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진행 및 편집: 남웅
인터뷰이: 호림
성소수자로서 일한다는 것
웅: 저는 매년 기획하고 진행하는 아이다호 행진을 보면서 성소수자 운동단체뿐만 아니라 노조나 장애 운동, 빈곤이나 이주 단체들이 같이 지금을 살아가면서 싸우고 있는 다른 이들도 함께 행진하는 일이 많겠구나 하는 걸 그려볼 때가 있어요. 아이다호를 통해서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고요.
운동의 돌파구를 찾는 것이 제도의 문을 두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제도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서 우리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구조를 다시 그려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작업까지도 요청하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성소수자운동이 가져온 군형법상 추행죄나 HIV/AIDS 이슈, 성별정정 논의뿐만 아니라 생애주기의 대소사와 생활의 현장들도 살필 수 있는 활동의 욕구가 높아지고 더 구체적으로 모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면 성소수자 주거권이나 노년 퀴어 이슈가 부각하는 것 같고요. 그리고 또 노동권이 있죠.
최근 행성인에서 집중하는 의제 중 하나가 성소수자 노동권이잖아요. 이 단체가 어떻게 노동권에 주목을 하고 활동을 넓히고 있는가를 이야기해보면 좋겠어요.
호림: 행성인이라는 단체 정체성은 노동권에 있다고 생각해요. 밖에서는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행성인 안에서는 당연한 것처럼 인식하는 게 있는데요. 행성인이 만들어진 것도 노동법 개악 투쟁에 함께 하는 대학생들이 깃발을 들면서였잖아요.
그렇다 보니까 단체가 만들어진 초기부터 노동 관련 현안에 연대하거나 일하는 성소수자들의 노동권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는데요. 이런 일상적인 활동이 성소수자 노동권이라는 의제를 중심으로 한 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고민을 계속해온 것 같아요.
성소수자도 일하는 사람이다, 당신의 일터에도 성소수자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소수자 친화적인 일터, 성소수자들이 노동권을 존중받으면서 일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필요한데, 그걸 어떻게 만들 것인가, 구체적으로 무엇이 필요한가를 선명하게 제시하기 어려운 거죠. 그건 일터에서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드러내고 일하는 이들이 많지 않은 현실도 있고, 실제 성소수자들이 어떤 일을 하면서 일터에서 어떤 경험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국가 통계가 없기도 하고요.
여러 제약 속에서도 성소수자 노동권에 집중해서 투쟁 의제를 발굴하고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지점들을 찾아보자고 시작한 게 행성인의 노동권 기획 사업인 것 같습니다.
웅: 말씀하신 것 중에서 운동의 화두가 많이 나온 것 같아요. 통계로 세어지지 않고 제도적으로 보장받는 것이 별로 없는 상황, 무엇보다 성소수자가 굳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사람을 만나고 일상을 가져갈 수 있는 환경들, 그만큼 성소수자 당사자는 위계와 차별을 감수하고 침묵하는 편을 택하는 것이 맞겠죠. 성소수자로서 일상을 선택적으로, 조용히 가지고 살 수 있는 상황에서 운동을 조직하고 만들어가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커뮤니티도 예전처럼 성소수자 인권운동에 대한 ‘뽕’이라고 하는 일종의 기대효과가 지금은 어느 정도 다른 활동과 컨텐츠로 해소하고 대체할 수 있게 되었고, 운동의 이유를 계속 찾아가면서 운동을 만들어간다는 생각도 들고요. 다들 얼마만큼은 답답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그래도 운동으로 변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데, 기존 운동 방식이 아니어도 성소수자로 온전히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뭘까를 찾고 이야기를 발굴하고 일상을 구체화하는 작업이 지금 운동의 과제고 실제로도 하고 있는 활동들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래서 동성혼을 집중 투쟁 의제로 내면서 건강보험 부양자 같은 이슈를 만들고, 트랜스운동에 대한 조직을 고민하고, 노동권 의제를 찾아가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그럼에도 성소수자 노동권 운동은 동성혼이랑은 조금 다른 톤으로 다가오기도 해요. 동성혼은 나의 파트너십을 요구하는 일이 생존에 결부되고, 파트너의 죽음과 삶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의미 부여할 것인가에 대한 무제이기도 해서 당사자가 피할 수 없는 문제잖아요. 하지만 노동권 같은 경우는 결혼처럼 타인과 결속을 바탕하기보다 개인의 문제로 접근하기 쉬운 것 같아요. 그래서 직장에서 드러낸 사람들보다 드러내지 않고 다니는 사람들이 더 많고요. 아무래도 드러내는 경우보다 편한 지점이 분명히 있으니까.
