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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와 노동

[퀴어X투쟁] 누군가의 희망이 된다는 것 -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 투쟁을 지지하며

by 행성인 2022. 7. 25.

루카(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성소수자노동권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거제에 걸음을 옮겨본 일이 없다. 머나먼 섬, 대통령의 휴양지 '저도'가 있는 지역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언젠가 휴가철에 한 번 다녀와야지 생각하고 말았던 거제. 그런데 올해 7월에만 거제에 세 번이나 다녀왔다. 이유는 오직 하나.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를 만나기 위해.

 

고백하자면 거제가 서울에서 그렇게까지 멀리 있는 섬인지 알지 못했다. 차를 타도 대여섯 시간은 내달려야 겨우 가닿을 수 있는 섬에서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은 이어지고 있었다. 요구를 관철시켜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노동자 7명이 도크(dock)에 건조 중이던 원유운반선을 점거했고, 하청 노동조합 유최안 부지회장은 1제곱미터 남짓되는 철제 구조물에 스스로를 가뒀다. 경기 불황 때는 구조조정과 임금 삭감에 나서던 원청과 하청이 조선업 호황이라는 시기에 임금 원상 회복은 모르는 체 하기 바쁜 모습은 현장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살 수 없지 않느냐"는 짙은 절규가 옥포조선소를 가득 채운 이유다.

 

"삭감된 임금을 회복하고, 노동조합을 인정하라"는 당연하고 간결한 요구를 내걸고 계속된 파업은 날마다 높은 파도에 직면해야 했다. 하청업체는 원청업체 대우조선해양에게, 대우조선해양은 대주주 산업은행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급급했다. 문제 해결에 앞장서기보다 불안감을 조성하여 동료 노동자들을 구사대로 나서게 하는 일이 횡행하기도 했다. 생애 처음으로 거제를 방문했던 지난 7월 8일에는 정규직 노동자로 구성된 구사대가 몰려와 하청 노동자의 파업 투쟁 농성 천막을 폭력적으로 훼손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정부와 경찰은 하청 노동자만을 타깃으로 삼아 탄압에 나섰을 뿐, 원청업체와 하청업체는 물론, 구사대와 산업은행의 책임은 묻지 않았다. 원청업체는 대화를 해야 할 하청 노동자 대신 엉뚱한 국민을 상대로 각종 성명과 호소문을 발표하며 상황을 악화시켰다. 경찰은 협박에 가까운 체포영장을 연겨푸 신청했다. 끓는 배 위에서 극한의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을 생각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두고 볼 수 없었다.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 파업 투쟁 현장의 인권침해 상황에 대응하고, 투쟁의 인권적 의미를 알려내기 위한 활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저마다 일상적으로 벌이던 활동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인권활동가들이 하나둘 모였다. 지난 7월 8일, 인권활동가 다섯 명이 거제로 향했다. 그날은 파업 투쟁의 승리를 위한 결의대회가 열리는 날이기도 했다.

 

거제로 가는 길목에 있는 휴게소에 들를 때마다 노동조합 조끼를 입은 여러 사람을 만났다. 버스 전광판에는 전국 각지에 있는 노동조합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형형색색의 노동조합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그 버스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태어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섬으로 향하는 길, 동행하는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감동이고 위안이 되었다. "이렇게 살 수 없지 않느냐"는 절규에 응답하여 거제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조끼 입은 사람들'의 존재는 넉넉히 마음을 부풀게 만들었다. 

 

연대는 힘이 셌다. 옥포조선소 앞에 늘어선 집회 대오는 끝에서 끝으로 가기를 포기할 만큼 길었다. 집회가 끝이 나고서는 하청 노동조합에서 파업 투쟁에 관한 상황을 들었다. 이후 서울에서 긴급 보고서를 발표하기로 하고, 해가 지고 한참 지나서야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오니 어느덧 새벽 세 시였다. 집에 도착하면 금방 잠이 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잠이 오지 않았다. 내가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걱정과 부담이 컸던 모양이다. 다행히 같이 손과 마음을 보탠 인권활동가들이 분투한 덕분에 긴급 보고서는 발표회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다. 목소리를 보태준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들의 공이 가장 크겠지만 말이다.

 

긴급 보고서가 발표된 이후 단체협약이 체결되었다. 삭감된 임금을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노동조합의 이름으로 얻어낸 값진 합의서였다. 그 합의서를 얻기까지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공권력 투입을 운운하는 발언을 했을 때는 곧장 거제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려했다. 현장에 있던 노동자들의 심경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서울에서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그 시간을 함께 보냈다.

