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행성인 운영위원에는 부치로 보이고 싶은 여성 퀴어(슈미)와 부치로 보이지만 애매한 여성 퀴어(내)가 있다.
우리의 공통점은 행성인 운영위원이자, 사기업 임금 노동자이자, 강부치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행성인은 경쟁을 지양하는 단체지만,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누가 더 강한 부치인지 판별 받길 원했고, 이는 부치의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특출난 운동신경이 없는 우리는 마라톤이라는 종목으로 서로를 겨냥했다.
누군가는 포기할 줄 알고 시작한 경쟁은 5km에서 7km 거기서 더 나아가 10km까지 올라갔다. 다행히 슈미님은 큐리블이라는 풋살 모임, 나는 크로스핏을 하고 있었기에 마라톤을 하기 위한 사전 준비는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행사날 프린세스 부치 되기’와 ‘주말 행성인 일정 함께 참여하기’라는 벌칙이자 소원을 하나씩 걸었다. (승부와 내기라는 도박성 경쟁은 행성인이 지양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밝혀둔다) 나는 한 글자가 될지언정 프린세스 부치는 될 수 없기 때문에 마라톤을 위한 체중 감량도 시작했다.
대회 당일, 영하로 떨어졌던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왔고 독한 감기로 끙끙 앓던 몸도 제법 좋아졌다. 이길 거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압도적인 차이로 이기고 싶어 고가의 러닝화와 양말도 준비한 나였다.
오늘 마라톤에는 슈미님과 나 그리고 운영위원장인 지오 총 3명이 참가했는데, 이 자리를 빌어 굳이 마라톤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는 지오님께 감사하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전한다.
처음 시작은 좋았다. 4km까진 쉬지 않고 총총 걸음으로 뛰었고, 5km 반환점까지만 해도 할 만 하다는 생각과 제법 격차가 벌어진 것이 내심 기쁘기도 했다. 살면서 누군 갈 이겨본 적 없는 나는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에 설레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하체와 코어 힘이 약해서 그런지 반환점을 돌자마자 몸이 무거워졌고,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나의 뜀박질은 걸음이 되었고, 그 걸음마저도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번 마라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여성마라톤 대회에서 무지개 깃발을 들고 뛰겠다는 나의 계획은 반환점에 두고 온지 오래였다.
옆에선 헤테로 커플들이 손잡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마치 이성애 중심에 서있는 성소수자의 운동 같아서 그 두 커플들만큼은 이기고 싶었다.
그 덕분인지 나는 그 두 커플들을 제치고, 1시간 21분이라는 기록으로 10km 완주를 끝냈다.
나는 그날 성취감을 얻었고, 다음날 무릎을 잃었다.
걷는 것 조차 힘들어서 회사에선 화장실도 못 갔다.
코로나 확진/격리 외에는 연달아 빠져본 적 없던 크로스핏을 무기한 연기했고, 여전히 무릎 통증으로 고생중이다.
자리에 앉아 곰곰히 생각했다.
부치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타고난 것이며, 진정한 부치는 경쟁으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리곤 미리 결제해두었던 마라톤 대회들을 취소하고 환불을 받았다.
행동하는 성소수자는 세상을 바꾸지만, 경쟁을 쫓는 성소수자는 상당히 아프다는 것도 깨달으며 경쟁이 아니라 함께 하는 운동을 통해 건강하고 안전하게 운동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래도 내기는 내기였기에 마라톤 완주 기록과 함께 내기로 걸었던 소원을 마무리로 남겨본다.
상임활동가들의 주말 여가를 지켜주고자 올 한해는 ‘슈미님과 함께’ 행성인 주말 행사를 열심히 참여해보겠습니다. 저희의 작은 대결을 기다려 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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