양성 통보를 받았을 때는 놀라고 충격 받을 정신도 없었어. 왜냐면 너무 아픈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서 아픈 거구나 했고. 나 역시 그때 에이즈에 대해서 잘 몰랐으니까 이대로 죽겠구나 생각을 했지. 그런데 너무 아프니까 죽을 때 죽더라도 아픈 것 좀 어떻게 덜어보자 하는 심정으로 병원에 간 거였어. 병원에 가서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나한테 닥친 일이 대체 무슨 일인가 왠지 실감도 안 났어. 의사가 와서 하는 얘기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맨날 검사하고 수많은 피를 뽑아가고 엄청난 양의 약을 먹으라고 하는 이런 일들이 다 실감이 나지 않았어. 아무 정신도 없고 경황도 없다가 한 달 정도 치료받고 몸이 회복이 되면서 그때부터 앞날에 대한 걱정이 되더라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감염 사실을 알게 됐고 예전 삶과는 다를 텐데 어떻게 살아야 되나. 내 주위 사람들에게 친하게 지낸 사람들이나 가족들에게 얘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사람들은 또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런 걱정이 많았지.


쉼터에 들어가서 나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는데 보니까 그 사람들도 나만큼이나 다 지쳐 보이고 삶에 대한 의욕도 별로 없어 보였어. 그 사람들이 겪고 있는 일들이 다 그런 거였어. 누구한테도 말 못하고 혼자 고민하고, 또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우연하게 알려졌는데 감염 사실 때문에 상처를 받거나 소외를 당하는 일을 겪고. 그런 걸 보면서 나도 굉장히 답답했어.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에이즈가 뭐 그렇게 대단한 병이라고 왜 이렇게 세상과 단절하게 만들었을까 그런 고민을 하게 됐지. 나 역시 사람들과 단절하고 연락 다 끊고 6개월을 혼자서 고민하면서 보냈어. 그러다 내린 결론이 내가 사람들에게 얘길 안하고 혼자 나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산다면 나 역시 내 스스로 세상과 단절하게 될 거다. 누구하고도 친하게 지내기도 어려울 거고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


그렇게 혼자 고민을 하는데 동인련이 생각이 났어. 왜 생각이 났냐면 쉼터에서 감염인들이 처한 현실, 인권 상황의 열악한 현실을 보면서 나도 많이 비탄했는데, 쉼터를 둘러싼 에이즈 커뮤니티가 예방에 대한 활동만 하지 감염인 인권이나 감염인들이 차별받는 현실에 대한 얘기를 하거나 관심을 갖는 곳은 없더라고. 당사자인 내 입장에서 너무나 심각한 문제인데 아무도 관심이 없구나 고민을 하다가 동성애자 단체들이 생각이 났어. 2000년 당시에 여러 동성애자 인권 단체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곳이 동인련 같더라고. 내가 그 전에 신문 같은 것을 통해서 97년에 노동법 날치기 통과 때 무지개 깃발 들고 나왔다는 기사나 인터뷰 같은 걸 본 기억이 났어. 그 전에도 마음속으로 응원을 했던 곳이었거든. 이렇게 멋진 친구들이 있구나 이렇게 용기를 내서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친구들이 있구나 하고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지. 그 친구들은 에이즈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분명히 동성애 커뮤니티에서도 에이즈 문제가 큰 문제 중의 하나고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했어. 인터넷으로 찾아서 전화를 걸어서 물어물어 찾아갔지. 처음엔 이런 저런 얘기하면서 동성애자 운동에 참여해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고 세미나나 회원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평범한 회원들처럼 참여했어. 그러다 12월이 다 돼가서 에이즈의 날도 있고 하니까 슬쩍 한번 떠봤지. 운영진 친구들한테 에이즈의 날도 다가오는데 에이즈를 주제로 세미나를 해보면 어떻겠느냐 제안했더니 좋다고 하면서 세미나를 하게 됐어. 그때 나온 얘기들이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에이즈에 대해서 너무나 정확하게 문제들을 알고 있고 본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더라고. 에이즈는 무엇보다 인권이 우선돼야 하고 감염인이 차별받지 않아야 하고 그런 얘기들을 하더라고. 아 내가 잘 찾아 왔구나 했지. 그때부터 더 동인련에 애정이 갔고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어.



어린 시절 얘기가 궁금해. 어떻게 정체성을 알아 갔는지.


나는 4남 1녀 중의 막내야. 형 셋에 누나 하나인데 형제들은 다 이복형제들이야. 아버지가 바람이 나서 나를 낳았대. 나는 두 살 때까지인가 한 살 때까지만 친엄마랑 살다가 아버지한테 보내져서 아버지랑 아버지의 본부인, 이복형제들이랑 함께 살았지. 그래서 어렸을 때 환경은 유복하거나 애정을 많이 받으면서 자란 건 아니고 한마디로 구박덩어리였지. 특히 형들한테 시달렸고, 주워온 애라고 괴롭히고 얼마나 폭력에 시달렸는지 이루 다 말할 수 없어. 아버지만 없으면 잡아먹을 듯이 했어. 형들한테 시달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초등학교 1, 2학년 때부터 엄마 찾아 나간다고 집 나가서 길을 잃곤 했어. 그렇게 자라면서 늘 외롭고 그런 것도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내가 남들과 좀 다르다 그런 걸 묘하게 느꼈어. 초등학교 6학년인가 친구네 집에 텔레비전 만화영화를 보러 놀러 갔어. 친구랑 만화를 보는데 걔네 아버지가 들어왔어. 인사를 하고 열심히 만화를 보다 무심히 뒤를 돌아봤는데 걔네 아버지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다 벗고 있는 걸 보게 됐어. 그때 그 아저씨의 털이 많이 난 성기가 눈에 확 들어오는 거야. "어, 이상하다." 뭔가 얼굴이 달아오르고 두근거리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거야. 지금도 그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어. 그리고 중학교를 들어갔는데 애들이 사진책, 포르노 잡지를 가져왔어. 그런 걸 난생처음 봤지. 여자들이 헐벗고 있고 이상한 자태를 하고 있는데 너무 징그러운 거야. 근데 내 친구 애들은 다 열광을 하는 거야. 근데 난 오히려 사진 속에 같이 있는 남자가 더 흥분되고 그랬지. 굉장히 충격이었는데 단지 낯선 것에 대한 충격이 아니라 뭔가 흥분되는 충격이었던 것 같아. 그때부터 확실하게 내가 친구들하고 다르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아. 근데 그때는 그런 걸 느꼈다고 해서 거기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진 않았어. 성에 대해서 눈을 뜬 시기가 아니어서 자위하는 방법조차 몰랐던 때거든.


