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조와 체념에서 당신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 – 지금 한국의 PL* 작가들
*PL은 ‘People living with HIV’의 약자로, HIV 감염인을 부르는 다른 말입니다.
남웅
바이러스 미검출 시대의 예술
일본 교토에서 활동했던 퍼포먼스그룹 ‘덤 타입’의 초기 리더이자 HIV/AIDS활동가이기도 했던 테이지 후루하시(1960–1995)는 1992년 자신의 감염사실을 알리며 친구와 동료들에게 ‘바이러스와 함께 하는 삶’을 제목으로 편지를 띄운다. 그는 한 두 사람에게 공들여 이야기하기보다 공정하게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으로서 편지를 고안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말한다. “만약 몇몇의 세포가 내 살을 보호한다면, 창조성과 사랑은 내 마음을 보호한다. 세포가 바이러스를 견디는 것처럼 상상력과 사랑은 모든 사람을 견딜 수 있게 해줄 것이라 믿고 싶다.” 그에게 바이러스는 몸을 언제라도 잠식하고 파괴할 수 있는 존재였다. 사랑과 예술 창작의 가치는 바이러스에 적대하면서 (좀 더 시적으로 말하자면) 잔인한 삶을 견딜 수 있는 동기로 의미부여 된다. 여기에는 바이러스가 몸을 침입하는 강력한 존재라는 단선적인 의미 외에도 질병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감염인을 향한 낙인을 암시할 터. 물론 여기에는 95년 미국 FDA가 인가한 고활성 항레트로바이러스 요법(HAART, highly active antiretroviral therapy), 소위 ‘칵테일요법’이 개발되기 전의 상황으로, 치료를 통해 바이러스 수치를 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지금과는 다르다.
하지만 관리 가능한 오늘의 현실에도 질병을 둘러싼 도덕적 평가와 거절의 이유로 작동하는 상황들이 산재한다. 그것이 잘못된 지식과 편견에 바탕 한 것임을 알리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이전과 다른 톤과 매너로 사회에 자국을 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질문을 떠올린다. 감염인의 미적 실천은 단지 바이러스를 견디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을까.
근래에 이르러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염사실을 알려온 한국의 작가들이 있다. 주지할 점은 감염인 ‘작가들’이라는 복수형 서술에 있다. (노파심에 새삼 말하지만 PL 작가들이 이들만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설령 감염사실이 관계의 기대와 일상의 활동들을 제한한다 할지라도 이들은 어느 정도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환경 위에 있다. 이는 또한 감염인으로서 동료를 만들고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있음을 환기한다. 개인의 용단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용기를 실천하기 위해 질병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차별의 굴레와 싸워온 HIV/AIDS인권운동의 역할이 컸음은 두말의 여지가 없다.
이들에게 예술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장치라고 한다면, 전시는 또한 자신의 언어를 보이고 제 공간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HIV는 내 몸을 재편하지만, 타인을 만날 수 있는 매개로도 전환할 수 있는 것이다.
만남과 초대의 장치로서 전시
최장원, 《HIV 감염 7주년 축하 RSVP》, 탈영역우정국, 2021.8.14.-8.30. 전시전경 ⓒ최장원. (그의 작업 이미지는 작가가 공지한 링크를 통해 좀 더 많이 살펴볼 수 있다. 링크: https://photos.app.goo.gl/B3yN8CFoWsozx7vs8 )
올해 최장원은 HIV감염 7주년을 주제로 개인전 《HIV 감염 7주년 축하 RSVP》(탈영역우정국, 2021.8.14-8.30. 이하 ‘RSVP’)를 진행했다. 상대의 화답을 구하는 불어 문장 ‘Répondez s’il vous plaît‘의 약어 ’RSVP‘(탈영역우정국)를 제목으로 삼은 데에는 그가 초대 자체에 방점을 찍어 제 감염을 기념하는 의례로 전시를 배치하고 있음을 환기한다.
