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행성인 HIV/AIDS인권팀)
들어가며
게이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써달라고 부탁받았지만, 정작 난 의사만큼 신체에 대해 알지 못하고, 성교육자만큼 섹스에 대해 잘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똥꼬에 박히면 왜 좋냐고? 나도 이유를 모른다. 그건 창조주한테 가서 따지던가. 무신론자면 진화생물학자한테 가서 “왜 전립선이 그딴 위치에 있냐”라고 따지던가. 하지만 섹스 앞에 놓인 인간들에 대해 논의한다면 할 말이 많아진다. 딜도 대신에 왜 남자 자지를 선택하셨나요? 우스갯소리로 인권을 유지하는 대신 왜 포기하길 선택하셨나요?라며 말이다. 정확히는 쉽게 피나고, 분노하며, 무언가 지리고, 그러다 누군가는 절망하는 섹스 앞에 놓여 세금과 함께 자신도 축내는 위험한 게이들에 대해 말이다. 나도 그렇지만.
고통은 쾌락을 가능케 하고, 위험함은 안전함을 담보한다.
게이들의 섹스에서 “좆도 존나 작은 새끼가 박히니까 좋냐?”라는 말은 섹스적 허용으로 대부분 넘어가지만, “'아이깨끗해'(핸드워시 브랜드)나 쓰는 거지새끼”라는 언어 사용은 많은 경우에 허용되지 못한다. 정의의 법정에선 모욕죄로 기소조차 안되는 계급적 희롱보다 좆도 작다는 성희롱이 더 큰 벌을 받지만, 항문 앞 욕망의 법정에선 성적 모욕에 대해 정상참작을 해주는 것이다. 욕망의 강렬함은 우리를 실수로 이끌고 결국 고통을 가져오곤 한다. 그렇기에 규칙도 없이 고추와 애널 앞에서 섹스하는 인간들은 무정부 상태에 빠져있는 것이 확실하다. 섹스를 하고 또 해도 끝없이 허전한 고추는 세상을 자기 속으로 한없이 끌어들이려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것 같다. 아무리 물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깨진 그릇처럼, 욕망을 충족시키려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은 계속해서 결핍을 호소한다. 그리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렇지만 욕망을 통해 인간은 외부 세계와 관계 맺는다. 섹스라는 원초적인 행위의 존재는 인간의 기본적인 역할들을 세상에 공시한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이는 애널섹스에선 탑과 바텀으로 불린다. 그리고 각자 위치에 맞게 이런 이름들이 붙여지는 순간, 나는 '우리'에서 분리된다. 생명의 탄생처럼, 탑과 바텀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당하는 것은 나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인정받게 한다. 그로 인해 존재함의 역학은 추동된다. 탑에게 아무리 짓밟혀도 짓밟힐 수 없는 바텀의 생기를 내보이는 것. 아님 생기를 내뿜다가 바텀을 짓밟음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내보이는 것. 그래서 모두가 똑같은 세상의 틈에서 자신만의 생기로 균열을 일으키는 것. 그렇게 예외가 됨으로 자신의 의지를 증명하는 것. 증명의 대가로 쾌락을 얻는 것. 그것이 노예든, 주인이든 그리고 탑이든, 바텀이든 누구든지 이런 압제적인 관계에서 구원을 얻는 이유다. 자신만의 고통이 모여 관계의 쾌락을 요청한다는 원리는 섹스를 가능케 하고 우리의 주체적인 존재를 증명한다.
