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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

[회원에세이] 2023 중구난방 활동의 조각들

by 행성인 2023. 12. 25.

남웅(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규범과 제도의 문법

대화에 앞서 상대의 언어를 살핀다. 당신이 어떤 의도와 기준을 두는지, 어떤 배움과 경험에 걸쳐 지금의 입장을 갖게 되었는지, 혹은 지금까지 지나온 자리가 당신의 생각을 어떻게 구축하고 있는지 거슬러 파악해야 허공에 흩어지는 단어들을 붙잡아 설득이든 논쟁이든 할 수 있다.
 
규범과 제도의 문법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저 지배적으로 정상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부정하고 적대만 할 수는 없다. 언제라도 정치적인 동행과 협치를 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상대의 문법을 파악하는 노력 너머 내가 지금의 제도와 규범에 얼마만큼 종속되고 동일시하는지, 혹은 그로부터 얼마나 다르고 거리 두는지 알아두는 작업이 필요하다. 오래도록 품어온 욕망이 고스란히 규범과 제도의 문법에 묶여있다고 말하기엔 억울한 심정부터 들지만, 어느정도 그 아래 학습되고 훈육되어졌음을 인정할 수 있다면, 완전한 자유는 공허한 불안을 초래하거나 불가능한 이야기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정치와 행정의 언어 사이에서

HIV/AIDS 예방단체의 자문회의에서 예방과 돌봄서비스를 지원하는 기관의 담당자와 간호사가 하나같이 이야기한 건 미등록 이주민에 관련된 것이었다. 매해 추산되는 신규 감염인 중 외국인의 비율이 20프로를 상회하는 중에 미등록 이주민 감염인들이 많아지는 상황을 이들은 전면에서 체감한다. [각주:1]  
 
미등록 이주민에게 의료지원을 할 수 있는 병원은 국공립, 시립 병원으로 극히 손에 꼽는다. 당연히 해당 병원에 사람들이 몰리고 도움을 요청한다. 할당된 자원과 예산은 한정되어 있는데, 미등록 이주민 감염인이 몰려들어 큰일이 났다고, 이들은 근심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행정을 담당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최대의 이해 가능한 전선이 깨진 건 그 다음이었다.
 

치료제를 공짜로 준다고 하면 외국인 감염인들이 너나없이 한국에 밀려올 것 아녜요.
 

이 기시감. 치료제를 받기 위해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한국을 찾는다는 이야기의 신빙성은 차치하고라도,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논의의 패턴은 한때 세금도둑으로 감염인을 지목했던 것과 대동소이해 보였다. 사회적 참여의 자격이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치료를 위해 한국을 찾을 거라는 예측은 과도한 확증편향 아닐까. 하지만 이를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한정된 자원을 분배할때 시민과 비시민을 나누는 기준이 작동한다. 하지만 예산의 배분은 세금을 낸 만큼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원들이 온전히 건강을 챙기며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누구라도 살 만한 삶을 만들 수 있도록 배치되어야 한다. 그것이 정의이자 정치적인 명분이 된다고 할지라도, 당장 일상을 관리하고 외부로부터 우연성과 변칙들에 대응하며 안정을 도모하기를 우선순위에 두는 행정에 개입하는 건 쉽지 않다. 자리의 성격과 맞지 않는 대화인지라 반박이나 질문을 더 붙이지 않았지만, 설령 한다고 한들 당장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 현장에서 머리를 쥐어짤 이들에게 온전히 전달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미등록이주민에 대한 낙인에 대해 정치적 명분을 내세우기 앞서 외국인 지원의 체계와 절차를, 미등록 이주민에 대한 행정의 언어들을 고안하고 돌파해야 함을 생각한다.  



나이먹으며 잘 미끄러져 나가기

제도의 한정과 규범의 울타리를 생각하면서 나는 어디쯤에 걸쳐 있는가를 종종 가늠한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은 나이먹으며 어디쯤에서 이동하고 있는가를 돌아본다. 규범에 영향을 받고 어느정도는 안착했을지 모르지만, 나이듦을 체감하면서도 때론 부정하고 모른척하며 수 년째 비연애 중인 게이 남성으로서 정체화하는 것이 여전히 어색한 나는 안정적인 관계에서 미끄러지고 역시 안정적인 재정의 운용과 건강을 놓치고 있음을 인정해가고 있다. 온전히 잡을 수 없다면 적어도 미끄러지더라도 붙잡거나 걸어둘 수 있는 연결을 넓히고 방법을 찾자는 것이 다음의 선택이다.

다행히 나만의 걱정은 아닌 것 같다. 누군가가 바깥에서 제도의 변화를 요구하고 예산의 배제 없는 사용을 요구한다면, 다른 누군가는 안에서 참조할 수 있는 인물과 사례를 찾거나 나와 다른 방향으로 미끄러지는 이들을 찾아 추락을 방지할 매듭을 잇는다.

