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넛(행성인 HIV/AIDS인권팀)
작년 9월 초, 신촌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왜 만나기로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만난 지 오래되어서 술이나 먹고 놀기로 했던 것 같다. 내가 종종 찾는 (지금은 폐업한) 비건 옵션이 있는 퀴어 프렌들리 술집에서 1차로 술을 마신 후에, 친구가 또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서 바로 앞에 있는 다른 술집으로 데려갔다. 처음 방문하는 곳은 아니었다. 작년 서울 퀴어문화축제가 끝나고 나서 그날 밤에 잠깐 들른 적이 있는 술집이었다. 게이바나 퀴어 술집은 아니고, 모두를 환영하는 퀴어 프렌들리 술집을 표방한, 더빠(실제 상호명을 언급하는 데에 있어 사장님의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을 명시해야 할 것 같다)라는 이름의 가게였다. 그 당시에는 날이 날인지라 사람들도 꽤 많았고, 분위기도 시끄럽고, 케이팝 음악이 계속 나왔는데 여기가 이태원인가 신촌인가 헷갈릴 정도로 춤추면서 노는 사람들도 많았던 기억이 난다. 그날 이후 그 술집을 다시 찾을 일은 없었는데, 친구가 가자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같이 갔다. 사실상 더빠를 제대로 들른 것은 그날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인천 퀴어문화축제 전날밤, 그러니까 금요일 밤이었고 내가 기억하는 더빠와 비슷하게 사람들이 많았고 케이팝이 나오고 있었다. 친구는 이런 분위기에 익숙한 걸 보니, 더빠에 종종 들르는 대충 단골 손님 같아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 때문에 더빠도 다시 방문했고, 그날 그의 소개로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었으며, (친구를 사귀려면 트위터를 해야 한다는 꼬드김에 넘어가) 트위터도 시작했고, 행성인과 행성인 HIV/AIDS 인권팀에도 들어가게 되었으니 고마운 친구라고도 할 수 있겠다(트위터를 나한테 전파시킨 게 고마운 건지는 솔직히 논의의 대상이긴 하다). 아무튼 그날 밤 이후로 나도 이 술집의 단골 손님이 되었으며, 심지어 나를 데려간 친구보다 훨씬 더 자주 더빠를 찾게 되었다.
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 가게를 찾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퀴어 프렌들리 술집을 표방하고 실제로 이용하는 사람들 중 퀴어 당사자들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이곳에서는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나의 정체성 중 일부를 숨기거나, 그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술을 마시며 쉴 수 있는 곳이 많지는 않다. 사실 그래서 퀴어 술집이나 퀴어 프렌들리 술집, 게이 바, 레즈비언 바 같은 공간이 더 소중한 것 같다. 그리고 더빠는 특히 다른 퀴어 술집이나 게이 바 같은 장소들보다도 더, 어떤 정체성의 어떤 사람이든 주인공이 되어서, 무엇을 하든지 환영받을 수 있는 장소이다. 그곳에서 시끄럽게 놀아도 되고, 혼자 책을 읽거나 작업을 하고 있어도 되고, 새 친구를 사귀어도 된다.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규칙이나 사회적 프로토콜이 없다시피 하다. 그렇기 때문에 집에 가기는 싫은데 시간을 때울 곳이 필요할 때, 온전히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공간이나 생각을 정리할 장소가 필요할 때 관성적으로 더빠를 찾게 되는 것 같다. 이 술집을 자주 찾는 단골들 중 대부분이 서로 아는 사이이며, 그곳에서 새 친구를 사귀는 나 같은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은 이곳을 언제 찾든지 원하는 정도만큼 환영받을 수 있는 커뮤니티로의 성격을 강화한다. 손님들 중에 퀴어 당사자의 비중이 높은 퀴어 프렌들리 술집인 더빠의 정체성은 서울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공간으로서의 특성을 강화하고, 이 공간을 처음 찾는 사람들에게 느껴질 수 있는 장벽을 낮춰 준다.