행성인에서는 노동권을 이야기하는 활동들을 계속 이어왔던 것 같아요. 당장의 변화와 성과를 목표로 삼지 않더라도 일하는 성소수자가 있다는 걸 서로 알고 만나는 자리 같은 것들 말이죠. 일하는 성소수자 모임을 오랫동안 가져왔고, 그 안에서 인터뷰로 발전시키기도 했고요. 여기서는 적어도 자신들이 일을 하면서 왜 스스로를 숨길 수밖에 없는지, 자신을 드러내는 데 어떤 벽이 있는지 경험들을 나눴고, 새삼 지금 노동권활동에 참여하는 회원들의 상당수가 노조 활동하는 퀴어들인 상황에서 돌아보면 그런 시도들이 운동을 준비하기 위한 자조 모임의 성격이 강했다는 생각도 드네요.
지금의 노동권 사업은 이전의 활동이 가진 의미를 가져가면서도 이전 활동들의 한계를 인지하면서 발전적으로 기획된 새로운 스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요. 그래서 지금은 어떤 활동들을 하고 있는지 설명을 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호림: 작년에는 성소수자가 일터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을 마주하는지 전반적으로 톺아보는 토론회를 진행했어요. 올해는 성소수자 노동자들이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직장을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고민하고 있어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기반으로 한 일터에서의 차별과 괴롭힘의 문제인데요. 이것이 최근 몇 년간 많이 이야기되는 직장 내 괴롭힘 문제와 어떻게 연결이 될 수 있을지 알아보자고 해서 성소수자 노동자 집담회를 하고, 직장 내 괴롭힘 문제와 관련해서 활동하는 노동단체들과 간담회를 진행하고 있어요.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성소수자 노동권과 직장 내 괴롭힘 문제에 관한 토론회’를 계획하고 있고요. 올해의 활동을 바탕으로 성소수자 노동자들이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했을 때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 알리는 가이드북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웅: 지금의 활동들이 이전에 연대 차원에서 깃발 들고 가고 지지 방문 하고 연명을 하는 수준에서 좀 더 깊게 개입하고 걸음을 나아가는 방식이라는 인상도 주는데요 이렇게 운동을 심화해가면서 변화를 느끼는 것들이 있나요?
호림: 결국은 또 차별금지법으로 돌아온다는 느낌이 들어요.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자체가 직장 내 괴롭힘을 일터에서 지위 또는 관계의 우위를 이용해서 다른 노동자를 신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는데요. 그랬을 때, 사회적 소수자라는 이유로 직장 내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이 법적인 정의의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국 차별금지법이 너무 중요한 거죠. 직장 내 괴롭힘의 문제가 일터 내에서의 역학관계뿐만 아니라 내가 가진 다양한 사회적 지위와도 연관이 되는 이슈로 접근될 필요가 있는게 그러려면 결국 다시 차별금지법을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죠. 다시 돌고 돌아 차별금지법.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제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것과 관련된 구체적인 이야기가 필요하잖아요. 사회가 들어야 할 성소수자의 일터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진 것 같아요.
그동안 행성인에서는 일하는 성소수자 인터뷰 등을 통해서 이런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성소수자 노동자가 있다, 이들이 직장 내에서 성소수자라서 경험하는 여러 어려움이 있다는 걸 이야기해왔다면, 이제는 초점을 맞춰서 직장 내에서 어떤 방식, 어떤 수준으로든 성소수자임을 드러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실제 어떤 경험을 하고 있나,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이들의 이야기를 좀 집중해서 들어볼 기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올해 진행한 성소수자 노동자 집담회 할 때 트랜스 여성 참여자가 있었는데요. 이분은 직장을 다니면서 트랜지션을 했기 때문에 직장 내 모두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알릴 수밖에 없었단 말이죠. 이분의 이야기는 그동안 우리가 자주 들어보지 못했던 것들이 많았어요. 직장 동료들이 특별히 악의적인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성소수자를 만나본 경험이 별로 없고 성소수자 동료와 함께 일한다는 경험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동료들과 함께 직장을 다니며 겪는 어려움을 얘기해 주셨거든요. 저는 이런 이야기를 더 들어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해요.