그러고 있다가 도저히 형들한테 시달리며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집을 나갔어. 동네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걔는 학교를 안 다니고 공장에서 일을 한다는 거야. 어디가면 일하면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돈도 준대. "그러냐, 나도 갈 수 있냐?" 물었더니 "그럼!" 그러는 거야. 어느 날 학교 간다고 책가방에 옷을 챙겨서 걔가 일하는 공장에 갔어. 그게 15살 때였어. 거기가 프레스 공장이라고 알루미늄을 찍어내는 공장인데 거기서 이 손가락도 다친 거였어. 거기서 몇 개월 일을 했는데 공장 앞에서 어느 날 점심시간에 우리 동네 사는 애를 우연히 만난거야. 그 친구가 날 알아보고 우리 집에서 나 찾는데 뭐하냐면서 당장 집에 가라고 하는 거야. 그때 든 생각이 걔가 우리 집에 가서 얘기를 할 것 같은 거야. 당장 형이랑 엄마가 쫓아올 것 같아서 날 데리고 온 친구한테 아무래도 집에서 날 잡으러 올 것 같으니까 도망가야 한다고 얘기했어. 그 친구 얘기가 잘 됐다고, 서울에 아는 옷 만드는 공장이 있는데 거기는 월급도 더 많이 준다고 자기도 가고 싶었다면서 가자고 했어. 그래서 걔랑 둘이 사장한테 말도 안하고 도망쳤어. 걔가 어디서 짐자전거 한 대를 가져와서 성남에서 창신동까지 나는 뒤에 타고 자전거를 타고 왔어. 그렇게 창신동 봉제공장에 들어갔어. 그 친구는 며칠 뒤에 온다간다 말도 없이 가버린 거야. 난 생판 모르는 곳에 와서 그냥 혼자 주구장창 일했지.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서 아는 형 누나들도 생기고 사람들이랑 친해졌지. 그때가 아마 82년도였을 거야.


그때 공장 생활하면서 열여섯, 일곱 되니까 성에 눈을 떴던 것 같아. 그런 공장엔 다 기숙사가 있었는데 같이 일했던 형들이 기숙사에 같이 살면서 형들이 어리고 귀엽다면서 날 끌어안고 자고 했거든. 그러면서 어떤 성 접촉 같은 일들이 많이 있었어. 그게 어떻게 보면 그 사람들은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지.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형들이 하는 행위가 싫진 않았는데. 근데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좋았던 건 아니야. 내가 싫어하는 형이, 나한테 막 대하고 욕하고 함부로 하는 형이 그렇게 하는 건 너무 싫었지. 그런데 그런 일들이 많았어. 열여섯 살 때인가 공장 생활하고 1,2년 정도 지나서 어떤 형한테 애널 섹스를 당한 적이 있었어. 그러면서 나는 머릿속으로 정리되진 않았지만 몸으로 느껴지고 반응하면서 그런 형들하고 경험한 게 많았어.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사실 확실하게 동성애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부분들은 아니잖아. 난 그런 게 있었지만 상대 형들은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그런 경험을 하면서 나는 왜 이런 게 좋을까, 나는 왜 형들하고 같이 있는 게 좋을까 그런 고민을 계속 했지. 뭔지도 모르면서 말이야. 그때 당시만 해도 동성애라는 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주제나 화젯거리조차도 안 되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런 것에 대해서 얘기한 사람도 없었고 그래서 그냥 나 혼자만 남들과 다른가 보다, 별종이다, 나 혼자만 이상하다, 그런 생각만 했었지.


그러다가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가 되면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감정들이 강해졌던 거지. 영화를 봐도 남자가 더 눈에 들어왔으니까. 그러다 어느 날 그런 생각을 했어. 내가 남자, 동성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동성과 관련된 언어가 있는 것 같은데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얘기해 주는 사람도 없고 어느 날 우연히 사전을 보다가 동성과 관련된 뭔가가 있지는 않을까 해서 동성을 막 찾아봤어. 그런데 동성연애라는 말이 있는 거야. "엇, 동성연애? 동성간의 연애? 이게 나하고 맞는 것 같다" 하고 봤더니 어떻게 써있냐면 '동성간에 하는 변태적인 성행위'. "어, 그럼 내가 변태야? 어머 나 변태인가봐..." 진짜 나 그렇게 생각했다니까. "변태구나…… 왜 난 변태가 됐을까, 왜 내가 변태일까" 그랬었어. 얼마나 심각했는데. 그래서 난 더 사람들한테 말을 못한 거야. 스무 살이 넘어가면서 친구들이 많이 있었는데 전부 만나면 여자 얘기만 하는 거야. 최대 관심사가 여자 만나서 한번 자보는 게 소원이고 전부 다 그래. 나하고는 전혀 다른 거지. 그래서 내가 생각했던 게 나도 여자를 사귀어 보면 내가 달라지지 않을까 남자를 좋아하는 이런 변태 같은 감정이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야. 사실 여자를 한 번도 사귀어 본 적도 없고 그 이전에 여자애들하고 미팅도 한 적이 있는데 난 그냥 편한 친구들 같았고 별 다른 감정이 생기지 않았거든. 뭔지 모르게 여자애들이 가깝게 다가오려고 하는 데 거부감이 있었던 것 같아.