그는 전시공간을 연회장으로 연출하고 테이블과 의자들을 배치한다. 각각의 테이블마다 구슬과 액세서리, 레진으로 만든 케이크로 장식한다. 전시기간동안에는 사람들에게 요청한 축하 음성 메시지들이 테이블마다 재생된다. 전시장은 녹음된 축하인사들이 웅성거린다.
그간 최장원은 유리를 깨고 표면에 이름과 얼굴을 남기는 작업을 이어왔다. 깨진 유리에 이름과 얼굴을 적어 한데 모아 전시하는 작업은 날 선 이름들의 군집과 연결을 이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반짝이지만 버려진 유리는 훼손된 상태인 경우가 많다. 특성상 장식적 효과를 내는 동시에 다루기 까다로운 속성은 최장원에게 감염 이후 다시 이어내기 어려운 시간을, 때로는 깨지고 상처 입지만 부서진 채 타인을 경계하는 유리의 성격을 손상된 몸의 시공으로 동기화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그것이 새로운 시도는 아니다. 유리의 재료적 특성만을 부각하여 이야기한다면 사회적 소수자의 방어적 공격성과 그 이면에 타인에 대한 애착과 갈망을 갈구한다는 식의 투명하리만큼 익숙한 기갈 진 스토리로 삼켜지기 쉬울 것이기에.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유리와 사회적 소수자를 포개는 전형적 해석을 미끄러져 나가는가.
2019년 개인전 《혈관벽》(사이아트센터, 2019.8.13.-8.18)에서 그는 투명한 유리와 PVC를 장식적으로 배치하고 금속 체인으로 엮어 벽에 걸고 전시장 중간에 쇼룸처럼 테이블을 설치한다. 아마도 혈관을 은유하여 배치했을 투명한 재질의 소재들은 타인을 향해 제 속을 드러내겠다는 포석으로 보일 수 있지만, 여전히 깨진 유리의 물성을 부각하며 상처 입고 날 선 방어적 면모를,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경계를 놓지 않는다.
대면과 접속을 제안하는 방법은 생각만큼 매끄럽지 않다. 장식보다 중요한 건 그가 전시기간 내내 상주할 것임을 공지하면서 갤러리를 응접실로 활용하는 점이었다. ‘혈관벽’으로 명명한 전시 공간은 그 자체로 감염인 당사자로서 작가의 존재를 공간으로 체화한 셈이다. 전시장에 상주하는 동안 그는 손님을 맞고 대화 나누며 자신이 만든 깨진 유리 모양의 사탕을 건넨다. 어느 정도 준비된 자리일지라도 대면은 다소 간의 긴장과 어색함을 피할 수 없다. 이는 다분히 작가가 대중을 초대하지만 모두에게 같은 환대를 보내기는 쉽지 않음을, 외려 친밀함의 순번을 재확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도록 한다. 역시나 유리는 투명하지만 날을 세우기에 보는 것만을 허락할 뿐, 접근을 호락호락하게 허가하지 않는 벽이자 울타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 그가 직접 제조한 사탕이 건네진다. 사탕의 소재는 어렵지 않게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작업을 연상케 한다. 비교 가능하다면 이렇게도 접근할 수 있다. 곤잘레스-토레스의 사탕이 부재하는 몸의 무게만큼 떠난 연인의 지표로 작동하며 기억과 애도에 방점을 찍는다면, 〈삼키세요〉, 〈Balthasar〉(비고: 예수에게 몰약을 전한 동방박사의 이름이다), 보통은 ‘멘탈캔디’ 라고 부르는 최장원의 이소말트 사탕은 빨고 삼켜 흡수하는 과정에 전염의 뉘앙스를 취하는 기존의 의미를 공유하면서도 직접 방문자에게 건넨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파란 예각의 사탕을 조심스럽게 입안에 굴릴 것을 요청하면서 작가는 공간에 ‘침투’한 타인에게 환대와 주의를 표시한다. 그것은 자신이 주조한 사탕을 먹이는 행위를 통해 전염의 원리를 예방요법과 치료약의 원리로 바꿔낸다. 