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사랑(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공동체가 공동화(空洞化)한다. 가족의 가치가 퇴색되고 있다. 집이 잠자는 공간의 기능으로 축소된 현대에 이웃 공동체는 ‘응답하라 1998’같은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소재거리이다. 삼삼오오 모이면 부동산, 주식, 아파트 청약, 나는 솔로를 이야기한다. 슬픔도 기쁨도 가치도 나누지 못한다. 오프 모임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SNS의 관계는 더 빈약할 테다. 나의 삶도 마찬가지다. 가족도, 이웃도, 직장 관계도 소원하다. 점점 혼술이 좋다. 주식도 망했다. 손절할 수 없어 호가창만 바라본다. 이렇게 개인의 사사로운 목표에 집착하는 시대에 공동체라니. 공동체를 호명하는 누군가가 있는 것만으로도 신기한데, 공동체에서의 평등을 논하는 게 마치 농담 같기도 했다.
농담 같은 이야기를 현실로, 삶으로 끌어와 진지하게 토의하고, 실천해 나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행성인이다. 평등한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해 약속문을 어떤 방식으로 개편할까. 행성인 1월 모임 주제였다. 뒤늦은 자기소개를 하자면, 나는 후원회원이고, 행성인 모임은 처음이었다. 약속문을 함께 낭독했다. 함께 무엇을 낭독하는 일이 어렸을 적 교회에서 주기도문을 외웠던 이후로 처음이라는 누군가의 고백은 나의 고백이기도 했다. 한 문장 한 문장 눈으로 읽고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니 문장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왔다. 읽는 동안 우리 모두가 그 방향으로 가겠다고 약속하는 것만 같았다. 조금 낯설기도, 설레기도 했다. 낭독이 끝나고, 두 개의 조로 나눠 평등한 공동체를 위한 각자의 질문과 생각들을 마인드맵 형식으로 적었다.
안전, 억압, 신뢰, 부담, 포함으로 시작된 키워드는 자유롭게 뻗어나갔다. 곧 A2 사이즈의 빈 종이가 채워졌다. 비판과 비난의 경계는 무엇인가? 누군가의 질문에 다른 이가 줄을 이어 꼬리를 무는 생각을 적는다. 어떤 의견도 ‘일단’ 수용하기란 누군가의 문장에 누군가는 별을 그린다. 안전과 신뢰가 이어지고, 신뢰는 친구로 연결된다. 신뢰로 연결된 친구는, 비판을 하면서도 관계가 깨지지 않으리라 믿는 관계일 테다.
이런 말들도 있었다. 지적하는 문화가 되지 않게. 상대에게도 생각할 시간을 주는 마음. 이 문장은 다시-어떻게 지적하는가-로 연결되고, 불편한 것을 말해도, 말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개인-은 다시-안전-이란 키워드로 수렴되었다. 포함은-무엇이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느낌을 줄까-라는 질문으로 연결되었다. 100 퍼센트의 완벽한 답은 아닐지언정, 먼저 말 걸기 또는 친근한 주변의 눈빛-라는 단순하지만 어려운 실천적 문장이 제시되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친구가 되고, 친구는 신뢰를 거쳐 안전에 이를까. 모든 키워드들을 채워나가면 평등한 공동체가 완성될까. 평등한 공동체로 나아가려는 그 모든 말과 몸짓이 우리를 그 방향으로 데려간다는 걸 우리는 안다.
모임 중간중간 친근한 눈빛을 보았다. 조나단님의 눈빛이었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동안, 반짝이며 응시하는 동그랗게 커다란 눈빛은 무엇이든 말해도 된다는 안전한 신호 같았다. 나를 향하는 눈빛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눈빛이 A2 종이에 적힌 문장에 대한 행성인의 응답이자 실천 같았다. 소감을 나누는 마지막 시간, 감동이란 키워드가 자주 언급되었다. 천천히 흐르던 목소리들이 오해 없이 안전하게 서로에게 당도한 듯했다.
나는 약속문을 어떻게 개편해야 할지는 모른다. 다만 우리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약속문을 기억하고 다시 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점에서 행성인이 보여주고 있는 노력은 이미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힘껏 안아주고 싶다.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몰라 쓰는 동안 윌 버킹엄의 <타인이라는 가능성>을 뒤적였다. 평등한 공동체에 대한 해답이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문장을 발견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바로 상호의존이 펼쳐지는 여러 다양한 방식 사이의 선택이다’ 이 문장은 행성인의 질문이자, 우리가 A2에 함께 적어나간 문장의 요약 같다. 행성인이 이미 그곳에 서 있음을 그리고 계속 나아갈 것을 안다. 그러는 동안 행성인의 말들이 더 멀리까지 전해지기를.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가는 평등한 공동체의 영토가 더 확장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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