스무 살이 넘고 본격적으로 고민을 하게 되면서 그래 나고 여자를 좋아하고 해보면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서 여자를 사귀어 보기로 했었지. 그때 같이 일했던 누나 중에 나한테 호감을 보이고 굉장히 잘해준 누나가 있었거든. 네 살 많은 누나였는데 나는 그때 시다를 하다가 막 미싱일을 처음 시작해서 열심히 배우던 때였는데 일도 잘 가르쳐주고 되게 잘 해 줬던 사람이었어. 그 누나 집도 내 자취방이랑 가까워서 자주 놀러오고 노는 날에 와서 밥해 주고 그랬지. 그러던 어느 날 어쩌다가 그 여자랑 성관계를 갖게 됐어. 그때 경험이 그 사람이 정말 좋아서라기보다 호기심에서 그랬던 것 같아. 여자랑 해보면 어떨까…… 그렇게 뭐 못할 것 같지는 않더라고 아주 뭐 불편하거나 그런 건 아니고 할만 했던 것 같아. 근데 끝나고 나니까 되게 아닌 것 같고 뭔가 찜찜하고 그렇더라고. 그러다 내가 이런 고민도 하고 있으니까 한번 이 친구랑 사귀어 보면 나도 달라지지 않을까 해서 사귀어 보기로 한 거야. 그래서 그 친구랑 1년 가까이 사귀었어. 좋았던 점은 그 친구가 날 위해서 모든 걸 해준다는 거였어. 날 위해서 밥을 해주고 집에 와서 빨래를 해주고 챙겨주고…… 그런 것들이 너무 좋은 거야. 나는 지금까지 그런 걸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잖아. 엄마도 장사하고 그랬던 사람이라 집에서 엄마가 나한테 그렇게 챙겨준 적이 없거든. 누군가 날 위해서 그런 걸 해준다는 게 너무 편하고 좋은 거야.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직접적으로 경험해 보진 않았지만 내가 들었던 남녀가 좋아하고 사랑하면 어떻게 하고 설레고 뜨겁게 달아오르고 그런 게 전혀 없는 거야. 감정은 그냥 친구보다 조금 더 가까운 것 같지만 그렇다고 막 뜨거운 뭔가는 없는 것 같고 그렇더라고. 그 친구랑 있으면서도 자꾸 다른 남자, 멋진 남자가 있으면 그 사람한테 눈이 돌아가고…… 그 친구가 뭐라고 했냐면 넌 왜 자꾸 딴 데를 보냐고 했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거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여자와의 성관계도 흥미를 잃었고 점점 부담스럽고 싫어지더라고. 그러다가, 정말 기적적으로 종로의 커뮤니티를 알게 됐어.


그 친구랑 사귀다가 언제쯤인지는 모르겠는데 거의 1년 지났을 때였던 것 같은데 어느 날 서점에 갔어. 그때 당시 <점프>라는 잡지가 있었어. 시사라든지 문화에 대한 얘기를 다루는 잡지였어. <선데이 서울>보다는 조금 나은, 노골적으로 스캔들이나 불륜을 다루지는 않은 그런 잡지였던 걸로 기억해. 그때 잡지 표지 사진이 눈에 띄더라고. 남자 얼굴 사진이 클로즈업 돼서 찍혀 있는데 한쪽은 남자의 맨 얼굴이고 한쪽은 여자처럼 화장을 한 사진이었어. 보니까 표지 제목으로 '성의 두 얼굴, 잠입 르포,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동성연애자 퇴폐업소 취재탐방기' 이렇게 써 있는 거야. 그 제목을 읽고 내가 숨이 턱 막혔다니까. "어머! 이거 내 얘기야." 그래서 얼른 사서 봤지.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어. 이번에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http://www.esaram.org/2008/)에 쓴 글이 그때에 관한 거야. 기사는 종로에 낙원상가 근처에 동성연애자들이 모인다는 술집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거길 잠입해서 취재한 거였어. 술집의 위치를 대충 설명하고 그 다음에 지하로 내려갔는데 그리고는 어떻게 표현했냐면 눈 밑이 거뭇거뭇한 남자가 나와서 어떻게 오셨냐고 하면서 여긴 아무나 오는 곳이 아니라고 그러더래. 그래서 그 기자가 자기도 남자 좋아한다고 위장하고 들어갔대. 그리고 거기 풍경을 설명하고 종업원의 말을 빌어가지고 동성연애자들이 짝짓기를 하는 퇴폐업소라고 나와 있는 거야. 지금 보면 그 기사가 너무 우스운 내용이지만 나는 그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이었어. 세상에 나만 혼자인줄 알았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니었고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 거야. 너무 놀라운 일이었지.



그래서 찾아갔어?


거길 당장 찾아가야겠단 마음은 못 먹었고, 계속 혼자 그 충격 속에 있다가 그 친구하고도 더 이상 감정도 생기지 않고 그 친구 사귀면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감정이 없어질 줄 알았는데 없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고. 계속 맘에도 없는 친구를 좋아하는 척하는 것도 미안한 일이고. 친구한테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드는 거야. 그 친구는 날 진짜 진심으로 좋아하고 그랬으니까. 그래서 얘기를 했지. 고백하듯이 있자나 난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아. 그랬더니 그 친구가 울면서 그러는 거야. 뭐 남자를 좋아한다고 거짓말 하지 말고 차라리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솔직하게 말을 하라고 하는 거야. 너는 나하고 같이 있을 때도 항상 딴 여자를 쳐다봤지 않냐. 그 친구는 그렇게 오해를 한 거지.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는 거야. 세상에 그런 사람이 나라고 해도 거짓말하지 말라는 거야. 못 믿겠다는 거야. 한마디로 전혀 씨도 안 먹히는 거야. 그게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고백한 거였거든. 그런데 내가 거짓말쟁이가 된 거자나. 그때는 그게 정말 너무 절망적이었어. 내가 속한 이 세계에서는 아무도 내 고민에 대해서 알아주지 않는구나. 나는 솔직하게 살아야 하는데 거짓말쟁이가 되는구나. 그래서 그때는 앞으로 또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 그러면서 그 친구랑 헤어지고 혼자 고민을 하다가 그 잡지 기사가 생각이 나는 거야.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정말 그 기사에 나온 대로 나랑 같은 사람들이 맞을까. 너무 궁금하고 만나보고 싶고. 내가 있는 이곳에서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는데 그곳에서는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고 너무 가보고 싶은 거야. 그래서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었어. 그게 스물둘 아니면 스물셋, 89년 아니면 90년쯤이었을 거야.