웅: 그동안 행성인이 일궈온 성소수자 노동권 운동이 실질적인 실천으로 이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데요. 커밍아웃한 노동자를 어떻게 찾아 만나고 들을 수 있을까가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으로는 직장에서 자신을 드러내더라도 안전하게 일하고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노동환경을 어떻게 바꿔나갈 수 있을까 하는 과제가 명확해지는 것 같아요. 운동을 해나가기 위해 어떤 과정을 설계할 것인가 하는 어려운 과제가 주어진 상황인 것 같은데요. 이후에 계획하는 활동이나 이후 구상하는 사업이 있을까요?
호림: 이후 사업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지는 않았는데요, 지금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까도 얘기했던 것처럼 직장 내에서 어느 정도, 그 어느 정도가 좀 또 애매하기는 한데, 성소수자임을 드러내고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인터뷰하는 사업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정도의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일터에서 투쟁하는 이들과 퀴어로서 함께 싸운다는 것
웅: 조금 방향을 옮겨볼까요? 직장 안에서 성소수자임을 드러내고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걸 과제로 삼고 있다는 건, 일터 내 성소수자 인식을 변화시키고 노동권이 보장되는 일터의 환경을 만드는 작업과도 연결되는 거잖아요. 그런 점에 행성인은 현장에서 싸우는 노동자들을 만난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특히 최근에는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이 전국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행성인은 농성장마다 문화제를 공동 기획하기도 하고, 노동권팀에서는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인터뷰를 하죠.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행성인이 중요하게 생각해온 연대운동의 방식을 다양화하고 그 깊이도 넓혀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호림은 상임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투쟁의 현장을 다른 활동가들보다 적극적으로 가는 것 같아요. 여름 동안은 거제도를 거짓말 조금 보태서 밥 먹듯이 다녀왔잖아요. 어떤 활동을 하는지 얘기를 들려주세요.
호림: 최근 두 달 동안 인권 활동가들과 함께 거제도를 다섯 번 다녀왔습니다. 대우조선해양 인권운동 긴급 대응팀에서 긴급 인권 보고서 작성하는 일을 했는데요, 파업 투쟁이 마무리된 이후에는 투쟁 기록팀으로 활동하면서 조합원들의 투쟁 경험을 기록하는 인터뷰 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웅: 거기는 어떻게 들어가게 된 거예요?
호림: 사소한 계기가 있는데, 대우조선해양 파업 투쟁을 지지하는 법률인권단체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했어요. 그때 행성인으로 기자회견 발언 제안이 들어왔을 때 제가 발언하겠다고 했는데요. 그 건 이 투쟁에 뭔가 지지를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고, 언론이나 SNS를 통해서 투쟁 상황을 주목해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가겠다고 했어요.
기자회견에서 때로는 관성적으로 언급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이런 말들. 진심이 아니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런 말들은 어떻게 발언을 끝낼지 고민하면서 넣는 경우가 있단 말이죠. 그 때도 그런 말을 했는데, 이번에는 정말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 인권운동 긴급대응팀 제안이 왔을 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휩쓸리듯 발을 걸치면서 그렇게 흘러온 것 같아요. 그렇지만 난 아직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이러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
웅: 별 생각 없이 했다면 한두 번 참여하다가 좋은 경험이었고 두 번이 넘어가면 힘들겠다고 판단할 수도 있잖아요. 계속 찾아가서 투쟁하는 사람들, 하청노동자들을 만났잖아요. 여기에는 호림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있을 것 같아요. 표현이 이상하지만, 호림의 발목을 잡는 것은 무엇일까.