이러한 관계 맺음의 방식은 쌓이고 쌓여 브레스 컨트롤(목을 조르는 섹스 플레이), 강간(일방적인 느낌을 주고받는 강간플레이 또는 대중들이 가지는 강간에 대한 판타지를 의미함. 상호 동의 없이 진행되는 성적 폭력을 의미하지 않음)과 같은 폭력적이고 위험한 섹스 플레이들까지 정당화한다. 타인에 대한 근원적 불안이 있는 인간은 관계를 쌓기 전 미리 확신을 만들고 싶어 한다. 불안함에 대한 보증을 서줄 경험들이 필요한 것이다. 바텀이 먼저 요청한 폭력적인 섹스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믿음이 담보되어야 한다. 바텀에게는 탑이 자신의 신체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도, 죽음과 쾌락이 겹쳐 혼재된 회색지대에서조차 신체를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준다. 그리고 신실한 바텀짓은 탑에게 바텀의 이행 능력을 입증한다. 그렇게 수많은 플레이들이 차곡차곡 역사를 이루면서 섹스는 관계 맺음의 도구이자, 관계를 회복하거나 증진시킬 수 있는 상징이 되었다. 우리가 이정표를 보고 길을 찾듯이, 상징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
품질 좋고 값도 싼 섹스라는 게 있나요? : 게이들의 섹스는 어떻게 타락했는가
앞에 장황하게 이론적으로 설명한 대로 세상이 흘러간다면, 법은 공정명대하고, 정치는 통합을 이루고, 경제는 평등을 달성할 것이다. 경영자, 회계사, 정치인 등 전문직업인들의 일자리를 대체한 철학자 교수들이 플라톤의 말처럼 세상을 단일하고 완벽한 원칙으로 통치할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은 어떤가? 애널이 쓸리는 고통보다 무서운 hiv 감염인에 대한 낙인이 기다리고 있는 세상이다. 섹스하다 피가 난 애널에 ‘우연히’ hiv 바이러스가 휘말릴 순 있지만, hiv 감염인에게 닥치는 사회적 낙인은 ‘필연적이다’. 자원을 낭비하고 지구를 파괴하는 위험한 소비가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합리화되지만 위험한 섹스는 '세상을 망친다'고 비하한다. 탐욕스럽고 일방적인 자본의 야수는 필요악이라 여기지만 상호적으로 합의된 게이들의 욕망은 필연코 더러운 짓이다. 두 행위 모두 결핍에서 오는 건 똑같지만 말이다. 그렇게 자본과 소비라는 탈을 쓰고 인간의 신체와 유리된 관념들이 우릴 옥죄인다. 관념의 다른 말은 개념이고 이는 곧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규정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게 우리는 소비하는 인간으로서 규정당하고, 자본으로만 사회와 얽히기 시작한다. 그렇게 나 아닌 것들이 나를 점령하기 시작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정상으로 여겨지지 않을지라도 구성원 모두가 권리를 보유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형식적 평등'의 가치니까. 하지만 모든 인간이 평등을 좋아하는 것도,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인간들로 인식되는 것도 아니다. 이럴 때 권리는 자유라는 이름의 형식적 평등 속에서 실질적 차별화를 가능하게 해줬다. 거기다가 욕망을 수치화하는 자본은 차별화를 가속시켰다. 결국 인간인 게이들의 욕망은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사회가 규정한 안전함과 일반함에 대한 압력은 이와 독특한 형태로 결탁하기 시작했다. 호모들은 호모끼리 종로와 이태원에서 자유롭게 모이고, 정상인들은 정상인끼리 자유롭게 어디선가 모이는 것처럼. 그리고 호모도 아니고 정상인도 아닌 회색지대 앞에 선 어떤 물음표 인간에겐 정상인과 호모들을 스스로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는 환상을 제공하기도 했다. 자신을 차별화하고 싶을 때는 게이 자아를 선택하고, 반면 타인과 동질감을 느낄 수 싶을 땐 안전하고 일반적인 사회적 자아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분리하되 평등한 세상의 등장이었다.