이는 생을 지속할 수 있는 감염인의 위치에서 관계를 주도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업데이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 최장원은 타인과의 거리를 조율하고 조우할 수 있는 방법을 작업으로 고안해온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하여 전시공간은 만남을 위한 장치로 기능을 재차 갱신한다. 《RSVP》전시는 거리두기의 상황 속에 초대와 예약의 방식을 적절히 안배했다. 전시장에 울리는 69개의 축하인사는 준비기간 동안 그가 지인과 대중에게 요청하고 수집한 것으로서, 코로나19 락다운 상황에 만남이 부재하는 여건 속에 조우의 양식을 구축한 것이기도 하다. 전시기간 동안 그는 7주년 기념식을 진행하지만, 대다수 관객은 행사 밖의 시간동안 전시장에 방문했을 것이다. 전시기간동안 응원의 인사가 끝없이 울리지만. 실체 없이 떠다니는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각자 예약을 거쳐 전시장에 방문하고 나서야 군중의 백색소음으로 상쇄되다시피 한 제 목소리를 맞이한다. 물론 관객들 중에는 목소리마저 남기지 않은 이들이 더 많을 것인데, 이들은 제 것이 아닌 소음 속에 파티의 시간 바깥을 배회하게 될 텐데, 작가는 되는 대로 방문객을 리스트에 각인하며 또 한 번 이름을 새긴다.
기념일과 전시를 접목한 형태로 타인을 초대하는 방식은, 질병과 감염을 둘러싼 부정적 뉘앙스를 걷어낸 여백의 자리에 오랜 체념에 상응하는 수고의 인사 대신 축하를 전하며 잘 살아내자는 쾌활한 결의를 통해 내일을 살아갈 여건을 확보한다. 감염을 기념하는 것이 왜 축하로 연결되는가를 묻는 이는 없었다고 하지만, (그만큼 관객들은 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전시를 찾았을 테지만,) 그럼에도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작가는 어째서 그것이 축하받을 수 없는 것인가를 되묻는다. 다시 말해 질병에 대한 부정성을 하나하나 공들여 바꿔내기보다 축하의 도약으로 조금은 과감하고 뻔뻔하게 직시하는 셈이다. 그렇게 최장원은 자신의 감염 사실이 초래하는 관계의 체념과 피로의 상황을 비틀어 사회적 재난의 상황에서 관계의 조건을 살피고 초대로서 관계의 방식을 직조하며 기어이 인사를 받아낸다. 그것이 특정한 전시와 행사를 바탕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사건’으로서 만남을 고안해왔다면, 이후에는 특정한 이벤트로 국한하지 않으며 수다한 일상을 나누고 개입하면서도 긴장과 친밀함을 오가는 관계로, 친밀한 타인들 간의 관계를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가 과제로 남지 않을까. 그것을 우리는 ‘커뮤니티’로, ‘공동체’로 불렀던 것 같다.
자기 없는 서사
이정식은 사물과 타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무대와 영상을 제작하고 전시를 기획하며 에세이와 소설을 쓴다. 자신이 써온 이야기마다 이정식은 중심에 있지만 더러는 타인의 목소리를 빌려 이야기하거나 타인의 이야기를 제 문장으로 다시 쓴다.
그는 자신의 몸을 사물에 빗대왔다. 제 몸을 종이에 비유하여 스스로 찢어내는가 하면(〈그 책〉(2017)), 제 두상을 3D프린팅으로 복제한다(〈이정식11〉(2020)). 몸을 지각하는 일상은 복약시간을 기록하며 시간의 질서를 재편하고 약을 복용하지 않은 시간을 공백으로 방치한다. ‘납작함’과 ‘탈실체화’가 전형적인 키워드로 반복 등장하는 미술에 그는 바이러스의 몸, 손상된 몸을 개입한다.