하반기동안 공연을 볼 기회가 여럿 있었다. 친절한 제작자 동료들은 활동가와 예술인 할인을 베풀어주고 누군가는 내 자리까지 챙겨주었다. 그렇게 찾은 것이 〈연극연습5: 번안연습- 로미오와 줄리엣〉, 〈연극연습3: 극작연습- 물고기로 죽기〉, 〈곡비〉, 영화 〈홈그라운드〉다. 일일이 평하지 않더라도 공통적으로 눈에 띄는 특징은 먼저 살고 있는 이들, 중장년 퀴어의 실제 모습을 전면에 내건다는 점이었다. 모어와 김비, 색자와 명우형은 근래 퀴어 퍼포먼스와 공동체의 논의가 부상하는 가운데 적잖이 언급되는 이들이지만, 저마다 수십 년 전부터 통상의 구분에서 분류되지 않거나 분류되기를 거부하는 다른 몸과 태도, 문장과 표현들을 고안하며 퀴어로서 관계맺고 사람을 모으며  커뮤니티의 연결고리이자 기반이 되어온 입지전적의 인물들이다. 퀴어 커뮤니티에서 동료를 모으고, 동료들이 시시때때로 찾는 이들은 하나의 집단을 '공동체'로 부를 수 있는 관계를 만들기도 한다. 

 

 


작품들이 보여주는 공통의 특징이 대중문화에서 줄곧 시도하는 '어른 찾기' 의 퀴어 버전일지, 현장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고수들에 하이라이트를 비추면서도 다른 세대와 분야의 동료들을 함께 어우르게 하여 동시대 무대에 올리는 시도인지 당장은 판단을 미뤄둔다. 다만 먼저 살아낸 이들을 무대에 올리는 근간의 시도는 공동체의 관객들과 함게 나이듦에 대한 상상을 하기 위한 준거점으로 두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해보았다.  

이들의 몸과 언어는 살아낸 이야기를 들려주고, 살아낸 몸의 움직임을 보인다. 하지만 몸들이 오르는 무대는 나이먹으며 우정과 사랑을 탐색하는 이들이 신호를 보내는 장소이기도 하다.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면 〈물고기로 죽기〉 에서 극을 집필한 김비가 의료적 트랜지션수술 이후 전국 각지의 터미널을 찾아다니고 남긴 사진들이 하염없이 지나갈 때, 그러니까 누구라도 찾아오고 떠날 수 있는 공간이 단절적으로 끝없이 지속될 때 이어진 객석의 고요였다. 이는 곧장 〈로미오와 줄리엣〉 의 프로그램 북에 실린 배우와 제작자들의 대화 내용을 연결짓게 했다. 20살 넘게 차이 나는 배우들과 몸짓과 호흡을 맞추는 것을 걱정하는 모어에게 연출가와 안무가는 힘을 주며 그것이 당신의 무대임을 각인한다. 퀴어 신체의 스킨십이 기성의 서사를 어떻게 바꿔낼 것인가에 대한 상상과 생각들은, 앞서 끝없이 이어지는 인적 드문 터미널들의 공간을 시끄럽게 채워넣는 그림을 그리게 만든다. 그것을 현실에서 명우형의 '레스보스'로 많은이들이 찾아와 북적한 풍경을 만드는 것에 연결짓는 건 그리 어려운 상상이 아니다. '어른'을 찾아 무대에 세우는 기성의 무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쇠해가는 당신의 몸이 쌓아온 공동의 지층에 나를 붙드는 무언가 있음을 찾는 것, 하여 판을 엎어치든 메치든 호흡과 리듬을 잠깐이라도 같이 맞추면서 서로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가을의 어느 주말 오후 〈곡비〉를 보러갈 때, 미아리고개 예술극장 앞에 1세대 트랜스젠더로 알려진 배우 색자를 보기 위해 비슷한 연배의 트랜스젠더 동료와 선후배들이 배우만큼이나 화사한 의상을 입고 케이크를 사들고 와서 한 자리에 모여 담배를 피고 담소를 나누는 모습들은 개인적으로 올해의 손꼽는 장면 중 하나다. 이들이 모인 장면은 어느 집회나 행진에서도 본 적이 없던 것 같다. 그것은 〈홈그라운드〉의 상영관에서 관객이 세대를 막론하고 찾아오는 장면과도 이어졌다. 퍼포먼스의 내용 뿐 아니라, 그것을 상연하는 장소 또한 공동체의 얼굴일 수 있다.
 

 
 
다만 이어지는 시나리오는 홀로 살아낸 아름다운 피조물의 반짝임에 살짝 비켜날 수 있기를, 독야청청한 이의 강렬함에 집중하거나 '조상님'의 전설같은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면서 닫힌 울타리의 구전동화로 남지 않기를, 설령 그를 하나의 인간으로 볼지라도 그를 향한 연민에 빠져들지 말기를, 당신 또한 역사의 일원이고 우리로 묶일 수 있는 타인임을 알릴 수 있는 서사가 많아지면 좋겠다. 적어도 관객으로서 만나고 싶은 건 그가 무대에 오르기까지 저변에 어떤 연결과 새로운 관계들이 있는가를 살피고, 그것이 어떻게 서사에 틈입해낼 것인가를 모색하는 시도일 것이므로. 단절적이고 한시적일지라도 나의 울타리를 건사하면서도 함께 부대끼며 살고 늙고 죽기를 상상하는 일은 활동과 예술 모두 예외가 아니다.