그렇게 마음껏 선택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진 게이들은 폭주하기 시작했다. 선택할 수 없는 타인과 섹스로 더 이상 휘말리지 않는다. 대신에 자신이 원하는 섹스 판타지에 맞는 인간들을 고르기 시작한 것이다. 섹스가 관계의 수단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닌 종착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권리에 의무가 함께하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하듯이, ‘선택’의 논리에선 책임지고 보증할 의무들이 생긴다. 무언갈 얻기 위해 또 다른 무언가를 버려야 한다는 비극은 그들이 지향하는 섹스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좋은 섹스를 하기 위해 끝없이 시간과 돈을 투입해서 몸과 얼굴을 만들어야 하고, 판타지를 달성하기 위한 노동도 투입해 품질 좋고 매력적인 섹스 상품을 찍어내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 살기 위해 섹스하는 것이 아닌 섹스하기 위해 사는 주객전도가 이루어졌다. 섹스가 욕망의 직접적인 대상이 되어 타락한 것이다.
섹스를 하는 게 아닌 성적 서비스를 거래하고 구매하는 게이들 : ‘노예섭’과 ‘표준 섹스’의 등장
‘로또 당첨되면 뭐 하지?’라는 생각, 당신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살면서 한 번씩은 해본 질문이다. 그 질문 기저에 놀고먹고만 싶다는 욕망이 숨겨져 있다. 누리고만 싶다는 욕망 말이다. 소비의 욕망은 섹스가 상품이 되어버린 게이들 세상에도 침투했다. 섹스라는 상품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정량요소인 키와 몸무게, 근육량을 따지고 정성요소인 외모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뿐만 아니라 회계에서 운송비용으로 불리는 대실비, 교통비, 또는 임대료 등의 간접적인 비용까지 고민해 합리적인 소비자가 돼야 한다.
게이들은 이제 쿠팡과 아마존 '대신' 잭디와 그라인더를 킨다. 하지만 방식은 똑같다. 쿠팡의 방식대로 키, 몸무게, 인종 필터들을 통해 상품들을 분류하고, 배달팁 순으로 배달 음식을 고민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거리 순으로 정렬해서 간추린 대여섯 명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당근 채팅에서 보여준 상대방의 비매너는 잭디 대화창에서 반복된다. 그러다 거래 조건을 잘 협상하여 ‘남’의 집에 도달한 어떤 게이는 상대방에게 성적 서비스 교환 거래를 시도한다. 합리적인 고민 끝에 암묵적 키스로 싸인한 그들은 피스톤질을 예정한다. 그렇게 섹스가 생산된다. 결국 정액으로 뒤덮인 시트는 이들의 생산과 소비가 합리적이었다고 증명한다.
회사에 앉아 월루하는(월급 루팡의 줄임말. 월급 도둑이라는 부정적 의미보단 놀고먹고만 싶은 배짱이가 되고픈 현대인의 욕망을 상징하는 긍정적인 의미를 가짐) 평범한 직장인처럼, 게이들의 머릿속에선 “어떻게 해야섹스할 때 내가 더 큰 쾌락을 가져가지?”라는 고민들로 채워진다. 섹스할 때조차 내가 합리적인 소비를 했는지 성찰해야하는 게이 소비자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제 소비자가 된 게이들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용을 얻을 수단을 강구한다. 그렇게 이반시티(게이들의 인터넷 커뮤니티. 이반시티를 말하면 보통 원나잇 대상을 찾는 ‘이반시티 우리 동네 게시판’을 의미한다.)에서 종종 보이는 ‘노예섭’은 그러한 강구 끝에 진화한 게이 소비자의 전형이다. ‘노예섭’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척만 한다. 애초에 노예는 이반시티에서 마음껏 글을 올리며 자신을 ‘노예’라고 선택할 수 있는게 아니라 핏줄에 의해 결정되는 부조리한 사회적 악습인데도 말이다. 뚱뚱한 게이도 사절. 늙은 게이도 사절. 그렇다고 마르고 젊은 사람도 주인 답지 못해서 사절. “ㄸㅌㅈㄴㅈㅅ('뚱퉁중년죄송'의 초성만 딴 줄임말)”과 “남자다우신 분만”, 인권하는 게이도 아닌데 “활동하시는 분은 사절(나의 경우 '활동하시는 분 사절'을 본인 프로필에 쓴 게이에게 활동의 기준은 뭔가요?라고 물어봤다가 결국 만남이 끝난 다음 차단당했다. 