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준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성소수자 노동권팀)
늦은 밤 주문한 물품을 이른 새벽 받아보는 일이 언제부터 가능했을까. 유통과 물류의 혁신처럼 여겨졌던 쿠팡의 ‘로켓배송’ 은 어느덧 유통·물류 업계의 필수 사업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즉 유통과 물류가 결합하면서 수요를 예측해 물류를 관리하고, 새벽배송, 익일배송, 신선식품 배송 등 소비자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배송 서비스를 전략적 무기로 삼는 이른바 ‘혁신’ 물류기업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1)
1) 박상빈, 「감염병의 시대, ‘혁신’ 물류산업이 작동하는 원리」, 『노동과 건강』 99호, 2021.
허나 ‘혁신’ 이라는 허울 좋은 수사 뒤에는 셀 수 없는 노동의 흔적이 숨겨져 있다. 어쩌면 ‘쿠팡’ 이라는 물류기업은 ‘혁신’ 이라는 포장지를 씌운 노동 착취의 굴레를 배송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어떤 노동자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볼모 삼은 협박성 발언을 중간 관리자로부터 들어야 했다. 어떤 노동자는 집단감염의 위험 속에서 쉬지 않고 노동을 해야 했다. 다른 노동자는 가중된 노동 아래, 구급차를 불러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답도 듣지 못하고 죽었다. 또 다른 노동자는 외주와 하청 논리 아래 죽었고, 죽음의 원인에 대해 누구도 답을 듣지 못했다. 모두 ‘혁신’ 기업 쿠팡에서 발생한 일이다. 정말 쿠팡의 ‘혁신’적 배송은 ‘로켓’을 타고 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몸이 포개어진 노동의 현장을 밟고 도착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의문은 위와 같은 사건을 대하는 쿠팡의 태도에 의해 더욱 명확해진다. 쿠팡은 노동자의 성정체성이 ‘아웃팅’ 된 폭력적 상황 속에서 피해자에게 ‘사건에 대해 발설하지 말라’고 말했다. 상부의 보고와 허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급히 구급차를 불러달라는 노동자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사망의 원인을 밝혀야 하는 상황에서는 자신들은 관여한 바가 없다며,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쿠팡은 노동하는 수많은 몸들을 지워버렸다. 쿠팡의 혁신은 켜켜이 포개어진 노동 현장을 밟고 선 채로 우리 앞에 등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노동하는 몸을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고, 오직 이윤을 창출해내는 ‘상품’ 으로 인식한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쿠팡의 ‘인식’ 이 왜 잘못되었는가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자신의 저서 「위대한 전환」 을 통해 상품이 아님에도 마치 상품인 양 시장에서 거래되는 세 요소로 노동력, 토지, 화폐를 언급했다. 허나 쿠팡은 노동력을 전적으로 상품화하는 물신주의적 사고에 기초해 이윤을 창출하고 있다. 즉 노동하는 몸을 지워냄으로써, 노동은 가치 창출을 위한 구성 요소일 뿐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노동자들이 노동 환경 속에서 처하는 위험은 ‘지극히도 당연하고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는 주장이 등장하고, 몸을 움직이며 이루어지는 노동은 하찮은 것이라 폄하하는 현실이 직조되고 있을 것이다.
허나 우리의 몸은, 다시 말해 노동하는 몸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지울 수 없는 노동의 역사가 곳곳에 새겨져 왔다. 쿠팡과 같은 기업이 직조해낸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타자화와 배제를 겪지만, 그럼에도 몸들은 지난한 시간을 새긴 채 버티며 서 있다. 그 몸을 움직이고, 상처입고, 그렇게 역사를 새겨 가며 이어지는 노동이 어찌 가치 없다고 폄하될 수 있겠는가.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자신의 저서 『불쉿잡』 을 통해, 신자유주의 시대가 지속되면서, 실제 가치를 창출하지 않고 무의미함에도, 매우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불쉿잡’ 이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 간호사, 쓰레기 수거 요원, 정비공 같은 직종이 만약 한순간에 사라진다면 그 영향은 즉각적이고 엄청난 재앙이 될 것이지만, 사모펀드 CEO 나 광고 조사원, 보험 설계사, 법률 컨설턴트 등이 몽땅 사라진다 해서 앞의 경우와 비슷하게 세상이 나빠질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다.2)
2) 데이비드 그레이버, 『불쉿잡』, 민음사 : 서울, 2021, 19쪽
과연 누구의 노동을 가치 없다고 할 수 있는가. ‘관리자’ 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노동을 관리하고 감시하는 자의 노동만큼 물건을 옮기고, 붙이고, 나르는 자의 노동을 가치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쿠팡을 존재케 한 노동의 가치만 놓고 본다면, 지금껏 폄하되고 지워져버린 몸들이 행하는 노동이 지금껏 대우받은 상황보다 더욱 가치 있는 노동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노동의 가치를 판단하는 자체가 문제적 상황이며, 그렇기에 가치 없음의 순위를 매기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또한 이와 같은 반박에 동의하며, 더 이상 상품으로서의 몸이 아닌 수많은 경험과 시간이 새겨진 몸을 상상해보자고 주장한다.
제한된 언어와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의 몸에 새겨진 노동의 역사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공공운수노조 쿠팡지부 및 쿠팡물류센터지회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들은 생활 임금 보장, 물류센터 냉·난방 설비 증설, 전임자 근로시간면제 보장 등 노동하는 몸을 위한 길을 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직장 내 괴롭힘 사례들을 세상에 공개함으로써, 더욱 안전한 노동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금도 노동하는 몸과 그 몸에 새겨진 수많은 역사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하는 마음들이 있다. SPC 의 부당한 행위에 대항하여 50일이 넘는 시간 동안 단식을 이어가는 임종린 지회장의 투쟁현장에,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지켜내기 위한 국회 앞 투쟁 현장에, 어떤 몸이든 간에 누려야 하는 기본권을 얻기 위한 지하철 승강장의 투쟁 현장에 함께하는 마음들이 있다. 이러한 마음이 모여 지키려 하는 노동의 장소와 노동하는 몸의 역사는 우리의 성 정체성 및 성적 지향과 별개의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몸을 지키기 위해, 다시 말해 우리의 노동 현장을 지켜 내기 위해, 이제 마음을 포갤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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