호림: 뭐라고 말해야 할까. 굉장히 절박한 이미지로 드러난 투쟁인데 그 당사자들을 만나서 이야기 듣는 거잖아요. 투쟁과 노동 이면에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고요. 그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는 말을 들은 사람의 책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이 있어서 중간에 빠질 수 없게 되는 것 같아요. 어디가 끝인지 모르지만 일단 가보자는 마음이 생겼어요. 어떤 시점에는 내가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고 있지? 또 한편으로는 내가 성소수자 단체에서 돈을 받으면서 활동하는데 너무 개인적인 동기로 몰입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하지만 당장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지는 않겠다고 생각을 했고, 시간이 지나면 이 경험이 나나 행성인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지금은 애써 이유를 찾는 시도는 안 하려고 해요. 아무튼 이 활동을 하는 것에 사무국 활동가들이 지지를 해주면서 안심을 하면서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요.
웅: 호림이 참여한 인권 보고서는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어요?
보고서는 위 배너를 누르면 받아볼 수 있다.
호림: 저도 연구보고서가 아닌 이런 종류의 보고서 작업은 처음 해봤어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안에 대해 인권활동가들이 사안을 기록하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말하는 보고서 쓰는 과정을 좀 가까이에서 보겠다는 배움의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아요.
알다시피 이 투쟁이 외적으로는 너무 절박하고 또 어떻게 보면 극단적으로 비쳐지기도 했잖아요. 절박한 투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한편으로는 조선업의 복잡한 하청 구조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조할 권리를 가로막는 법‧제도적인 어려움이 있어요. 그리고 실제 이 투쟁을 만들어 온 하청노동자들이 감내해 온 열악한 노동 조건의 문제가 있죠. 외적으로 드러나는 투쟁의 이면에 작동하는 맥락과 조건이 무엇인지, 이 투쟁의 요구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하고 사회적으로 전달하고자 한 보고서였습니다.
웅: 다른 접근일 수 있는데, 저는 호림이 참여하는 인터뷰 활동이 어떤 느낌이냐면 그동안 성소수자 운동이라고 하면 당사자로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잖아요. 지금 하는 활동은 성소수자로서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활동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행성인이나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성소수자 범주 바깥의 인터뷰를 듣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활동에 다시 의미 부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성소수자로서 타인의 이야기를, 꼭 성소수자 당사자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다른 환경에 살면서 싸우는 이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 계속 고민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궁금한 게 생겼는데, 그 사람들은 성소수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듣는 게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호림이 본인의 직함이나 소속을 이야기하게 되면 새로운 만남의 상황이 열리는 거잖아요.
호림: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어요. 제 소개를 할 때 성소수자 단체에서 왔다고 이야기한 정도였는데, 성소수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죠. 근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간부들한테는 한번 물어보고 싶어요. 행성인에서 왔다고 소개를 하면 ‘쟤는 여기 왜 왔지?’ 라는 생각을 한 번은 했을 것 같은데, 그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궁금하네요.
성소수자라서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기보다는 인권활동가의 정체성으로 참여하고 이야기를 들게 되는 것 같구요. 다만,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행성인 회원들이 성소수자로서 겪는 차별과 저항의 감수성을 바탕으로 이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깊은 연대의 마음을 보내는 것 같아요. 일테면 원청과 하청을 나누고 하청 내에서도 재하도급이 또 있는 식으로 노동자들을 분리해서 차등 대우를 하는데요. 차별을 노동 통제의 수단으로 삼는 거죠.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일상 전반에 일어나는 차별을 민감하게 인지하고 반응하기 때문에, 그리고 성소수자 중에도 상당수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일 것이기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굉장히 큰 연대의 마음을 이미 보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웅: 지금 호림이 하는 활동과 만남을 회원들이랑 어떻게 나눌 수 있을지가 단체의 과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연대의 거리를 좁히고 폭을 넓히는 활동 같은데, 성소수자의 삶만 보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성소수자로서 어떻게 살아갈 건지 시야를 넓히는 거죠.
기후정의라는 새로운 의제
웅: 호림이 최근 새로 하게 된 분야 중에는 기후정의 운동도 있잖아요.