자기도 명확한 기준이 없어 보였다)”과 같은 표현들로 ‘노예’가 스스로 주인을 선별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선별된 주인은 ‘노예’라는 단어 속 원하는 걸 대신 해줄 사람이 나타났다는 환상에 홀려, 그리고 자신이 노예를 부릴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결국 ‘자칭 노예’에게 묶이게 된다. 멍청한 주인은 언제까지나 노예를 다룰 권리를 이 관계 안에서 가진다. 하지만 관계를 종료할 권리는 ‘노예섭’('섭'은 submission, bdsm에서 피지배와 복종의 역할을 하는 이를 가리킴 참고로 지배 역할은 '돔(dominant)'이라 부름)만이 소유한다. 주인을 선택하고 자신을 스스로 노예라 칭해 관계를 시작한건 언제까지나 ‘노예섭’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의 주인을 고른 ‘노예섭’은 돔에게 페티시를 이행시킬 채권도 가진다. 주인은 그저 노예를 물리적으로 움직이게 다룰 수 있다. 정작 그 내용은 노예가 고르지만. 단적으로 (위에 언급한) '아이깨끗해'로 모욕은 안되는데 성적 희롱은 가능한 섹스가 있다. 마음껏 부리고 선택할 수 있으며, 자신에 맞게 생산해낸 섹스 판타지를 돔을 통해 즐기는 ‘노예섭’은 현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게이 소비자에 불과하다. 그저 권리를 포기한 척 하지만, 자기 권리를 자기가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권리라는 사실을 잊은 채 말이다.
노예섭도 평범한 소비자라면, 평범한 소비자를 위한 일반적인 ‘표준 상품’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초코과자를 생각하면 초코파이를 떠올리고, 스테이플러를 찾을 때 호치캐스를 외치는 건, 우리 머리에 ‘표준 상품’들이 박혀있는 평범한 소비자이기에 가능한 결과다. 물론 표준 섹스를 명시한 법과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군형법 92조 6항을 보면 게이 섹스 자체가 비표준 섹스다) 하지만 표준 섹스가 있는 것처럼 많은 게이들이 행동한다. 남자 앞에서 남자다운 사람을 찾고, 게이 데이팅앱 프로필에서 이성애자 다움을 운운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비교할 잣대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진짜 남성’과 ‘이성애자 같은 게이’와 같은 유령들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 소비한다. 이렇게 생각조차 구매하는 게이 소비자들의 존재는 우리에게 표준 섹스에 대한 수요가 가득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게 한다. 그리고 진짜 남성과 일틱함은 차차하더라도, ‘안전한 섹스’에 대한 환상이 표준 섹스의 존재를 담보한다. 이미 전 사회적으로 ‘안전함’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일반적인 가치’임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이 커뮤니티에서 ‘안전한 섹스’의 존재는 여러 측면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주제라,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자세히 설명하겠다)
섹스를 포기한게 아니라 포기당한 게이들
본질은 간데없고, 표준 섹스라는 껍데기만 남았다. 우리가 섹스라는 내용을 채워가는 게 아닌, 섹스가 우리를 규정한다. 언더웨어(상탈) 파티(옷을 벗고, 성기를 수건으로 가리거나, 하네스를 입는 등 여러 방식으로 성적 맥락을 극대화한 파티)를 여는 게이 클럽들이 이태원 등지에서 성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시 언더웨어 파티를 하며 인바디 점수에 따라 입장객에게 무료 삼페인을 제공하며 인기를 끈 신생 V 모 클럽, 올해 들어 달에 한번 이상 언더웨어 파티를 여는 E 모 클럽이 그런 사례다. 이전에는 게이 찜질방에서는 락커열쇠로 성향을 알렸지만, 클럽에선 어떤 체형을 원하는지, 그리고 어떤 크기의 고추를 원하는지에 따라 색이 나뉜 팔찌를 입장객들에게 채운다고 한다. 상품들이 물류센터에서 분류되어 주문자에게 배송되는 것처럼, 인간도 분류되어 정해진 섹스에 배치되는 격이다.