평소에 친구들과 약속 잡는 것을 어려워하지만 정작 사람 만나는 것은 좋아하는, 정말 안타까운 이중성을 지니고 있는 나에게는 더빠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미리 약속을 부러 잡고 그곳에서 만나지 않아도 그냥 시간이 될 때, 평일이든 주말이든 상관없이 더빠로 혼자 향하면 항상 손님들 중 누군가는 나의 친구들이다. 나와 나의 친구들이 일상적으로 자주 찾을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높은 확률로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나 인사할 수 있다는 패턴은 부담 없이 공간을 찾을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된다. 이곳에서 사귄 친구들과 밖에서 만나 밥을 먹거나 놀 약속을 잡더라도 저녁때쯤에는 신촌으로 넘어와 더빠를 찾는 일이 많다. 큰 돈이나 노력을 들이지 않고 친구들을 만나거나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공간이다.
더빠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공간이다. 성소수자 인권단체나 대학교 퀴어 동아리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사람들도, 택시를 타고 단체로 이태원을 가기 전에 가볍게 취할 공간이 필요한 게이들도, 퀴어들이 더빠를 자주 찾기 훨씬 전부터 술을 마시러 오던 사장님의 오랜 단골들도, 퀴어들과 친한 앨라이들도, 퇴근하고 나서 지친 몸을 끌고 온 퀴어들도 모두 모이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커뮤니티가 형성된 공간임에도 새로운 사람에 대한 경계가 비교적 덜하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나와 인생의 가치관이나 생각이 크게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만큼은 함께 술을 마실 수 있다.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하거나 재단하지 않는 공간이다. 만약 그런 사람들이 있더라도, 그것은 이곳에서 권장받거나 묵인받는 행동이 아니다.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과 잘 맞거나 친한 것은 아니다.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이나 서로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더빠는 나와 친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전유하는 공간이 아니고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같은 공간에 있는 누군가가 불편하다면 그것은 나와 그 사람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곳은 누군가와의 불편한 관계가 아니라 지금 그곳에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집중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장소이다. 친구들을 만나러 퇴근하고 늦은 시간에 오는 사람들, 습관적으로 거의 매일 더빠에서 술을 마시며 앉아 있는 사람들, 시간을 굳이 내어 지방에서 서울 한복판까지 올라오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그들의 환영을 받으면,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퇴근하고 지친 저녁에, 아니면 행성인 모임이 끝나고 자동으로 버스를 타고 더빠를 찾는 게 습관이 된 나에게 이곳은 정말 소중한 장소이다. 그런데 내가 평소에 항상 느끼는 묘한 소외감, 어디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온전히 그 집단에 속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그 느낌은 더빠에서도 예외없이 느끼는 것이다. 사람들과 일대일로 깊은 관계를 맺거나 특정 정도 이상 친해지는 것을 어려워하는데, 그래서 이를 감추려고 일부러 텐션을 올리거나 말을 많이 하기도 한다. 이것은 더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중요한 에너지 원천이기 때문에 그토록 더빠를 자주 드나드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문득, 사람들을 만나 시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더빠라는 공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여유있게 방문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과 함께 앉아 떠들면서도 문득 알 수 없는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내가 원하는 만큼 외로울 수 있는 공간이 더빠이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에 더빠를 찾았을 때는 시끄러운 최신 음악이 나오고 신나게 춤을 추는 분위기에 매료되어서 단골이 되었다. 하지만 요즘 내가 더빠에서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밤 열두시에서 두 시 사이, 주말에 이태원을 갈 사람들은 이미 가 있고 정말 자주 더빠를 찾는 소수의 인원들만 남아 있을 때, 케이팝을 트는 시간이 지나고 옛날 음악과 인디밴드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새벽무렵이다. 혼자 앉아 적당히 취한 채로 주황색 불빛을 바라보고 음악을 듣고 있으면, 찾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새삼 느낀다. 그리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무리에 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일이나 새벽에 흘러나오는 그 음악들이 좋아서, 더빠에서 마시는 맥주와 주황색 불빛과 이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남겨 놓은 그 흔적들이 좋아서 더빠를 다시 한 번 찾게 된다. 사회 안에서 한 사람의 청년으로서, 특히 퀴어인 청년으로서 온전한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은데, 더빠와 같이 언제든 찾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 그곳에서 다시 힘을 얻는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은 참 습하고 더운 7월이다. 오늘 밤에도 더빠에 들러 맥주를 마시며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집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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