당신의 행복을 축하하며 그 기준을 부수기

HIV/AIDS인권팀에서 기획한 성적 수치심을 이야기하는 자리 ‘Shame on you’는 시작부터 철저하게 비밀보장을 약속했다. 저마다의 내밀한 이야기는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으로 흘려보내기로 했는데, 행사를 진행하면서 수치스러운 경험을 들으며 청중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 수치심과 같은 비인간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규범의 항목들을 바꿔내는 것과, 수치심을 인식의 한계로 삼으며 상식과 체면에 미치지 못하는 삶들이 한계를 찢어내며 서로를 찾고 연결하는가를 숙고하는 일 중에서 무엇을 택할 수 있을까.[각주:2]

 

질문은 굳이 이분법의 구도를 취했지만, 응답은 이를 비켜선다 -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위에 엣지를 부여하거나, 수치심을 유발하는 기제를 비판하는 일은 서로 대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양자가 서로에게 필요한 방향을 갖지 않을까.

 

상반된 방향들이 조우하는 동안 감정의 좌표들도 달라질 것이다.

규범과 제도를 둘러싸고 다양한 감정들이 발생하고 공유되거나 엄폐된다. 규범의 기준과 자격을 묻고 바꿔내는 것이 운동의 지향이겠지만, 당연히 여기에는 규범적 관계와 울타리를 욕망하는 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둘 사이 다른 태도와 지향이 불화하면서도 섬세하게 논의해온 시간들이 있음을 기억한다. 한편에서는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공적으로 관계를 인정받고자 하는 바람이 정상시민의 자격에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지 헤아리면서도, 급진적인 인정의 요구는 정상의 기준을 또한 바꿔낼 수 있음을 믿는다. 하지만 일탈과 미끄러진 삶들을 그저 치기어린 것으로, 한때의 벅찬 시절로 치부하지 않으며 존중하기 위해서는 어떤 삶의 모양들이 고안되어야할까를 또한 과제로 둔다. 다시 이야기하면, 늙어서도 나는 결혼을 안하거나 못할 수 있다. 하지만 결혼을 목표삼지 않더라도, 홀로 나이 들어가면서도 익명의 누군가를 만나 온전히 몸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삶을 상상하고, 이를 결핍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결합이든 혼인이든 관계의 울타리를 만들어가는 누군가를 축하하고 그의 성취에 의미부여할 수 있는 환대의 마음을 잃지 않고 싶다. 다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회적 기반과 공동체라는 실천이 필요할까. 좀 더 이야기가 허락된다면, 이 관계들 중 무엇이 완성형인지 따지는 물음은 실상 내게 중요하지 않기를 바란다.[각주:3]

한 손에는 불행과 실패로부터 미래의 예정된 시간을 찢어내는 퀴어의 우울과 자조적인 쾌락의 역량을 쥐고 있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할때 '어쨌든 실패하면 안되지 않냐'고 일갈하는 현장의 결기가 다른 손에 쥐어져 있다. 제도의 인정을 요구하고 요구를 쟁취한 타인의 행복을 바라면서도, 도시 전설로 남은 일탈과 불장난 같은 이야기들로부터 어떻게 서사를 발견하고 만들어낼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행복에 대한 나의 열망과 당신이 성취한 행복을 존중하면서도 어떻게 행복의 질서를 부술지 함께 상상할 것인가.

 

둘을 함께 생각하는 건 논리적으로는 쉽지 않지만,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지 않은가... 내년도 쉽지 않을 것이고 그와중에 필사적으로 평안을 찾을 예정이지만, 언제는 안 그랬나 싶다.
 
 
 

 

  1. 질병관리청 감염병정책국 에이즈관리과가 발표한 '2022년 HIV/AIDS 신고현황'에 따르면 전체 신규 감염인 중 외국인 비율은 2018년 18.0%, 2019년 17.7%, 2020년 19.5%, 2021년 20.7%, 2022년 22.6%로 그 비중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본문으로]
  2. 퀴어들의 수치심에 부딪히는 입장들에 대해서는 근간에 나온 이연숙의 『진격하는 저급들』의 들어가는 글에 잘 설명되어 있다. [본문으로]
  3. 이런 생각들은 올해의 지난한 시간을 지나며 동료들과 혼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리고 근래 가족구성권연구소에서 진행한 '퀴어남성돌봄 연구발표'에 토론자로 참여한 이후에야 정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 남긴 행복과 불행에 대한 짧은 단상은 사라 아메드의 『행복의 약속』을 다소 간 참조하면서도 '식탁이 바뀌기를 희망하면서 식탁에 자리 하나를 더 만드는 일'과 '집 허물기'를 대치하는 논지의 방향을 조금 비틀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