제대로 찾아갔어?


쇼를 했지. 헤맸어. 그 기사에는 낙원상가 근처라고만 얘기했지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고 술집 이름도 나와 있지 않아서 낙원상가 밑에 가서 난감했지. 어디로 갈까 하다가 그냥 바로 보이는 아무데나 갔어. 그런데 그냥 일반 카페 같아. 종업원도 여자고 손님도 여자랑 남자랑 있고. 그 기사에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들만 오는 곳이라 종업원도 남자고 손님도 다 남자라고 나왔거든. 그래서 여기가 아닌가보다 하고 다른 곳에 가보고 그런데 다 아닌 거야. 그래서 골목을 빠져나오는데 골목 입구에 조그만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오더라. 간판에 중절모 쓰고 콧수염이 있는 남자 얼굴이 그려져 있는 거야. 느낌이 묘한 거야. 지하로 내려가 봤지. 거기가 발렌티노였어. 문을 열었는데 손님이 한 명도 없어. 그때가 초저녁이었거든. 종업원들만 있는데 "어서오세요~" 인사하는데 목소리가 이상한 거야. 어머, 여성스러운 목소리가 묘한 느낌을 주네. 근데 손님이 없잖아. 내가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면서 장사 안 해요 물어봤더니 한다고 해. 한잔 마시고 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앉으래. 그래서 구석진 자리 앉아서 칵테일을 한잔 마셨어. 보니까 종업원들도 전부 남자야. 두세 명 있었는데 바 안에 앉아서 날 보면서 자기들끼리 얘기를 하는 것 같아. 여기가 맞나 아닌가 고민을 하다가 그렇다고 거기서 여기가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오는 곳이 맞는지 물어볼 용기도 안 나잖아. 테이블에 전화번호가 적힌 성냥이 있길래 그걸 집어 들고 나왔어. 전화로 물어보려고. 나와서 진짜 전화로 물어봤어. 두근두근 하면서 진짜 그때 얼마나 떨렸는지 몰라. 공중전화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저기요 조금 전에 가게 왔다 간 사람인데요. 뭐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했는데요." 하니까 "물어보세요." "저기 제가요 남자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인데요. 거기가 저처럼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 맞나요?" 그쪽에서 친절하게 "예, 맞아요." 그래. "어, 예. 그렇군요." 반갑기도 하고 막 너무 가슴이 쿵쾅거리고 그랬어. "근데 왜 사람들이 한 명도 없나요?" "여기는요, 초저녁에 사람이 없어요. 밤 열시나 넘어야 손님들이 와요." 내가 뭐라 그랬는지 알아. "그래요? 그럼 이따가 다시 가도 돼요?" 종업원이 웃으면서 "물론이죠. 오세요." 그때 종로에서 혼자 왠지 막 설레면서 있다가 10시인가 11시쯤 다시 거기 갔지. 그랬더니 종업원들이 와서 얘기를 했지. 일반 손님인줄 알았다 그러면서 막 이 바닥에 대해서 얘기를 해줬지. 그때 커뮤니티를 알게 된 거지. 그게 90년도야. 



참 많이 돌아 왔네. 그래서 커뮤니티를 안 다음엔 좋았어?


10여년의 시간 동안 정말 혼자 난 왜 이럴까 고민했고 안 그래도 사춘기는 힘든 시절이잖아. 나도 어린 나이에 집 나와서 더 힘들었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늘 외롭고 힘들었는데 정체성에 대한 고민 때문에 더 많이 힘들었고. 지금도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어.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너무 싫을 거야. 그렇지만 그 세계를 알고서도 쉽게 너무 좋아 이렇게 받아들이지 못했어. 왜냐하면 내가 이런 쪽을 또 알게 돼서, 내가 더 노력하면 동성애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이런 곳을 알다 보면 영원히 못 빠져나오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 그때만 해도 내 정체성이나 자아가 확실히 정립이 안 됐던 거지. 이런 곳을 나쁜 곳이라고 얘기하는데, 기사에 나왔듯이 퇴폐업소잖아. 내가 여기 와서 퇴폐 행위를 하는 건데, 퇴폐라는 게 뭐야 뭔가 불결하고 더럽고 이런 걸 얘기하는 거잖아. 내가 이런 데 빠지면 내가 그런 사람에서 영원히 못 헤어나는 게 아닌가 그런 두려움이 있었어. 그리고 그때 그곳에서 알게 된 종업원이나 그땐 마담이라고 있었어. 마담이라는 사람이 오랜 경험이 있으니까 자기가 겪었던 얘기를 해주는데 그 얘기 들어보니까 정말 막 힘든 삶이더라고. 녹녹한 삶이 아니야. 그 사람도 나한테 그랬어. "너 만만하게 보지 마라." 그때 마담 언니가 나한테 한 얘기가 "오늘 그럼 데뷔한 거네?" "데뷔라뇨?" "이런 데 처음 나왔을 때를 데뷔라고 해." 내가 무슨 연예인인가 하면서 웃었지. 또 나보고 식성이 뭐냐는 거야. 뭐 이것저것 다 잘 먹는다고, 밀가루 음식 특히 좋아한다고 했지. 마담이 깔깔 대면서 "아휴 쌩짜 맞네, 그런 거 말고 좋아하는 남자 스타일 말이야. 그런 걸 식성이라고 해." "잘 모르겠어요." 나보고 오늘 처음 나왔으니까 데뷔 기념으로 누군가 만나게 해주겠다고 누구 찍어보라고 하는 거야. 싫다고 괜찮다고 했지. 쑥스러워서 처음 나와서 나온 것도 벌벌 떨면서 나왔는데 누굴 찍고 뭘 해. 싫다고 아이 괜찮다고 하는데도 만나게 해주겠다고 하면서 마담이 뭐라고 했냐면 오늘 머리 얹어주겠다는 거야. 싫다는데도 자꾸 재촉을 하길래 못이기는 척 하고 건너편에 있는 어떤 사람을 찍었어. 대뜸 그러는 거야 "쟤 뚱보갈이야." "뚱보갈이 뭐에요?" 뚱뚱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래. 뚱은 알겠는데 보갈이 뭐냐고 하니까 보갈들은 식성만 보면 이 남자 저 남자 가리질 않으니까 갈보나 같다는 거야. 갈보를 거꾸로 부르는 말이라고. 나는 너무 그 말이 싫었어. 그때 그 잡지 기사를 보면서도 세상이 퇴폐라고 인식을 하는구나 했는데 보갈이라는 말이 같은 의미처럼 느껴지는 거야.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을 하는 건데 스스로도 그렇게 인식을 하고 있으니까 그게 너무 싫더라고.