호림: 새로 시작은 했는데, 즉각적으로 우리의 일이라는 느낌이 좀 들지 않아요?
웅: 저는 여러 갈래로 이해해 보려고 노력 중인데요, 하나는 성소수자가 아니어도 공통으로 체감하는 변화들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을 살아가는 하나의 사람으로서 뭔가 기후 위기를 이야기하고 정의를 실천해야 하는 게 하나의 갈래라면, 다른 갈래는 기후위기를 구조적인 문제로 인지하게 되었다는 점 같아요. 기후 위기는 빈곤의 문제고 또 북반구와 남반구 사이 수탈과 착취의 문제가 있고, 인종과 젠더의 문제일 수도 있다라는 걸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데 성소수자, 퀴어로 살면서 기후 위기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설명해낼 수 있을까 쉽지 않은 고민이 생겼어요. 호림도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을 텐데, 어떻게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부터 얘기해 볼까요?
호림: 이것도 토론회 발제라는 사소한 계기로 시작했어요. ‘기후 정의 동맹 포럼’ 당시 지금도 참여하고 있는 ‘다른 세상을 여는 길 내는 모임’에서 다양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기후 위기 세션을 만들어보자고 해서 세션 발제로 시작을 한 건데요. 기후 위기를 성소수자의 의제로 생각해본 경험이 없는 상황에 운동의 언어로 이야기할 기회가 생긴 거잖아요. 그래서 공부를 해나가는데 기후와 관련된 텍스트들을 읽을 때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 중에 성소수자의 경험이 누락 된다는 감각을 조금 느꼈어요. 기후정의에 대한 담론이 있다면 그 안에 성소수자는 기후 위기를 어떻게 경험하는지, 성소수자에게 기후정의는 무엇인지 언어를 만들고 운동에 관여해야 한다는 종류의 생각을 한 게 한편으로 있어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사회에서 차별받거나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가진 취약성을 기후 위기가 증폭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성소수자가 가진 삶의 취약성이 정말 앞으로 기후 위기가 심화되면서 더 증폭될 수 있겠다. 사회적 소수자들이 기후 위기로 인해 증폭된 취약성을 경험하지 않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운동이 필요하고, 또 그러려면 목소리를 함께 내기 위해 기후정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새롭게 적극적으로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웅: 저도 그렇고 호림도 얘기를 해줬지만 많은 사람이 기후 위기를 막연하게 생각하면서도 또 어떻게 관심을 갖고 실천할 것인지 고민을 품고 있는 것 같아요. 행성인이 기후정의로 6월에 회원 모임을 했을 때 회원들이 많은 호응을 보인 것도 그런 배경일 것 같고요. 기후정의라는 화두는 지금 사회운동 안에서 인권뿐 아니라 노동, 인종, 계층, 계급, 빈곤, 지역, 장애, 젠더 등을 두루 교차시키며 연대의 감각을 넓힐 수 있도록 하는 모멘텀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좀 들고요.
행성인과 함께
웅: 그러니까 그동안 손에 잡히는 권리를 중심으로 언어를 만들고 활동들을 하다가 지금은 피할 수 없는 공동의 위기를 직면하고 경험하면서 우리가 지속적으로 같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가까지 생각하는 지경에 온 것 같은데요.
행성인은 다른 때보다 여러 분야의 의제들을 마주하고 있고, 만나고 배우고 토론하면서 폭을 넓혀가고 있어요. 활동가들은 앞에서 지형지물을 탐색하고 누가 함께 보폭을 맞추는지 살피면서 방향을 정해 길을 내는 역할을 맡은 것 같고요. 그 선봉에 이호림 신입상임활동가가 있는데요.(웃음) 새삼 궁금했어요. 다른 인권 단체들도 있잖아요. 전방위로 인권 의제를 가져가는 단체들이 있는데 근데 왜 행성인에서 활동을 하는지.
