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웅(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규모로 따지면 성산동의 행성인 텃밭은 기존 대흥동보다 좁다. 누수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문턱이 줄고, 층간 분리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지만, 교육장과 화장실이 좁아졌고 무엇보다 책과 자료를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이 작아졌다. (좁아진 와중에 탕비실과 창고는 쾌적해졌다. 방문하는 회원들의 평이 제일 좋은 부분 중 하나)
행성인은 자체적으로 자료를 모으고 만들며 구입하지만, 회원 비회원 할 것 없이 많은 분들이 책과 선전물, 잡지와 논문 등 가리지 않고 기증하기도 한다. 그 결과 단행본의 경우 같은 책이 4-5권씩 비축되는가 하면, 제작한지 십여 년이 넘는 판매용 자료들이 아직도 포장박스 안에 묵혀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대흥동은 공간이 복잡한 만큼 짐들을 짱박아둘 공간이 곳곳에 있고, 틈이 생긴다 싶으면 어느새 다른 짐과 자료들이 들어차기 다반사였다. 문제는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비축만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사를 진행하면서 대대적인 자료 처분과 정리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버릴 것은 버리면서도 불필요하게 양이 많은 자료들은 나눔하기로 했다. 한쪽에서는 짐정리를 하면서 다른 테이블에는 나눔용 자료를 쌓아두었다.덕분에 방문하는 이들은 마지막으로 대흥동 사무실을 둘러볼 수 있었고, 활동가들과 잠시나마 자료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후원받은 책들은 되도록 보관하면서 보관용과 열람용을 포함하여 세권 이상 두지는 않기로 정했다. 판매용 자료집도 6-7년이 넘은 것들은 최소 수량만 두고 처분했다. 연대체와 타단체의 짐들은 자체적인 논의를 거쳐 수거하거나 보관을 지속하는 방향을 택했다.
문제는 8층 사무실 자료들이었다. 4층에 꽂힌 자료들이 판매용 책자와 단행본, 최근의 토론집과 논문들이 주를 이룬다면, 8층 사무실 캐비넷은 90년대부터 지금을 아우르는 회의록과 선전물이 그득하다. 바깥으로 열람하고 활용하기보다는 내부 보관용 자료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수량을 최소화하자는 기조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폐기보다는 보존을 하는 방식으로 정리를 시작했다. 당장 라벨링을 하고 리스트를 만드는 건 어렵지만, 그래도 어떤 자료들이 있는가 살펴보자는 마음으로 몇 주에 걸쳐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기록의 단체 행성인에는 대동인시절부터 연도별로 연대체별로 회의록과 자료들이 정리되어 있다. 자료들 중에는 지난 동인련 대표의 옥중 서신이 있고, 육우당의 동인련 가입서가 있다. 회원명부와 상담기록에는 당시 회원들의 개인정보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원칙상 개인 정보가 있는 자료들은 모두 폐기. 사람들의 이메일과 주소가 있는 수천 수만 장의 탄원서와 서명용지도 내용면만 남겨두고 모두 폐기. 단체의 짐을 가볍게 하는 작업이지만, 정리하는 일은 폐기하는 작업보다도 무엇을 보존하고 기록할 것일지 기준을 정하고 하나씩 살펴보는 작업이 훨씬 중요하다. 새삼 이사를 마무리하고 행성인 웹진에 '이사'를 검색해보니 아래 문장이 눈에 걸렸다.
"가구를 배치하고 그동안 발간한 자료를 전시해 두었다. 활동별로 서류를 정리하였고 활동사진들도 사진첩에 고이 모셔 두었다. 다시 꺼내보지도 않을 것 같은 옛날 자료들은 결국 버리지 못하고 충정로 사무실 창고까지 또 끌려왔다."
정욜, 〈셋방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2010. 3. 2)
그때나 지금이나. 정리를 명분으로 하나씩 보기를 잘했지 싶다. 아무튼 며칠동안 품들여 하나하나 살펴보다보니 노다지밭을 거니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 중 몇 가지 자료를 사진과 함께 보도록 하자.
웹자보가 지금처럼 활용되지 않던 시절, 활동가들은 대학 캠퍼스마다 대자보를 붙였다. 동인련의 전신인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대동인)의 첫 홍보물이라고 쓰여 있다.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책임진다'는 패기넘치는 문장이 눈에 띈다.
당시 클리어파일도 만만치 않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 PC통신을 많이 사용하던 시절 천리안의 홍보 클리어파일에는 99년 인권운동사랑방 박래군 활동가의 시민사회단체 조직안을 내용으로 하는 안건지가 있다.
무엇하나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1997년 라브리스에서 진행한 대동인 첫번째 이벤트 '맛있는 불량식품' 행사는 OHP필름(으로 추정한다) 티켓부터 담배를 사면 부킹을 할 수 있다는 이벤트도 그렇거니와, 제문과 대동인 노래(멜로디가 궁금하다)까지 하나하나 눈비비고 다시 살펴보게 만든다. 사서함 주소와 나우누리, 하이텔 계정 이름들이 정겹다.
저때도 선전활동 능력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소식지 디자인 폰트와 일러스트의 상당부분은 손작업이었다. (변기를 흔드는 손...) 상근일지도 꾸준히 작성했다.
가끔 오래 전 필체도 만난다. 2003년 엑스존 행정소송 관련 탄원서를 모으던 시절 학교모임 운영자로 이름을 올렸다. 안녕, 20년 전의 나(아련)
당시에는 단체 인권캠프를 가는 일이 일간지 신문 1면에 실리기도 했다. 2000년 인권캠프에는 방송인 홍석천씨도 함께했다.
자료들 중에는 타 단체의 오랜 자료들도 만난다.
...
마지막으로 대흥동을 떠나면서 건물 한켠에 폐기를 위해 쌓아둔 종이뭉치들을 한동안 쳐다봤다(그래. 이제는 종이뭉치다). 폐지 수집을 위해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와 가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으로 굿바이 인사를 전했다. 겸사겸사 시작한 자료정리지만 그동안 보관을 이유로 방치해온 시간들을 반성했다. 언제 다 정리할지는 사실 생각도 감히 못하겠지만, 종종 소중한 자료들을 잘 큐레이션해서 회원들과 함께 보는 날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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