어쨌든 그러면서 그런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하니까, 마담 언니도 그랬어. 너 이 바닥 처음 나와서 다 새롭고 신기하고 좋을 것 같지만 만만한 게 아니라고. 연애나 젊음은 다 한때라고 나이 먹어 보라고.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이제는 그 사람들이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안 거지. 보갈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냐고 세상 사람들이 다 호모 새끼라고 놀기고…… 그런 얘기도 듣고 하니까 그런 세계를 알면서도 선뜻 쉽게 좋아서 나돌아 다니진 못했지. 그러다가 2년 정도 뒤에, 게이바에서 한 사람을 만나서 사귀다가 헤어지고 나서 혼자 막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자살까지 시도했었지.


이쪽 세계를 알게 되긴 했는데 아까 얘기했듯이 이런 세계에 빠져서 영원히 못 빠져나가서 사람들에게 퇴폐 행위자로 낙인찍혀서 살아가야 하나 아니면 그걸 내가 극복해서 살아가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고 난 정말 어쩔 수 없는 게이인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자살하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지. 그때 내가 이런 고민에 대해서 얘기할 사람도 없었고 정말 혼자 끙끙대다가 힘들 게 살아갈 자신도 없고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자살을 시도했지. 지금 유행하는 연탄불 그때 나도 시도했었어. 그때 수면제를 일단 사서 모았어. 다 돌아다니면서 엄청나게 모았어. 약만 먹어서는 실패할까봐 연탄을 방에다가 피워놓고 소주를 한 병 사다 소주 먹고 약 한웅큼 먹고 그렇게 한 병을 먹고 골아 떨어졌어. 그런데 그 다음날 늦은 오후쯤 눈이 떠진 거야. 그냥 깊이 자고 일어난 것 같았어. 머리가 아프고. 그리고 보니까 손이 다 일그러져 있었어. 자면서 양철통에 손을 대고 있었나봐.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내려가서 목욕하고 병원에 갔지. 그때가 스물다섯 살 때였지.



음악을 참 좋아하고 음악에 대한 글도 쓰고 있잖아. 음악은 어떤 존재야?


지금 내가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기고 글을 통해서 음악과 함께 살아 온 내 이야기를 쓰면서 내 삶에 대해서 과거에 대해서 돌아보게 되는데, 정말 내가 평범하게 순탄하게 살아온 사람은 아니라는 걸 많이 느끼고 그걸 굽이굽이 참 잘 이겨냈다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잘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이 바로 음악이었던 것 같아. 그렇게 외롭고 힘들어 할 때 음악을 통해서 그런 걸 달랬고 나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 것도 음악이었고. 나는 지금도 가장 좋은 음악은, 너에게 가장 좋은 음악은 어떤 음악이냐 묻는다면, 노랫말을 통해서 나를 깨우쳐 주고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노래, 그런 노래가 제일 좋은 노래 같아. 그런 노래가 바로 한영애씨 노래지. 그 사람의 노래가 인간 본연의, 실존에 대한 고민이랄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나에 대한 것, 외로움, 자연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어. 정말 힘들었을 때 한영애씨 노래가 너무나 많은 위안을 줬고. 자살할 때도 한영애씨 노래를 들었어. '갈증'이라는 노래가 있거든.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부르는 노래야. '목이 타오르네 물이 그립다 / 비라도 내려주면 정말 좋겠다 / 해는 무정하게 나도 태우네 / 아 사람이 그립다 / 목이 타오른다'


사람에 대한 어떤 갈망, 사랑에 대한 갈망, 이런 갈증을 노래한 건데 정말 그때 내 심정을 대변한 거나 마찬가지였지. 나 역시 그때 사람을 그리워했고. 누군가 내 옆에서 따뜻한 말 한마디, 그래 너는 그렇게 살 수 있어, 네가 그렇게 사는 게 중요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네가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한 거야, 너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행복을 찾아가는 삶이 중요해 하고 얘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정말 그리웠거든. 한영애의 노래가 그런 위안과 위로를 주었지. 그 사람의 노래가 지금도 내 삶에 있어서 큰 안식처, 위안이지. 그 이후에도 늘 그렇게 힘들고 고민하고 어려운일 있을 때 늘 노래를 들으면서 달래곤 했었지.



감염인 인권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 큰 용기를 필요로 했을 것 같아.