호림: 모르겠어.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여자를 만나는 여자이기 이전에 굉장히 많은 사회적인 의제에 관심이 많은 진보적인 대학생이었단 말이죠. 하지만 학교 다닐 때 학생회 활동이나 학교를 기반으로 하는 운동은 안 했어요. 안 하려고 안 한 건 아니고 여기저기 두드려 보고 모임이나 단체 행사들을 가보기는 했는데 어떤 조직에 속해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경험을 하지는 않았거든요. 좀 이상한 애였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학교에서 청소 노동자들이 투쟁하면 학생운동 단위들이 깃발 들고 와서 집회에 참여하잖아요. 저는 그냥 수업 듣다가 그런 자리가 보이면 혼자 거기 앉았다 가는 애였죠. 포스터 보고 어떤 단체 행사에 가보고 싶다거나 관심 가는 영화를 공동체상영 하면 가서 보고 오고. 그런 학생 운동 단체 행사에 가면 사람들이 조직을 하려고 하잖아요, 술자리에 같이 가자고 하구요. 근데 딱히 내가 속할 수 있는 커뮤니티라는 마음이 드는 곳은 없었거든요. 그런 공간들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뭐랄까, 나의 편견도 있지만 술자리에서도 너무 무겁고 진지한 거죠.
그러다가 이러저러한 일로 동인련을 만났을 때 제가 필요로 했던 관계와 분위기가 충족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한없이 가볍게 깔깔거리면서 노는 분위기 속에서도 여러 가지 사회적인 의제에 대해 활동하고 연대하고 그런 것들을 다 하는 공간이었어요. 내가 처음 여기에 왔을 때 기억이 너무나 좋아서…
나 너무 몰라 미쳤나 봐 미쳤나 봐 (운다) 그래서 내가 딴 데 못 간다. 짜증 나 (웃는다) 그렇답니다.
웅: 근데 그런 것도 있지 않나요? 내가 여기를 그냥 참여하고 사람 만나러 올 때는 부담 없이 활동 얘기도 하고 친한 사람들도 만들 수 있는 편한 공간이다가도 팀장이 되고 운영위원이 되고 운영위원장을 하면서는 태도와 무게가 달라지잖아요. 지금 상임활동가의 위치에서 느끼는 것도 다르고요. 예를 들면 회원들에게 활동 소식을 전해 줄 필요가 있고 가까이서 활동하는 회원들 안부도 챙겨야 하고요. 그런 점에서는 또 다른 경험이나 감정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벼운 참여 넘어 기획하고, 결정하고, 어떤 논쟁이나 사건이 일어나면 필요에 따라 방향을 제시하거나 의견을 수렴하고 조율하는 역할이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잖아요. 필요하면 논쟁을 만들기도 해야 하고요. 그러니까, 진지해지잖아. 그런 상황들을 고려해도 행성인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같을지도 궁금해요.
호림: 앞에서 얘기했던, 내가 왜 상임 활동을 시작했는지를 다시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아요. 나의 개인적인 계기도 있지만, 단체가 여러 어려움을 겪을 때 내가 여기서 일을 하는 게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상임활동가로 혹은 운영위원으로, 운영위원장이 되면서는 동인련 활동 초기에 느꼈던 즐거움 혹은 유대감과는 다른 여러 감정을 느끼면서 활동했죠. 그렇지만 행성인이 내가 느꼈던 즐거움이 계속 이어질 수 있는 공간으로 다시 잘 자리 잡게 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너무 커서 딴 데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거죠.
웅: 못 사는 친정 도와주고 싶은 그런 마음? (웃음)
호림: 그런 마음. 그냥 도와주는 게 아니라 복합적인데 (운다) 몰라 내가 왜. 이게 어떤 면에서는 나와 단체를 분리하지 못하는 거고 활동가로서 되게 경계할 태도이기는 하지만 단체의 어려운 상황을 두고 볼 수 없는 거죠.
웅: 음… 호림이 봤을 때 행성인에 지금 필요한 건 뭘까?
호림: 어떤 종류의 관계 회복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니까 단체 안에서 성폭력 사건들이 있었고 이것이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문제 제기된 거잖아요. 이런 사건들과 그 사건을 만든 단체의 내부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어떤 친밀한 관계를 경계하는 분위기가 생겼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이게 과도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모두에게 안전하고 평등하고 폭력 없는 공동체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유대와 친밀성과 즐거움이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을 추구하는 거. 이걸 다시 만들어가는 게 너무 필요한 것 같아요.
