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프렙먹었나요?

Posted at 2019. 11. 10. 16:00// Posted in HIV/AIDS
기획의 글:
‘HIV/AIDS 예방약’이라고 부르는 ‘HIV 노출 전 예방요법'(PrEP; Pre-exposure prophylaxis)은 현재 한국에서도 상용화를 앞두고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HIV/AIDS인권운동은 프렙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지 고민을 이어왔는데,그에 앞서프렙이 한국사회 HIV/AIDS와 게이 커뮤니티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요구가 모였습니다. 이에 행성인 HIV/AIDS인권팀은 10월 5일 <월간에이즈: 프렙-토크쇼>를 진행했습니다. 행사에는 패널 외에도 시범사업에 참여 중인 분들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이들의 이야기를 웹진에담습니다.이후에도 많은 논의와 실천들이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아니요, 오늘도 먹지 못했습니다. 나는 대부분의 일들을 제 시간에 해내지 못합니다.오후 4시가 넘어서야 점심을 먹고, 새벽 2시가 가까워서야 저녁을 먹습니다. 그마저도 힘이 없어 식사를 거를 때가 많습니다. 설거지를 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배달 음식은 몸에 좋지 않지만, 설거지거리가 생기지 않아 좋습니다. 음식물 쓰레기는 일회용 그릇과 함께 뭉쳐서 일반쓰레기 봉투에 버립니다. 쓰레기는 집안이 쓰레기로 가득 쌓여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가 되어야만 버립니다. 배달 음식은 비싸서, 돈이 없을 때는 라면을 먹어야 합니다. 컵라면이 편하지만, 봉지라면에 비해 2배정도 비쌉니다. 설거지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냄비는 항상 다른 것을 쓰고, 더 이상 새 냄비가 남아있지 않을 때 어쩔 수 없이 설거지를 합니다. 이런 나에게 매일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는 일은 너무나 힘이 듭니다. 오전 10시에 알림을 설정해 놓은 습관 어플이 나에게 물어봅니다. ‘오늘 프렙 먹었나요?’ 아니요, 오늘도 먹지 못했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일들을 제 시간에 해내지 못합니다. 건강을 챙기고 관리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은 감염인이 아니지만, 감염인이 되더라도 저는 치료약 또한 제때 챙겨먹지 못할 것이라고 느낍니다. 저는 건강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한창 우울증이 심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점심은 12시 경에 먹고, 저녁은 6시 전후로 먹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갑작스레 우울 삽화가 찾아오면, 위와 같은 상황은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프렙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가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노출 전 예방 요법의 핵심은 복약 순응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약속이고, 약속은 지킬 의지가 뒷받침 되어야 비로소 의미 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프렙을 하는 경험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다고 느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물론 온-디맨드(On-Demand) 라는 용법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보통의 요법처럼 매일 트루바다를 복용하는 대신, 바이러스 노출 위험이 있는 성관계 전에 2알, 그 후 이틀에 걸쳐 같은 시간에 1알씩, 총 4알만을 먹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나의 성생활을 추적할 수 있는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누구와 섹스하는지가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면, 내가 언제 섹스를 할 것이고 또 언제했는지를 추적하는 것 또한 매우 어려워집니다. 우울증 때문에 흐려진 날짜 감각은 이를 더욱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집 찬장에 트루바다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나에게 보험이 있다는 환상을 주고, 이는 더욱 문란한 성생활로 이어집니다. 결국 프렙이라는 예방법의 효과는 사라지고 노콘안싸라는 습관만이 남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라퀵(HIV구강점막검사)을 해 본 것도, 역설적이게도 프렙 요법 시행 중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하루에도 세 명씩의 다른 남자와 섹스를 했고, 그 중 한 명은 저를 ‘임신시키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여러 차례의 노콘안싸가 있었고, 그 때마다 그 형은 저를 ‘임신시킨’ 것에 대해 만족스러워 했습니다. 나중에 형이 “’임신시킨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지?” 라고 물어왔을 때 저는 당황했지만 아닌 척 했습니다. 이후 몇 번의 반복된 대화 끝에 그 형이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약국에서 키트를 사며 저는 그동안 프렙을 성실히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와 제 안에 남아있는 HIV/AIDS 포비아에 대한 자괴감을 느꼈습니다. 그동안 애써 무시해 왔던 불안과 걱정, 쾌락과 안심 등 온갖 모순적 생각과 감정들이 플라스틱 막대기의 형태로 제 손에 들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 때 뿐이었습니다. 한 줄이 나온 것을 확인한 후, 저의 생활은 이전으로 돌아갔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어봅니다. “왜 안 먹는 거예요? 그냥 먹으면 되잖아요.” 저는 이 질문이 약간은 부당하다고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동의한다는 선택지 밖에는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잘못된 일을 했을 때, 왜그랬냐고 물어보는 부모님 앞에서, 선생님 앞에서, 경찰이나 의사선생님 앞에서 우리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까는 일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잘못된 일을 하면서 그것이 잘못된 줄 모르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자신의 삶에 관한 것이라면. 단지 잘못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과, 잘못된 일을 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고 느낄 뿐입니다.