2000년에 동인련 찾아간 얘기는 했잖아. 감염 사실을 알고 나서 동인련이 에이즈 문제에 어떤 관심이 있는지 탐색하기 위해서 갔다가 이 친구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구나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친구들에게 내가 감염 사실을 털어놓지는 않았어. 그게 참 어려웠어. 내가 그때 동인련에 참여한다고 해도 한 달에 한두 번 갈까 친하게 친분을 두텁게 할 계기는 별로 없었거든. 선뜻 친구들에게 털어놓지는 못했었지. 그러고 한 2년 지나서 2002년에 또 쓰러졌어. 그때부터 약에 문제가 있었거든. 부작용 때문에 폐결핵이 와서 늦여름부터 가을 지나서 초겨울까지 병원에 입원해 있었어. 정말 침대에서 일어날 기운조차 없어서 간호사가 침대 시트로 밧줄을 만들어줘서 그걸 붙잡고 일어났어. 다리에 힘이 없어서 화장실까지도 못 갔어. 일어나면 쿵 주저앉고 그랬으니까. 그렇게 다 죽어 가는데 어느 날 초저녁에 혼자 누워서 잠이 설핏 들었는데 그땐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병실에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 그런데 누가 들어오는 거야. 봤더니 동인련 회원이 들어온 거야. 깜짝 놀랐지. 말도 안했는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 일어날 기운도 없던 내가 벌떡 일어났다니까. "너 여기 어떻게 왔어?" 그 친구가 다른 사람 문병 왔다가 내 이름이 있길래 혹시나 하고 들어온 거야. 우연하게 알게 됐지만 나름 반갑기도 하더라고. 아프면서 동인련도 한동안 못 나갔잖아. 애들 다 잘 있냐고 물어봤지. 그랬더니 이 녀석이 그 자리에서 전화를 해서 형이 병원에 입원했으니 빨리 오라고 한 거야. 회원들이 다 왔었지. 그때 정말 많이 외로웠거든. 아프기 전에 혼자 있을 때도 외로웠지만 아프면서 혼자 있는 게 얼마나 외로운 일이란 거를 뼈저리게 느꼈지. 그때 매일 죽는 꿈을 꿨다니까. 그때 동인련 친구들이 와주니까 정말 눈물 날 정도로 반가웠어. 이 친구들이 알게 됐는데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런 생각은 안 들었어. ‘이 친구들은 뭔가 다를 거야’라는 믿음도 없지 않아 있었거든. 그리고 회복돼서 퇴원하고 한 회원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다른 회원에게 들어서 알 것도 같은데 나한테 물어보질 않더라고. 너 그냥 많이 아팠다며 그런 얘기만 하더라고. 나는 그 형이 알고 얘기를 하는지 모르고 얘기를 하는지 아리송했어. 물어봤다면 난 편하게 얘기를 했을 텐데 안 물어보더라고. 그러다 내가 먼저 얘기를 했어. 그 형이 내 손을 잡으면서 네가 먼저 얘기해 줘서 고맙다고 하고 따뜻하게 위로해 주더라고.


그러다가 2003년에 유독 에이즈 관련 사건사고들이 많았어. 감염인 커플이 싸웠거든. 싸우다가 한 명이 애인을 칼로 찔러 죽였어. 경찰이 와서 수사를 하다가 약병을 보고 에이즈 환자라는 걸 안 거야. 그래서 그 시체를 치우지 않고 국립보건원에 연락해서 치우라고 하고 국립보건원은 왜 우리가 치우냐 살인사건인데 너희가 치워라 하면서 서로 미루다가 시체를 일주일 넘게 방치한 거야. 그리고 또 광주에서 감염인이 병원에서 온다간다 말도 없이 나가서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더니 경찰이 지명수배를 했어. 환장하지. 그리고 또 어떤 감염인이 맹장이 터져서 병원에 갔는데 수술 못해준다고 하고 다른 병원에 미루면서 열네 시간을 방치한 거야. 그거 보면서 너무 화가 났었지. 도대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는지. 그런데 어느 누구도 나서질 않는 거야. 항의하질 않는 거야.


그렇게 화가 나고 쌓여있던 상태에서 동인련에서 제의가 하나 들어왔어. 보건의료단체연합에서 아시아 보건 포럼을 하는데 그중에 아시아 에이즈 문제를 다루는 섹션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나가서 한국 에이즈 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 나는 계속 화가 쌓여 있던 상태에서 좋은 기회일 것 같다 생각을 했는데 용기가 좀 필요한 일이잖아. 사람들 앞에서 내가 감염인이라고 말하는 게 떨리기도 하고 용기도 필요했지만 내가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뭔가 좀 얘길 하고 싶었어. 그래서 거기 나가서 발언을 했지. 한국에서 이런 일들이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겪고 산다. 덜덜 떨면서 무슨 얘기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는데 굉장히 더듬더듬하면서 말을 했어. 그때 거기 있었던 몇몇 사람들이 날 찾아왔더라고. 자기들도 에이즈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당사자를 만날 수가 없었다. 이번 기회에 만났으니까 뭔가 에이즈 문제에 대해 함께 해보면 어떻겠느냐 해서 동인련이랑 함께 나누리 플러스를 조직하게 됐지.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더라고. 에이즈 문제가 워낙 사방팔방 걸쳐져 있는 것이라 우리도 공부하면서 해보자고 했지. 유엔 에이즈 지침들에 기반해서 한국 상황에 맞게 인권 가이드라인도 만들면서 정부정책도 연구하고 보건의료 쪽이나 감염인들과 간담회, 토론회, 캠페인도 하고 정부정책에 항의하는 기자회견, 시위도 하고 그러면서 그동안 쌓인 화, 울분들을 토해내고 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했지.


2006년 6월 15일, 한국 다국적의약산업협회의 약제비적정화방안 반대 기자회견장. 윤가브리엘은 “에이즈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약을 먹을 수 없어서 죽는 것이다”라고 적힌 티셔츠를 들고 나가, 다국적 제약회사가 말하는 신약에 대한 환자의 접근권이 거짓말임을 폭로했다.


에이즈 운동을 하면서 동시에 신자유주의 문제나 여러 사회운동에 참여했잖아. 특별한 계기가 있었어?