복약시간에 갇힌 몸, 사물이 되어버린 몸, 그렇게 스스로 비유한 사물들을 파괴하는 몸을 상연해온 작가는 예의 관점으로 다른 이들을 향한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아픈 몸 뿐 아니라 질병 자체가 사회적 상처로 돌아와 버린 몸, 그것이 더러 몸을 훼손하고 생을 박탈하는 폭력의 대상이 되어버린 몸, 사건의 점으로 잊혀져버린 몸, 이미 구멍이 되고 사물처럼 폐기되다시피 한 몸들을 포함한다. 이른바 구멍으로서 몸들을 엮는 기록은 사회적 삶의 무게가 어떻게 희박해지는가를 그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서사가 망가지는 환경과 그 안에서 몸이 어떤 지표를 갖고 살 수 있는지 살피는 작업들은, 부서지는 몸에 대한 묘사를 바탕하고 부서지고 손상된 몸들이 다시금 스스로를 돌아보고 냄새를 맡으며 타인과의 신경적 교감을 잇는 섬세한 문장들로 이어진다.
그는 상실과 박탈의 정조를 견지하면서도 삶 자체를 아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정식은 그 속에서 부정성의 삶을 살아가는 생의 호흡들에 귀 기울인다. 이는 부정태의 문법으로 사랑의 문장을 쓸 수 있는지 탐색하는 작업으로 나아가며 삶의 구체적인 지층을, 복잡한 감정과 관계를 생각해야 함을 환기한다.
2018년의 전시《김무명 faceless》(구석으로부터, 2018.9.1.-9.20))에서 그는 요양병원에서 원하는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세상을 떠난 ‘김무명’씨 이야기에 착안한다. 자신의 이름조차 드러내지 못하는 이들의 삶을 채록하기 위해 그는 다른 감염인을 수소문하여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문장으로 가공한다. 여기에 이정식은 인터뷰 대상자들에게 선물을 요청하여 사진으로 남기고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를 필사하도록 요청한다. 자신을 드러내길 거부하는 이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더니 선물을 요청하고 이제 이들의 이야기를 또 다른 이들에게 필사할 것을 요구하는 고유의 ‘뻔뻔한’(?) 붙임성은 기실 탈가정 청소년으로, 병역거부자로, HIV감염인으로 홀로 살아낼 수 없음을 체득한 이의 생존법을 연상시킨다. 타인이 살아온 이야기를 자신의 작업에 포개는 이정식은 자기서사를 주축으로 삼으면서도 그것이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환기한다.
자신을 드러낼 수 없어 이야기와 사물로 자신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나아가 이정식은 그조차 자기 문체로 바꾸고 사진으로 가공하여 이야기와 사물의 실존성을 증발시킨다. 그는 비어 있는 몸들의 서사를 가벼워진 만큼 공동의 서사로 연결 지으며 소설과 에세이로, 출판물과 영상으로, 전시로 제작·유통한다.
부정적 현실을 대상이 되어버린 제 모습으로, 자의식 어린 문장과 사물들로 대체하는 작업은 잔인한 현실로부터 주도력을 확보하며 가공하고 번역할 수 있는 태도를 체득케 한다. 타인과의 접점을 계속해서 찾아나가는 작업은 작가가 살아온 궤적을 살피는 동시에, 불화해온 제 어미와 가난과 손상을 통과해온 이들의 생애를 훑으며 그 궤적을 자신과 포개는 시도로 이어진다. 스스로를 혐오하기 쉬운 환경으로부터 그는 타국에서 희생된 트랜스젠더 HIV감염인 친구 이야기를 꺼내고, 엄마와의 지독한 가족사를 이야기하며, 군유가족의 경험을 잇는다. 올해 출간한 에세이집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김무명들이 남긴 생의 흔적』(글항아리) 은 타인의 시점을 빌려 자신을 이야기하고, 자신을 이야기하기 위해 타인의 시점을 빌리며 이를 위해 타인이 살아온 굴곡을 체화한다.