그리고 언더웨어 파티 유행에 처음 참여한 T 모 클럽은 앞선 사례와 다르게 모든 몸을 환영한다고 클럽 측에서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환대는 클럽 참여자에 도달해선 작동하지 않는다. 클럽측이 설명한대로 모든 몸에 수요가 있는건 당연하지만, 위의 후기처럼 어느정도 유의미한 수요여야지 클럽의 언더웨어 파티까지 올만한 규모가 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열려있지만, 선택은 한정적이다. 분리하되 평등한 세상이 게이들에게도 닥친것이다. 하지만 불평등한 기준으로 분리한다는 걸 대부분의 게이들은 까먹은채 이 세상이 평등하다며 믿는다. 그 누구도 섹스와 욕망에 대한 기준을 객관적으로 제시한 적 없는 데 말이다.
이렇게 분류하지 않으면 불을 환하게 키고 타인을 마음껏 식별할 수 있도록 한다. 게이들의 성적 욕망을 타깃으로 한 업소들이 무차별적이고 어두운 크루징의 장소보다는 자신이 섹스하고픈 대상을 찾을 수 있도록 알선하는 오프라인 플랫폼의 성격으로 변한 것이다(한강 이남의 J 업소가 그렇다). 이런 현상은 섹스라는 현상 자체를 즐기고 싶은 게이들이 줄고, 섹스라는 환상에 빠진 게이들이 늘고 있다는 의미다. 환상이야말로 대상을 극한으로 차별화하여 인간의 눈을 가리는 우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공간에서 소위 '잘 팔리는(섹스 심벌에 가까워 인기가 많은 게이들을 칭할 때 쓰는 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게이 섹스의 상징이 돼가며, 그들이 가진 여러 속성들, 이를테면 짧은 머리, 큰 가슴, 각진 얼굴들이 표준 게이 모형을 규격해나간다. 수능에서 '서연고', 아파트에서 '한강뷰'가 기능하는 표준 신화처럼 커뮤니티 내 표준 규격이 게이들 마음속에 새겨진다. 그렇게 새겨진 이미지는 경쟁과 고난에서 이기고 트로피를 쟁취하도록 게이들을 헬스장과 피부과에 밀어 넣는다. 계속되는 경쟁과 고난에서 탈락자와 포기자는 속출하며, 그들조차 “자기관리를 해야 했다며” 스스로를 패배자로 여긴다. 섹스가 표준화, 규격화돼가며 규정되는 순간마다 소외되는 게이들은 폭증한다. 모든걸 선택할 수 있는 거대한 자유 앞에서 게이들이 소외되기 시작한 것이다.
규정되어 고정된 가치들로 타인과의 관계의 우위를 선점할 수 있다는 믿음은 타인이 야기하는 원초적 위험함에 대한 공포를 사라지게 만든다. 한 술 더 떠서, 섹스를 정해진 비극의 길로 이끌게 한다. 순간적 공포는 영원한 마비로 대체된 채, 타인과 나 자신까지도 각본에 포섭해가며 우리를 비극으로 내몬다. 누군가는 무서운 것들을 절대화함으로써 불안을 극복하려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좋은 것들을 탐닉함으로써 불안을 잊으려 한다. 결국 비극에 도달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타락한 섹스를 버릴 순 없다. 오용이 필요를 없애지 못하는 것처럼,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이 섹스는 인간관계에서 불가결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기에 오히려 더욱 더 지켜야 한다. 단지 우리는 섹스를 규정할 수 없으며, 안전해질 수도 없고, 목표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느껴야 된다. 그렇기에 섹스의 결과는 매번 변하고, 그러기에 가끔은 실패하겠지만, 우리 안에 심어져 있는 미지에 대한 욕망을 가능한 모두에게 펼쳐보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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