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나 성소수자는 존재합니다. 당연히 다양한 일터에도 성소수자는 존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성소수자 동료가 있는지 묻는다면 대부분 없다고 답할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많은 성소수자 노동자가 혐오와 차별을 피해 일터에선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성소수자 노동권팀은 막연한 상상 속에 가려진 성소수자 노동자의 삶을 생생한 언어로 기록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번 기고는 현재를 살아가는 성소수자 노동자의 삶을 드러내기 위해 기획됐고, <노동과세계>에 게재됩니다. 노동조합을 통해 현장을 바꾸고서야 비로서 나의 삶이 바뀌었듯, 모두를 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동자가 함께 나서야 일터도, 우리의 삶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이번 기고를 통해 일터에서 성소수자 노동자 곁에 함께하는 동료가 많아지길 희망합니다. |
김모드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성소수자노동권팀)
엔진은 30대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범성애자이며, 울산 성소수자 모임 ‘THIS WAY’에서 활동하다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 노동조합에서 상근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는 공공운수노조 경기지역본부 조직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사무처와 현장에서 만나는 동지들에게 매번 커밍아웃을 한다고 전해왔다.
순간 1. 노동조합에서 성소수자로 존재하기
엔진이 일하고 있는 공공운수노조는 사무처규정에 따라 동성혼에 대해서도 가족수당을 지급하며, 강령에는 성소수자를 강력하게 지지한다는 문구가 명시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사회운동에 관심이 있는 많은 성소수자들이 노조에서 상근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
“커밍아웃을 하는 게 저한테 지표로 작용해요. 커밍아웃했을 때 상대방의 반응을 살펴서 이 조직의 수준을 가늠하게 되는 거죠. (∙∙∙) 그들의 표정이나 반응을 보는 거죠. 성소수자를 수용한다고 해도 분명 단계가 존재하니까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래 우선 알겠어.’의 소극적인 반응인지, ‘그 정도는 우리에게 문제가 안 돼’라는 적극적인 수용인지.”
엔진은 일터에서 사무처 동료, 사업장 조합원 등 다양한 존재에게 커밍아웃한다. 2019년엔 ‘누가 공공운수노조 홈페이지를 보겠어'라는 마음으로 공공운수노조 LGBT(성소수자) 조합원 인터뷰에 참여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조합원이 인터뷰를 잘 봤다며 인사를 건넸다. 순간 엔진은 성소수자 조합원 인터뷰를 보고 불편해 할 수도 있을 다른 조합원들을 생각했다. 특히, 엔진이 담당하는 사업장의 조합원이 엔진의 인터뷰를 보고 껄끄러운 감정을 느꼈다면, 나아가 해당 사업장과 관계가 틀어질 수 있는 심각한 문제라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진은 커밍아웃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용기들이 모여 조직을 더욱 성소수자 친화적이게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모인 메신저에 성소수자 혐오 발언이 올라왔었다. 그때 구성원들은 침묵하지 않았으며 성소수자 활동가만의 문제로도 남겨두지 않았다. 많은 활동가들의 문제 제기를 통해 해당 혐오 발언이 중대하게 다뤄졌고, 발화자에게 사과를 받을 수 있었다. 최근엔 공공운수노조에서 사무처 활동가 100여 명을 대상으로 의견 수렴 절차를 통해 활동 지원이 필요한 장애인, 트랜스젠더 혹은 젠더퀴어 당사자 혹은 성별이 다른 가족들이 편하게 이용 가능한 성중립/배리어프리 (무장애) 화장실을 설치했다. 활동명처럼 언제나 에너지 넘치는 활동을 하는 엔진이지만 모든 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엔진은 자신보다 먼저 노동조합에서 성소수자라는 존재를 드러낸 사람들을 보며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엔진과 이들의 용기가 일터와 세상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
순간 2. 노동조합에서 성소수자 운동하기
“지역에서 ‘퀴어 라이브 인 울산’을 진행했는데 현대자동차 노조에서 LED 자동차, 화물연대에서 긴 대형 트럭을 빌려서 울산을 돌아다녔던 기억이 나요. 행진 대오보다 화물연대 빌려주신 트럭이 더 길어서 골목길 돌 때 정말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노조의 물리적인 도움뿐 아니라, 정서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어요. 퀴어 운동은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운동의 측면이 있다 보니, 정신적인 건강을 오래 유지하기 쉽지 않아요. 노동조합 내 활동가들은 정말 존경스럽게 건강하시더라고요.”
