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6일 전국여성대회 참가기-

 
“아저씨, 여기에 뭐라고 적어야 돼요?”

정신없이 성소수자 노동권 팀의 브로슈어를 나눠주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소매 끝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뒤를 돌아다보니 여덟 살 남짓해 보이는 소녀가 서있었다. 소녀는 겁 많아 보이는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게 뭔데 그러니?”

나는 몸을 수그려 소녀와 눈을 맞췄다. 내가 눈을 맞추자 아이는 손에 들린 종이를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그것은 민주노동당 여성위원회에서 준비한 ‘직접 쓰고 만들어 보는 손 피켓’이었다. 아마도 알록달록 꽃종이로 꾸밀 수 있게 만든 것이어서 소녀의 시선을 끈 모양이었다.

“글쎄, 뭐가 좋을까.”

나는 주위에 널려있는 피켓과 팻말들을 서둘러 살펴보았다. 소녀에게 적당한 문구를 가르쳐주기 위해서였다. 퍼플잡 도입 반대? 아니면, 낙태 단속 반대? 적당한 문구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린 소녀가 이해하기에는 아직 좀 어려울 것 같다.

“뭐라고 쓰지?”

소녀가 혼잣말 했다. 아이의 얼굴은 금세 시무룩해진다.

나는 아이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떼었다.

“그냥, 여성 차별 반대. 그렇게 써.”

소녀는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짓더니 단풍잎 같은 손으로 또박또박 ‘여성 차별 반대’라고 적는다.

 

2010.3.6 전국여성대회 캠페인




3월 6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는 점점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 세계 여성들의 권리 신장을 주장하는 3.8 여성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동인련도 이 날 행사에 십여 명의 회원들이 모여 참가했다. 회원들 모두 최근 낙태 단속과 퍼플잡 도입 등으로 드러나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여성 억압에 분노를 느끼고 있던 차였다.


거창하게 ‘여성 억압에 대한 분노’라고 썼지만 동인련 회원들이 느끼는 그 감정은 아마도 개개인별로 매우 달랐을 것이다. 누군가는 레즈비언으로서 성소수자 차별과 여성차별이라는 이중의 차별을 몸소 겪고 있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러한 레즈비언 친구를 둔 게이로서 그들이 겪을 아픔에 충분히 공분했을 것이다. 아니면 누군가는, ‘모든 억압은 서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 억압의 문제도 성소수자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좀더 의식화된 신념을 가지고 이 날 여성대회에 참여했을 것이다. 뭐가 되었든, 여성 차별의 문제는 엄마와 누나들, 혹은 언니들과 함께 살아가는 동인련 회원들에게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우리의 문제였다.


어쩌면 내 경우엔 여성차별문제에 대해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가슴으로 이해하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고백하건대, 나는 투철한 ‘게이’ 페미니스트인 나의 파트너와 이런저런 관점의 차이로 옥신각신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언어가 서로 다른 우리 커플이 언어의 장벽을 넘어 도달하게 되는 바로 그 지점에는 항상 ‘더 나은 세상’이라는 동일한 목표가 자리하고 있었다. ‘더 나은 세상’이라는 말은 영어로 들으나, 한국말로 들으나, 여성의 목소리로 들으나, 남성의 목소리로 들으나 같은 종류의 따뜻한 울림이 있는 것 같다.


차별없는 일터! 우리함께 만들 수 있어요. 포스터




동인련은 이 날 여성대회에서 ‘평등한 사랑, 평등한 노동’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성소수자 노동권을 주장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대학로 한복판에서 무지갯빛 가면을 쓰고 서있는 동안, 나는 아련하게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꿈을 보았던 것도 같다. 대다수가 이성애자 여성들로 보이는 참가자들이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것만 같은’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 모습에서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더 나은 세상’은 바로 거기서부터 첫걸음을 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동인련 회원들이 단상 위에 올라 ‘성소수자 노동자가 바로 여러분 주위에 존재하고 있다’고 커밍아웃하던 순간은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기억이었다. 단상에 올라 ‘성소수자에게 좋은 것은 여성에게도 좋다’는 강력한 연대의 메시지를 외치며 우리는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향해서 올바르게 나아가고 있다는 강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다. 이 날 뒷풀이 자리에서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긍지를 함께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성소수자 인권활동가였던 하비 밀크가 했던 것처럼, 좀더 많은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행동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했다.

“자, 웃어!”

소녀가 ‘여성 차별 반대’라고 적힌 손 피켓을 들고 카메라 앞에서 웃어보였다. 어색하게 웃는 소녀의 손가락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장난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손가락 위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플라스틱 토끼는 반지의 주인처럼 깜찍하고 귀여웠다.



2010.3.6 전국여성대회 캠페인




나는 주머니에서 동인련이 만든 버튼 하나를 찾아내 소녀에게 건넸다. 버튼에는 ‘Fight for your Rights'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몇 년 전 퀴어 퍼레이드에서 성소수자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힘내야 한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이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서 사람들 사이로 멀어져 간다. 소녀는 고개를 돌려 흘끗흘끗 내 쪽을 바라보았다. 자꾸만 뒤돌아보는 소녀의 겁먹은 눈동자에서 두려움과 함께 ‘더 나은 세상’의 희망을 발견했던 것은 단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환영처럼 사라져간 아이의 뒷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해와 _ 동성애자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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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달팽
    2010.03.30 12:30 [Edit/Del] [Reply]
    대학로 마로니에는 우리에게 늘 좋은 기운을 주는듯....
    간혹 당황스러웠던 캠페인도 있었지만.. HIV.AIDS, 청소년 등등 할 때마다
    우리에게 좋은 시선, 호감을 보이고.. 궁금함을 풀려고 벽을 허물고 다가서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뿌듯해요~!!!!

    4월 25일에도... 봄꽃피우며 자신있게 놀아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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