근래 우리가 맺는 관계들이 경직된 측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이 관계를 어떻게 과거와는 다른 방식의 친밀성으로 만들 것인가가 중요하지 않을까.
웅: 그때의 친밀함이 그리울 때가 있는데, 너무도 당연한 거지만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죠. 이후에 우리가 만들어갈 친밀함은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연히 달라져야 하는 부분이 있어야겠고요.
호림이 상임 활동한 지 반년이 넘어가고 있어요. 물론 활동 년 수는 더 길지만. 본인을 어떤 활동가였다고 생각을 하고 앞으로 어떻게 좀 활동을 하고 싶은지 얘기해주세요.
호림: 내일 없이 에너지를 쓰는 측면이 있었던 건가 생각해요. 상임 활동 시작할 때 에너지가 풀충전 상태인 것도 있겠고요. 감사한 마음으로 그냥 열심히 활동해온 것 같은데, 이제는 조금씩 강약 조절을 하면서 긴 호흡을 갖는 게 필요할 거 같아요. 그러면서도 당장 해야 하는 것들을 잘 배치하면서 활동을 잘 가져가는 리듬을 만드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웅: 제가 요즘 들어 더더욱 사무국에 얘기하죠. 높은 텐션에서 내리는 결정을 온전히 믿지 말자고. 반대로 컨디션이 안 좋을 때 내리는 선택도 마찬가지라고. 개인적으로 한번 브레이크를 걸고 다시 출발하는 상황이었던지라 호림을 볼 때 괜찮을까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너는 외부의 활동 제안을 거절하지 않는 거야. 그래서 한편으로는 얘가 상근이 처음이라 그렇겠거니 새삼 생각하고. (웃음)
행성인 25주년을 맞아
웅: 지금 인터뷰가 행성인 25주년을 기념하면서 진행하는 거잖아요. 행성인에서 10년 넘게 활동하면서 활동회원에서 활동팀장으로, 운영위원으로, 운영위원장으로 여러 위치에서 활동하면서 지금은 상임 활동으로 다시 자리를 잡는 이호림 활동가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요. 올해 행성인은 과제도 많고, 곧 있으면 후원 행사를 열기도 하죠. 마지막으로 할 얘기가 있으면 부탁드려요.
호림: 얼마 전 뉴스레터에 썼는데, 연대가 뭘까 다시 생각하는 계기들이 있었어요. 저한테는 대우조선해양이 투쟁에 함께 하는 경험이 그랬고, 또 하이트 진로 투쟁 때문에 후원주점 장소를 옮기는 상황이 그렇고.
예전에 활동을 할 때는 단체가 가진 비전, 미션, 가치들을 뻔하고 당연한 말들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거기에 뭐라고 쓰여있는지 잘 안 보고 그냥 그런 게 있나 보다, 인사말처럼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거 아닌가 정도로 생각했는데 상임 활동을 시작하면서 가끔 그 페이지를 뒤져보게 되더라고요. ‘행동하는 성소수자의 저항과 연대로 만드는 변화’라는 문구를 보면서, 우리가 무엇에 저항하는지, 누구와 연대하는지 돌아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싸울지 다시 생각하게 돼요.
후원주점은 우리가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을 한자리에 초대해서 연대의 그림을 실물로 그려보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후원도 중요하지만, 이런 바람이 있어선지 정말 많이 와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다른 단체 활동가들이 자꾸 ‘티켓만 사고 안 가는 게 도와주는 거지?’라고 얘기를 하는데, 정말 다 와서 얼굴을 보면서 뭔가를 확인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웅: 호림 고생 많았습니다.
'회원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원 에세이] 행성인의 문을 연 낯선 사람 (0) | 2022.10.28 |
---|---|
'운동이 밥 먹여 주냐?' (0) | 2022.09.30 |
25주년 특집 기획 - 상임활동가 호림 인터뷰 (1) (1) | 2022.09.15 |
[회원에세이] 데이팅 어플이 보호한 것과 내가 지키지 못한 것 (1) | 2022.08.29 |
[회원 에세이] 그 여름 (0) | 2022.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