       

에이즈 문제가 신자유주의의 문제라는 걸 느낀 계기가 있었어. 2004년에 태국에서 국제에이즈회의가 열렸는데 우리가 거기 가게 됐거든. 에이즈 문제를 공부하다 보니까 이게 굉장히 전 세계적인 문제고 빈곤의 문제와도 연결이 된다는 게 보이더라고.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그런 문제를 알아야 하고 그런 것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것이 국제에이즈회의가 아니겠느냐 해서 거기 가서 뭔가를 배워볼 수도 있고 문제의 실상을 알 수 있을 거다 해서 갔지. 아니나 다를까 거기 가서 그 사실을 체험하게 됐지. 에이즈회의에서 항상 집회를 하는데 그때 정말 많은 전세계에서 온 감염인들을 만났지. 아프리카에서 온 감염인 활동가들, 선진국에서 온 활동가들, 제일 인상 깊었던 게 태국 인근 지역인 버마, 라오스 이런 데서 사전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서 트럭에 사람들이 여러 명 타고 몇날며칠을 달려서 왔대. 그 사람들 차림이 정말 볼품없었어. 시커멓고 삐쩍 마르고 약도 못 먹고 몸 상태도 안 좋아 보였는데 그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사전집회에 참여하기 위해서 며칠씩 트럭타고 왔잖아. 그 사람들이 왜 왔겠어. 자신들이 약 먹을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왔을 거 아니야. 그때 우리가 누구나 자유롭게 약을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Free Aids Drug'이라고 쓴 스티커를 만들어 갔는데 불티나게, 너도 나도 달라고 했어. 스티커 사진이 신문에 나기도 했어.



2004년 태국 에이즈국제회의장에서 시위하고 있는 윤가브리엘
                                          

문제의 본질이 그거였어. 저 사람들은 왜 약을 못 먹을까. 난 그때 회의 내내 울고 싶었어. 난 약이라도 먹지 그 사람들은 약을 왜 못 먹어야 하나. 그 사전 집회가 끝나고 개회식, 기념식을 여는데 리처드 기어도 오고 코피 아난도 왔어. 엄청 큰 컨벤셜 홀이었는데 그 입구에 뷔페를 쫙 차려놨어. 끝나고 고위 정부 관계자나 한 자리 하는 사람들이 파티를 하는 거야. 그걸 보니까 속이 뒤집어지는 거야. 그렇게 약도 못 먹어서 약 먹게 해달라고 울부짖기 위해 온 사람들 생각이 나서 그 음식을 보니까 속이 뒤집어 지는 거야. 씨발 누구는 약도 못 먹고 죽고 있는데 이놈들은 에이즈 환자들 이용해서 배터지게 처먹고 앉아 있네. 그래서 그 기념식을 안보고 나와 버렸어.


그 안에 활동을 하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했어. 우리나라 환자들이 차별받는 문제는 문제도 아닌 거야. 거기에 비하면. 정말 약도 못 먹고 죽어나가는 그 사람들 문제에 비하면. 어떻게 이런 우리의 문제를 알려 나갈까 고민이 많았지. 그러다가 액트업(Act Up)이 활동하는 걸 봤어. 넓은 컨벤셜 센터에서 여러 프로그램이 있고 여기저기 행사가 있으니까 옮겨가는데 큰 복도에서 그때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곳이 액트업하고 태국의 티엔피 플러스라는 감염인 네트워크였는데 어디서 북소리가 둥둥 들려. 보니까 태국인 감염인 단체가 앞장서서 북을 치고 뒤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는데 까만 비닐 봉투를 사람 시체 모양으로 만든 거야. 그걸 들고 북을 치면서 행진을 하는 거야. 그걸 보고 어디 항의를 하러 가는 것 같다 싶어서 나도 거길 따라갔어. 그 사람들이 간 행사장이 유일하게 다국적 제약회사 CEO가 세미나를 하는 곳이었어. 그 자리에 화이자 CEO가 왔는데 그 사람한테 항의하러 간 거지. 우리가 들어갔을 때가 마침 그 CEO가 발언을 하려던 때였어. 그때 활동가들이 외쳤어. 너는 말할 자격이 없다. 너는 발언할 자격이 없다. 그랬더니 객석에 있었던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박수를 쳤어. 그때 정말 울 뻔 했어. 나중에 사람들이 연단 앞에 가서 시체를 집어 던지면서 너희의 비싼 약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너는 말할 자격이 없다. 감염인이 말할 기회를 줘라. 감염인이 말해야 한다. 그래서 태국 감염인 활동가가 나가서 얘길 했어. 그때 확실하게 알았지. 에이즈 문제의 가장 핵심이 이것이구나.



정말 안타까운 일인데 오빠도 병이 아니라 약 때문에 건강을 잃었잖아.


사실 그 생각하면, 내성 생겨서 몸이 계속 안 좋아 지면서 새로운 약을 써야 하는데 나한테 필요한 약인 푸제온은 제약사 로슈가 비싼 약값 요구하면서 공급하지도 않고 그러다가 거의 실명하고 다리에 마비까지 오고 여러 문제를 겪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자다가 벌떡벌떡 일어날 정도지. 사실 그랬기 때문에 2004년에 태국에서 느꼈던 버마와 라오스, 아프리카에서 왔던 환자들의 심정을 그 사람들만큼 절박하게 느끼진 못했을 거야. 하지만 이제는 느낄 수가 있어. 그 사람들 그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그래서 어떻게 보면 약 문제에 대해 정부나 제약사에 항의할 때 누구보다 더 절규할 수 있었던 것 같아.



동인련은 오빠에게 어떤 곳이야?


지난 에이즈의 날, 감염인 인권의 날 집회하고 뒷풀이 하면서 내가 그런 얘길 했어. 동인련은 나를 다시 태어나게 만든 곳이다. 내가 감염인으로서 에이즈 운동과 동성애자, 성소수자 운동에 참여하게 만든, 날 다시 태어나게 한 곳이란 그런 얘기를 했었거든. 그게 가장 정확한 말이겠지.     