성소수자 운동은 혐오발언을 코 앞에서 마주해야 하고, 동료와의 이별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오래 활동을 지속하는 활동가 수도 적다. 적은 수의 성소수자 활동가들이 쉼 없이 활동하다 보면 금세 지치기 마련이기도 하다. 운동의 흐름이 지속되기 어렵기도 하다. 그래서 성소수자 운동은 여러 면에서 지속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엔진은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노동조합 운동과 더불어 성소수자 운동을 할 수 있어 좋다고 한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동료도 많고 자원도 풍부해졌다. 지역에서 활동하던 때보다 정서적으로 더욱 안정되었다고 한다. 노동조합은 오래된 역사만큼 탄탄해서 조합의 소수 간부가 흔들려도 운동은 굴러간다. 이런 환경은 엔진에게 자신과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주었고, 과도한 책임감에 시달리지 않게 되어 마음 편하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활동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순간 3. 노동조합에서 동료 만나기
“다양한 관계, 다양한 성격,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성별의 조합원 동료들을 만나니까 제가 조금 다채로워지는 걸 느꼈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관계 형성이 안돼요. (...) 특히 조합원 동료들에게 많은 스트레스도 받지만, 동시에 제가 성장하는 동력이 돼요. 왜냐하면, 동료는 서로 신뢰도 하고 의지도 하지만,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하거든요. 일을 잘해야 된다는 거죠. 노동조합 역시도 조직이기 때문에 실무나 소통 능력이 되게 필요한데. 조합원 동료는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동료가 아니더라고요. 조합원은 저에게 선택지가 없는 동료여서 강제로 착해졌어요. (웃음) 말투도 좀 부드러워진 것 같아요.”
엔진은 일터에서 사무처 혹은 조합원 동료를 만난다. 두 동료의 특성은 조금 다르다. 공공운수노조 사무처는 민주노총의 성소수자의 권리를 지지한다는 기조를 따른다. 그러다 보니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을 들을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 활동 공간상 다양한 종류의 대중조직을 만나는 엔진은 성소수자에 친화적이지 않은 조합원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기에 엔진은 조합원 동료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스스로 조심한다. 과거 엔진이 현장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던 시절, 하루는 짧은 바지를 입고 선전전에 나갔다. 조합원 동료들이 쑥덕거리는 것을 알게 됐고, 그때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 조심하고 조절하는 노력을 했다. 노동조합 활동가가 힘 있게 활동하기 위해선 조합원 동료들의 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동료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다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엔진은 성소수자임을 밝히는 것에 타협하지 않는다. 복장과 행동은 노동조합을 위해 어느 정도의 조심성을 강제할 수 있지만, 자신의 정체성만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가며
엔진은 커밍아웃이 투쟁이 되지 않는 일터를 바란다. 커밍아웃은 많은 위험을 담보한다. 최악의 경우엔 노동자는 일터를 떠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성소수자들이 커밍아웃이라는 위험을 감수하려고 한다.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를 묻는 질문에 얼버무려야 되는 상황, 어디 문제가 있어 결혼을 하지 못한 거 아니냐는 무례한 질문, 괜찮은 사람이 있으니 소개해주겠다는 원치 않는 호의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엔진은 언젠가는 커밍아웃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일터를 꿈꾸며 오늘도 한차례 용기를 낸다.
* 이 글은 민주노총 기관지인 [노동과세계] 에도 공동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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