그런 점에 이정식의 서사는 자조적일 수 있지만 자기 폐쇄성을 지양한다. 자기중심적 재현을 견지하지만 앙상한 중심을 잡기 위해 타인을 호출하고 타인의 관점을 개입시킴으로써 개인의 정체성으로 함몰하지 않는다. 최장원이 타인을 호출하는 방식을 고안하기 위해 자신을 노출하고 만남의 집단적 방식을 무대화한다면, 이정식은 만남의 세부를, 말하자면 만남 속에 관점들이 어떻게 이동하는지, 삶이 이리저리 흐르다가 조우하고 다시 헤어지는 양상들을 살피기 위해 스스로를 헤집는다. 사회적 타자의 당사자성이 함의하는 자기재현이 빠지기 쉬운 일말의 수세적 특권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는 발화자뿐 아니라 청자이자 기록자, 관찰자로 제 관점을 넓혀냄으로써 자기 비평성을 확보한다.
여기에 덧붙여햐 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2020년 개인전 《이정식》(d/p, 2020.10.13.-11.14.)에 유독 언급되는 ‘메종 마르지엘라11’이 아닐까. ‘11’은 해당 브랜드의 성별 구분 없이 착용 가능한 액세서리 넘버링으로 이정식이 작업을 하면서 참조하는 숫자이기도 하다. (가령 〈이정식11〉은 11개의 두상으로 구성된다.) 가십으로 소비되고 소문 속에 망각되는 증발된 삶의 무게를 빗댄 숫자를 취하는 태도는 차라리 소비의 논리에 제 몸을 체화하겠다는 역전의 한 수처럼 보인다. 오염되고 공백이 되다시피 한 제 삶을 살피면서도 마르지엘라 액세서리를 찾고 몸의 향취를 섬세하게 감각하는 태도는, 껍데기만 남은 삶, 장식이 되어버린 삶의 위상으로 포개어진다. 여기에 소비와 존엄을 쉽게 대치시키기 곤란한 실존의 지점이 놓이는데, 손상과 장식이 포개어진 지점에 그는 자조적인 유머와 상냥함을 한 스푼 집어넣는 듯하다. 예의 처세가 오늘의 생존에서 확보하기 어려운 품위의 보루가 될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지만, 관점의 세공은 감각적 장식성과 신체적 빈곤의 층위를 서로 간 공명한다.
체념에서 피어난 사랑의 이야기
2020년 개인전 《그때 벨이 울리지 않았다면》(ROOM806-2, 2020.11.5.-11.21.)에서 김재원은 HIV감염을 연상시키는 뉘앙스 가득한 시각적 코드들을 노출한다. 일테면 모텔 방으로 연출한 전시공간에 하얀 약통을 기둥처럼 쌓는다. 일부 관객들이 비아그라 약으로 오인했던 약품은 그가 복용하는 치료제 통이다. 그는 자신의 감염사실을 선언처럼 알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애써 숨기지도 않는다.
을지로 세운청계상가에 위치한 작업실을 활용한 전시 공간은 한시적 사랑의 장소인 모텔의 객실처럼 연출되었고, 전시에 배치된 사진과 젖은 수건, 조명 등은 K-모텔의 의미 없는 장식적 속성들로 배치된다. 관객들은 전시장에 입실하여 매트리스에 앉아 영상을 본다.
〈지난날의 구토〉(2020)는 H가 J에게 보낸 편지를 기반으로 재생된다. 바람에 리본이 나부끼고 너울거리는 수면이 화면에 포개어지는 가운데 멀리 갈매기가 날아간다. 의미를 포착할 수 없는 장면을 포커싱하고 화면과 화면을 층층이 포개는 장면 위에 회환 젖은 이의 문장이 재생된다. 8년 전을 회고하는 내레이션은 시종일관 당신의 곁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당신과 함께할 것을 약속한다. 곁에 있음에도 안부를 전하지 못한 이에게 띄운 편지는 지금도 자신을 미워하는지, 8년 전으로 돌아가면 자신을 만나지 않을 건지 옅은 투정이 섞인 그리움의 문장을 이어간다.