 2008에이즈의날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윤가브리엘(사진 _ 민중언론 참세상 이정원 기자)
                              


성소수자, 동성애자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새로운 친구들뿐 아니라 지금도 자신이 동성애자인 것을 인정 못하고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더라고. 그러다보니 자신을 비하하고 한숨만 쉬고 아무리 내가 잘나봐야 나는 게이일 뿐이야 하면서 자긍심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게 돼. 특히 감염인들 중에 동성애자 감염인을 보면 그런 게 더 심해. 내가 동성애를 해서 이렇게 에이즈에 걸렸구나, 내가 동성애자가 아니었으면 에이즈에 안 걸렸을 텐데 이런 생각도 가지고 있고. 그런 걸 보면 우리 사회에 동성애에 대한 억압이나 에이즈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많이 느끼게 되거든. 그 사람들을 탓할 순 없는 거야. 왜냐하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거든. 이 사회가 그들을 한숨 쉬게 만들고 스스로 비탄하게 만들고. 그렇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인구의 몇 퍼센트가 동성애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차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절반 이상은 될 거라고 생각은 해.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이라도 우리를 지지하고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생각해. 다수가 우리를 차별할 지라도 소수의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힘을 내고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가졌으면 좋겠어. 그러려면 솔직히 자기 자신, 세상, 사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야 하는 것 같아. 내가 에이즈로 9년 넘게 투병하면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을 겪으면서도 다 이겨내고 버텨냈던 것이 바로 그런 거였거든.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나를 지지해주고 감염인들을 응원해주는 사람들. 동인련 친구들, 나누리 친구들, 그 외 많은 후원자들, 도와줬던 사람들. 그 사람들 생각하면서 다시 힘을 냈어. 우리 동성애자, 성소수자 친구들도 그랬으면 좋겠어.


인권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정확하고 어떻게 정의가 돼 있지?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기본적 권리'라고 정의돼 있다.) 내가 동인련에 참여하면서 인권이라는 말을 알게 됐지. 사실 그 전엔 인권이란 개념에 대해서 잘 몰랐어. 생소하기도 하고. 그런데 동인련에서 활동하고 나누리 플러스 활동하면서 인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어. 인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보장받아야 하는 건 두말할 것도 없잖아. 그런데 우리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여러 가지 이유로 차별 속에 있지. 내가 인권이라는 말을 절박하게 느낀 계기가 언제였냐면 작년 초에 내가 눈 실명하고 청력도 많이 안 좋아져서 장애인 등록이 됐거든. 병원에서 장애진단 받고 동사무소에 등록을 하고 집에 가면서 많이 우울했었거든. "아, 장애인까지 됐구나." 사실 많이 우울했어. 그런데 내가 장애인이 됐다는 것에 대해서 왜 우울해 할까. 나도 평소에 활동하면서 늘 우리처럼 차별받는 소수자들, 장애인이나 이주노동자들과 연대해야 한다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내가 장애인이 되니까 이게 또 다른 문제더라고. 어쨌든 나는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이 된 거니까 불편한 몸을 가진 사람이라는 거. 불편하다는 게 좋은 건 아니잖아. 어느 누구도 장애에 대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우울한 게 당연할거야 하는 생각도 들었지. 생각해보니까 나는 이 땅에서 환영받지 못할 타이틀을 다 갖고 있는 거야. 동성애자에 감염인에다가 장애인까지. 그런데 내가 장애인이 돼서 작년 420 장애인 차별 철폐 집회에 나갔는데 그때 또 굉장히 기분이 다른 거야. 장애인이 돼서 차별철폐집회 나가니까. 내가 잠깐이라도 장애인이 됐단 사실에 우울한 기분을 가졌던 게 얼마나 바보스럽고 한심스러운 생각이었는가를 장애인 활동가들을 보면서 깨닫게 됐지. 멀리보지 않아도 우리 친구 만훈이. 그 몸을 하고도, 한쪽 손밖에 못 움직이면서도 혼자서 자립해서 열심히 살고 차별 철폐를 위해서 앞장서서 싸우고 경찰들한테 방패로 두들겨 맞고 그러면서 싸우고 그런 활동가들을 보면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내가 왜 이런 생각을 갖고 있나,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계기가 됐지.


너 어떻게 살 거야 내 스스로 반문을 하게 됐지. 니가 동성애자가 됐건, 감염인으로 살던, 장애인으로 살던 무슨 타이틀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니가 어떻게 살 거냐 무엇을 하며 살 거냐 그게 중요한 거잖아. 그런데 니가 속해있는 그 모든 그룹들은 모두 차별 속에 놓여있어. 장애인이라고 차별받고 동성애자, 감염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럼 너 어떻게 살래 차별에 순응하고 살래, 저항하고 살래. 순응하고 사는 거 그건 아니잖아. 왜 차별 받아 저항해야지. 그래서 지금은 하나의 차별 속에 속해있는 사람보다 더 많은 차별을 받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저항하고 그러면서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올해 장애인의 날엔 눈 때문에 못 나갔지만 라디오에서 민주노동당의 곽정숙 의원이 인터뷰를 하는데 이런 얘길 하더라고. 장애는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일 뿐이라고. 장애인들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불행하게 만드는 건 이 사회가 그렇게 만드는 거지 그 사람들이 그러는 게 아니라고. 그 말 듣고 아 맞다. 그때 난 장애인이 됐다는 걸 불행하다고 받아들였던 거야.


아까 얘기했지만 우리 동성애자 친구들도 자신들이 이런 게 절대 불행한 게 아니라는 거야. 그런데 우리는 불행한 것도 아니고 불편한 것도 아니야. 사람들이 불행하게 불편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돼 그냥 다름으로만 받아주면 돼. 그걸 못 깨우치는 이성애자들을 우리는 자꾸 깨우쳐 줘야 되고, 니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니들이 잘못 오해하고 있는 거야, 니들이 뭘 모르고 있는 거야 하고 깨우쳐 줘야 하고 알려줘야 하고 그래서 많이 주장해야 하고 많이 더 앞장서서 나서서 외쳐야 되고 그래서 우리는 거리로 나서서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것. 어쩌면 이 얘기가 아마 내가 동성애자 친구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얘기일 것 같아.  

 

       

인터뷰 및 정리 _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