이보다 더욱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또는 비판은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프렙을 성실히하지 않는 건 단지 당신이 감염인이 아니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저는 프렙을 통해 감염인과 비감염인 사이에 어떠한 연결고리가 형성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를 의심스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예방부담의 공정성을 높인다는 측면에서 프렙의 보급이 확산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프렙을 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토록 오래 염원해온 감염인과 비감염인의 완전한 평등이 실현될 수 있을까요? 저를 ‘임신시키기’ 좋아했던 파트너는 제가 프렙을 한다는 사실을 알리자, 안심하며 노콘안싸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했지만, 어느 순간, 특히 그가 성적으로 흥분해 있을 때, 사정에 임박해가는 그런 순간에 저에게 프렙을 중단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프렙 안 할거지?” 저는 즉시 그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파란색 알약이 마치 벽처럼 느껴져 슬퍼졌습니다. 아니 오히려 파란 알약은 그 벽을 부수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모든 사람이 약을 먹는 날이 오더라도 저처럼 약을 성실히 먹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과 ‘괜찮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나뉘어 있을 것입니다.


“다른 분들이 어떨지 모르겠는데–저는 하루 한 알 먹는게 어렵더라구요. 이거 지키기가 너무 어려워요.” 프렙 토크쇼에서 다른 프렙 이용자의 저 말을 듣지 않았다면, 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약을 꼬박꼬박 먹어야 성립되는 요법에 대해, 오히려 약을 먹지 않는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무 가치 없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러한 생각이 나만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으로 프렙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혹은 ‘U=U’라는 구호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때 죽음의 병이라고 불렸던 질병이 관리 가능할 뿐 아니라 타인에게 전염도 되지 않는 병이 될 때까지, 눈부신 의학적 발전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비해 충분히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 또한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바이러스 수치를 미검출 수준으로 떨어뜨리기 위한 감염인 당사자들의 매일의 노력과, 프렙을 복용하는, 아마도 당사자들의 가장 가까운 주변인일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의 매일의 노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성실히 약을 먹을 수 없는, ‘U=U’에 대하여 거리감을 느끼는 감염인 당사자들의 존재 또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벽은 무엇일까요? 제가 처음에 프렙을 한다고 주변의 비감염인 친구들에 알렸을 때, 저의 문란한 성생활을 알고 있는 친구들은 너는 그럴 만하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에게 프렙을 권했을 때에도, 그들은 나는 너처럼 성적으로 활발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가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문란함’ 이라는 벽이 있는 것입니다. 어제 번개한 사람이 누구랑 번개를 했는지 전혀 모르는 것은 그나 나나 피차 마찬가지인데도 말입니다. 내가 프렙 하는 것을 알고 있던 또다른 파트너는, 당시 저는 프렙을 성실히 하고 있지 않았음에도 “너는 프렙하니까 괜찮지?” 라며 안에 사정하고는 했습니다. 물론 저렇게 묻지 않았더라도 나는 안에 싸달라고 애원했겠지만, 저 말을 듣는 순간 그와 나 사이에 자리잡은 파란 약과 ‘문란함’이라는 벽의 존재를 한번 더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저는 프렙을 제2의 콘돔으로 여기는 사람들과 제 사이에 벽이 있다고 느낍니다. 그들은 콘돔을 끼는 것만으로는 불안하므로, 프렙을 복용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어쩌다 며칠, 알람에 맞춰성실히 트루바다를 입에 털어 넣을 때면, 제가 마치 그들을 따라하려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는 다른 건강하고 멋진 모든 사람들에게 느끼는 공통적인 감각이기도 합니다.


약 8개월간의 프렙 ‘안 하는’ 경험은 이 외에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많은 벽들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예컨대 간호사분이 제게 조심스럽게 제안하였던 트루바다를 담을 ‘검은 비닐봉지’나, 번개 상대에게 보이지 않도록 약통을 깊숙이 숨겨둔 저의 ‘찬장’ 같은 것들 말입니다. 어떤 벽들은 사회적입니다. 누군가 장애는 사회적인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사람과 사람을 구분 짓는 위계나 차별, 혐오 같은 것들을 다 함께 없앨 수 있고 없애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 장애는 휠체어가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경사진 길이나, 점자로 된 책 같은 것이 아닌, 두 다리와 두 눈의 부재 자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누군가 프렙의 효과를 말할 때, ‘U=U’라는 구호의 힘을 말할 때, 누군가는 그저 앞으로 평생 매일 약을 먹어야만 하는 의무감의 무게를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들이 말하지 않고 또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마땅히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옳고 정당한 것들의 존재 자체가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벽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벽 너머의 것들은, 말해지지 않은 채 버려지기 너무도 쉽기 때문입니다.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말 자체가 벽이 되지 않기 위해 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누구에게 어떤 것이 벽으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늘 프렙먹었나요?’ 저에게 이 질문이 예, 아니오 보다 훨씬 더 많은 대답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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