〈구속의 섬, 낙원의 섬〉(2020)은 매트리스에 헬륨 풍선들이 매달리고 사라지는 장면이 재생되는 가운데 역시 내레이션이 등장한다. 온기를 나누기 위해 섬을 찾아다니지만 장소에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다. 브란스(Verance) 섬의 경험을 들려주는 이는 얼룩을 가졌다는 이유로 자신이 환대받지 못한 경험을 이야기 한다. 섬의 이름이 특정 병원 이름(*브란스)을 비튼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그가 섬을 전전했다는 기록은 보는 이로 하여금 병원과 모텔의 공간을 다시 배회와 여행의 궤적으로 포갤 수 있다. 그리고 약통기둥들은 사랑에 연루된 질병의 상황을, 관계를 체념케 하고 스스로 고립을 택하게 만드는 아픔과 손상의 상황을 강렬하게 상기시킨다.
영상은 친절한 설명 없이 회고의 다발로 구성되어 단번에 이해하기 어렵다. 문자텍스트가 뼈대를 이루는 가운데 영상이 부수적인 장치처럼 보이지만, 그마저 단서로 주어진 문장들은 무심하게 수수께끼 같은 상황만을 산개한다. 두서없이 벽에 붙은 사진처럼, 부빌 수 있는 살들을 찾아 방을 전전하는 이처럼 의도적으로 구멍들을 남기는 텍스트는 이야기를 품되 직접적인 정황을 알리지 않는다. 단서라고 한다면 H는 J에게 아픔을 줬고, 그럼에도 이들은 ‘브란스’섬을 찾아다니며 온기를 나누고 있음을 가늠할 따름이다. 상황들은 있되 서사는 고르지 않다. 차라리 서사는 고르지 않은 상황 위에 흘러 다니는 궤적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시장에 배치된 젖은 수건걸이와 위생키트, 매트리스와 어지럽혀진 침구가 그나마 영상 속 그가 겪었던 섬이자 병실이자 모텔이자 편지가 상정하는 공간의 대기와 습도를 환기시켜준다.
수수께끼로 남은 그의 작업은 올해 열린 개인전 《로맨틱 판타지_Romantic Fantasy》(공간 사일삼, 2021.9.3.-9.25.)로 이어진다. 전시에는 다시 H와 J가 등장하며 지난 전시가 운을 띄웠던 수수께끼 같은 문장들에 호응한다. 지난 전시공간이 객실과 병실을 강렬하게 상기한다면, 이번 전시에는 세브란스 병원을 가는 길목의 풍경과 화초와 핸드폰, 침대 사진에 이르는 이미지를 해상도와 사이즈를 달리하여 배치한다. 이들은 액자로 표구되어 걸리는가 하면 두께 없는 시트지로 벽에 부착되어 있다. 굴곡진 전시 공간에 일관성을 찾기 어려운 이미지들이 이리저리 배치된 모습은 모텔과 같은 장소적 매듭과는 달리 납작한 이미지들이 산개한 장소의 인상을 준다.
〈뱉는 일과 삼키는 일〉(2021)은 지난 해 제작된 〈지난날의 구토〉에 대한 응답의 형태로 H가 수신자가 된다. 지난 영상에 등장한 갈매기는 갈매기 모양의 비닐풍선으로 실끈에 연결되어 둥둥 떠다니는가 하면, 너울진 물의 패턴은 풍선을 들고 거니는 해안가 풍경으로 변주한다. 앞서 H가 시종일관 J를 기다리고 바라보는 뉘앙스로 문장을 건넸다면, J는 당신의 마음을 확인하고 곁에 있어왔다는 따뜻한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종종 거리를 두자는 여운을 남기며 변칙적인 대구로 응한다. 둘 사이 무슨 일이 있던 것인가.
관객들은 서로의 삶에 나눈 온기가 개입과 아릿한 상처를 품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햇수를 세면서까지 과거를 기억하고 때론 기념하는 것처럼 보이는 태도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상황에 서로의 의미를 돌아보는 미열 같은 관계를 연상케 한다. 구체적인 정황을 애써 누락한 서술은 해석의 갈래를 만든다. 서로 간 거리를 두며 친밀한 관계를 이어온 오랜 관계를 떠올릴 수 있지만, 감염된 이가 바이러스 수치를 더 이상 크게 유념하지 않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주어의 빈자리에 바이러스를 집어넣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희미해져가지만 당장 사라지지도 않는 바이러스를 과거의 연인으로 상정하여 연애편지를 주고받는다. 분노와 슬픔보다는 애증과 체념이 짙어지지만, 작가는 부정적인 여건에도 공존을 위한 친밀한 거리를 상정한다.