 

교섭이 타결된 다음 날, 희망버스를 타고 거제로 향했다. 교섭 타결 여부와 무관하게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다. 희망버스를 타고 거제로 가는 길, 버스에서는 보라색 색지를 나눠줬다. 전달할 종이배를 접기 위한 색지였다. 손재주가 없는 나는 옆에 앉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종이배 하나를 만들 수 있었다. 글귀를 적을 수 있도록 네임펜도 나눠주었는데, 무엇을 적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생겨났다. '어떤 글이 힘이 될까'로 시작된 생각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까지 헤엄쳐갔다. 결국 생각을 멈추고 거친 생각을 받아 적었다. "존엄한 노동,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들이 보여준 희망 / 이제, 우리가 여러분의 희망이 되겠습니다".

 

희망버스 2호차 무지개버스 안에서 자신이 접은 종이배를 들고 있는 루카. '존엄한 노동,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들이 보여준 희망/ 이제 우리가 여러분의 희망이 되겠습니다' 가 적혀 있다.

 

희망의 정의는 두 가지라고 한다. '어떤 일을 하거나 이루기를 바람', 그리고 '앞으로 잘 될 수 있는 가능성'.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들은 후자의 희망을 보여줬다. 이렇게 사는 것이 만고불변의 법칙이자 진리이며, 정답인 줄 알았던 조선소에서, 이렇게 살 수 없지 않느냐며 떨쳐 일어난 하청 노동자들. 일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존엄해야 하므로 지금 당장 존엄을 내놓으라는 그 요구 앞에서, 나는 희망을 찾았다. 성소수자 노동자로서 요구했던 존엄과 닮은 모양의 존엄. 그래서인지 나는 스스로 해야 할 몫의 희망은 전자의 희망이 아닐까 생각했다. 함께 이루기를 바라고, 그래서 함께 무언가를 하는 일. 그것이 내가 되어야 할 희망의 모습 아닐까.

 

그래서일까. 새벽부터 희망버스를 타고 거제에 모여든 사람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희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들이 보여준 희망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보여줄 것이라 믿어의심치 않는 희망에 대해 목소리 높여서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듣던 모두가 박수를 치고 함성을 질렀다. 희망을 담은 배를 모으고, 풍선을 불어 흔들고, 밥을 나누어 먹고,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희망으로 가득찬 거제 옥포조선소 서문 앞 풍경을 보며 나는 희망이 되기로 다짐했다.

 

파업은 끝이 났다. 파업에 참가한 150명의 조합원은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거제 옥포조선소 도크에는 바닷물이 다시 차올랐으며, 노동자의 절규를 품고 있던 30만 톤급 원유 운반선은 진수를 마쳤다. 언론은 "파업 종료와 함께 대우조선해양이 일상 복귀 수순에 접어들고 있다"는 문장을 쓰고 있다. 그러나 단언한다. 대우조선해양은 파업 종료 이전의 일상으로는 결코 복귀할 수 없다고 말이다.

 

'이렇게 살 수 없어서' 한 파업이다. 10년을 일해도, 20년을 일해도 최저임금에 불과한 급여를 받아도 불합리하다 한 마디 하지 않는 일상을 계속 살 것이었다면 노동조합을 만드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산재를 당해도 블랙리스트에 오를까 두려워 자비로 병원에 가야 하고, 일을 하기 위해 고된 노동에 지친 몸을 일으켜 보험도 안 되는 약을 먹고 치료를 해야 하는 일상을 계속 살 것이었다면 도크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파업 종료 이전의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대우조선해양은  파업 종료 이전의 일상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다. 돌아가서도 안 된다. 파업이 끝나도 투쟁은 끝나지 않는 이유다. 노동조합은 그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한 투쟁을 계속 이어갈 것이다. 임금 삭감 이전 수준 임금을 되찾기 위해 투쟁할 것이고, 안전하고 존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해 투쟁할 것이다.

 

사진출처: <노동과 세계> 백승호 기자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파업을 마치고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조합이 발표한 성명서의 마지막 문장. 그 문장을 읽어내는 시선이 절로 무거워진다. 이들의 선언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과제는 크고 넓다. 살라는 대로 살아지는 대로 사는 삶이 아닌, 살아 숨쉬며 기꺼이 살아내는 삶을 살겠다는 그들의 선언이 빛을 발하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희망버스 이후 한 차례 더 거제에 다녀왔다. 희망이 되기 위해서.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의 존엄을 위한 투쟁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 그 일이 앞으로 잘 될 수 있도록 하는 가능성을 꼭 만들어내고 싶어서. 긴급 보고서 발표에 참여했던 몇몇 인권활동가와 추가로 품을 내어준 인권활동가들이 모여 투쟁에 참여한 조합원들을 인터뷰하고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그 진심이 세상에 잘 전해진다면,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천진한 마음이다.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 파업이라는 희망이 한여름밤의 꿈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글을 읽게 될 여러분도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의 희망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누군가의 희망이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다. 곁과 품을 내어주는 일, 같이 듣고 말하고 싸우는 일. 무엇보다 같이 행복하는 일. 머나먼 섬 거제가 익숙해지기를 바라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같이 행복하려면, 같이 듣고 말하고 싸워야 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