체념 속에도 포기하거나 적대하지 않으며 어느 정도 막역한 관계를 설정해내는 태도는 질병과 노화, 빈곤과 사회적 소수자라는 연안에 발을 담근 이들이 갖게 된 오늘의 감수성은 아닐까. 가령 박상영의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창비, 2019,)에서 화자는 ‘내게 닥친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가장 먼저 내가 가장 잘하는 일’로 제 몸에 깃든 바이러스에 ‘카일리’라는 이름을 붙인다. - “어차피 이것이랑 죽을 때까지 함께해야 할 판인데 나 듣기에 제일 예쁜 이름을 붙여주는 게 낫겠다 싶어서, 카일리.”(193쪽.) 회한이거나 체념일 수 있고, 원망을 무시하기 어렵다면 차라리 재난 같은 사건에 친근한 이름을 붙이고 친밀함의 거리를 유지하는 태도가, 지금 바이러스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생존법은 아닌가 말이다.
자조의 품에 안겨 자조를 관통한다는 것
이를 두고 그저 자기 방어적 처신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기 고백적이고 더러는 자조적 유혹을 피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온전히 고립되지 않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건넨다. 사랑하는 이들이 있고 사랑했던 이가 있으며 앞으로 사랑할 이들이 있어야 할 게이커뮤니티에서 HIV에 감염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관계를 막고 있다면, 관계성에 집중하는 이들에게 예술의 형식은 구구절절 자신을 호소하고 스스로를 벽장에 고립시켜 침잠하기보다 주도적으로 위험과 취약함을 제 언어로 소화시킨다. 그렇게 제 서사의 문법 아래 문장을 써나갈 근력을 키워나가고, 만남의 형식과 의미를 수정하고 고안하며 타인에게 사랑의 신호를 보낼 수 있는 통렬한 동기를 확보한다. 누구보다 편견과 부정적 뉘앙스로 착색된 색안경에 필터링 되고 단편적인 프레임에 자신을 투사당하는 상황에서, 전시의 형식과 관점은 감염인으로서 자기 몸을 다시 정의하고 관계를 다시 살피는 시도들로 맞물린다.
자기 연민과 방어적 태도를 견지하는 작업들은, 이미 타인을 기다리고 그의 반응에 촉을 세우고 있음을 전제한다. 다시 말해 자기 보위의 태도는 애초에 자신이 타인에게 개입당할 수 있음을 상정한다. 개인 서사에서 출발하는 작업들은 자기 파괴와 박탈의 지점에서 타인과의 관계까지 모색하는 기술을 누구보다 근본적으로 펼친다. 그것은 올해 번역 출간된 더글라스 크림프의 『애도와 투쟁』(김수연 역, 현실문화, 2021.)이 강조하는 주장 ‘문란함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문장에 영감을 받아 영국의 더 케어 컬렉티브가 『돌봄선언-상호의존의 정치학』(정소영 역, 니케북스, 2021.)에서 ‘급진적 돌봄의 실천’으로 갱신하는 지점으로 연결된다. 이미 많은 이들이 위의 통찰을 발견했듯, 문란함과 상호 돌봄의 관계는 자생적 울타리로부터 돌봄이 종적 차이와 제도의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는 사회적 변화와 관계의 성찰을 요구한다. 기존 관계의 질서에 온전히 예속하고 동일시하기 어려운 위치에서 새삼 관계를 탐구하는 작업은, 생존을 모색하는 방식인 동시에 시행착오의 관계와 스킨십의 미끄러지는 지점에서 건강과 정상성의 체제로부터 반역을 꿈꾸며, 동시에 소소한 쾌락과 즐거움을 확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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