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넛(행성인 HIV/AIDS인권팀)
아주 오랫동안, 그러니까 제작년이나 작년 초만 하더라도 HIV가 나랑은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내가 감염인도 아니고, 내 주변에도 없는 것 같고, HIV 감염인들(이하 'PL')은 내가 어느 정도의 관심을 가지고 도와줘야 하는 사람들, 혹은 내가 펑펑 울면서 보는 '렌트' 같은 뮤지컬이나 '잇츠어신' 같은 드라마, 혹은 여러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비극적인 서사의 주인공들이라는 것이, 지금은 믿기 힘들지만 내가 과거에 가졌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서보경 작가의 '휘말린 날들'에서는 HIV가 비단 PL이나 에이즈 환자 당사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며, PL들의 서사와 퀴어의 서사가 얼마나 많이 겹치고 닮아 있는지 서술한다. PL들의 이야기는 사회 전체와 역사와 정치, 그리고 퀴어들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혐오를 품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우기, 혹은 지워지기
내가 (흔히 퀴퍼라 불리우는) 퀴어문화축제에 가서 혐오세력을 마주할 때, 혹은 행성인의 이름을 달고 참여하는 자리에 가서 지나가는 사람들 앞에 서 있을 때 느끼는 혐오나 검열의 시선, 혹은 약간의 공포가 존재했다. 처음에는 몇 시간만 그러한 시선을 마주해도 당황하고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이를 훨씬 더 오랜 기간 동안, 나와는 깊이부터 다른 차원으로 느낀 사람들이 있었다. 『휘말린 날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담담하지만 강력한 어조로 풀어낸다.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누군가를 타자화하거나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려는 습관을 지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시공을 초월한 습관이 누군가를 죽이거나, 혹은 살아 있다 해도 사회적으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로 만들 수 있다. 수십 년 전 미국에서 에이즈가 점점 더 큰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HIV 바이러스가 (주로 남성) 동성애자들과 연관되어 이해되기 시작한 이후로, PL은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에 상관없이,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타자화되고 가족, 친구, 사회적 지위, 일자리와 같이 사회에서 하나의 인간으로 만든 모든 것들을 빼앗길 위험에 놓여졌다. 이미 존재하던 퀴어에 대한 혐오를 국가와 제도와 사회가 공공의 건강이라는 명목 하에 합법적이고 체계적으로 펼쳐나가는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종교적이고 광신도적인, '문란한 섹스'에 대한 검열이 시작되었다. 퀴어와 PL의 섹스는 국가가 검열하고 제한해서 사회에서 병균과 비정상성을 치워 버려야 하는 것이 되었다. 합법적 혼인 관계의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성과 여성의 섹스만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고결하고 깨끗하고 '정상적인' 것이라는 패러다임은 수천 년 전 그리스도인들이 신의 이름으로 만들어 낸 이후로 서양권뿐 아니라 전 세계를 지배했고, 1980년대 미국에서 에이즈에 대한 공포를 비료삼아 또 다른 열매를 맺었다. 시스젠더가 아닌 자를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은 자신의 '성향'을 이겨내고 정결을 지키기 위해 더럽고 비정상적인 성교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선포는, 그저 성경책이나 교리서에 적힌 윤리가 아니라 법과 제도적 지침이 되었다. 이 책에서 종교적인 패러다임을 크게 논의하지는 않지만, 나름 독실한 종교인인 나로서는 유사성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논의해 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사회적 공동선, 혹은 신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위해 '문란하지 않은' 시스젠더 이성애자의 섹스만을 허용하는 이데올로기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아남을까. 또 어떤 이슈에 힘입어 혐오를 만들어낼까.
건강과 선의와 혐오, 그 사이 교묘한 간극
심지어 에이즈에 대한 치료법과 약이 개발된 이후에도, PL에 대한 혐오는 당연히 끝나지 않는다. 『휘말린 날들』은 본격적으로 한국의 PL을 이야기한다. 세부적인 맥락은 다르겠지만 퀴어와 PL에 대한 혐오는 어느 나라에나 다 존재하지 싶다. 하지만 내가 조금 더 잘 아는 곳, 내가 고향이라고 부르는 땅에서 펼쳐지는 PL에 대한 지우기와 차별에 대한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페이지를 넘기게 했다.
주한미군에게서 처음 관찰된 한국의 HIV 감염 사례는 한국인들에게도 퍼져 나간다. 이번에도 당연히 HIV 감염에 더 취약하고 사회적으로도 더 취약한 성노동자 여성들, 그리고 퀴어들에게 집중한 제도적 검열과 낙인이 시작된다. 제도적으로 자립해서 살아갈 구석이 없고, 의료적 서비스를 제한당하고, 사회적인 연결 고리가 끊어진, 한 마디로 '지워진' PL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의료인조차도 질병에 대한 과학적으로 올바른 지식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받아 마땅한 치료와 의료조치를 거부한다. 애초에 HIV 바이러스에 대한 조치가 PL을 사회에서 격리하고 치워 버리는 것에 초점을 맞췄으니 어떻게 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그렇게 전파매개행위죄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객관적인 사실과 HIV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애써 외면하고 PL의 섹스를 지우려는 이러한 혐오적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U=U(꾸준한 치료를 받아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은 PL은 HIV를 전파하지 않음)가 국제적으로 공인되고 PrEP 예방법이 상용화되면서 감염인이 바이러스를 전파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괴물이라는 오랜 레토릭이 힘을 잃은 지금도(2023년 10월 26일, 헌법재판소는 사회 안에서 수십 년간 반복된 혐오적인 표현이 들어가 있는 판결문으로 전파매개행위죄에 대한 합헌 판결을 내렸다. 판결문의 내용에서 어느 정도 희망을 걸어 볼 만 하다고 판된되는 부분을 찾을 수는 있었지만, 나는 그럼에도 합헌이라는 최종 결과에 실망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아직도 계속되며,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인 혐오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PL이 기회감염으로 인해 에이즈 발병이 시작되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그들은 요양병원과 같은 시설에 의존해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 놓인다.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개인 사업자의 선의에 의존하면서 자신이 살아온 터전에서 자립하여 살 수 있는 인프라는 제공받지 못한다. 사회는 그들을 차별하고 세상 안에 그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한 번 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에이즈 환자들은 원할 때 퇴원도 하지 못한다. 그들을 받아주는 병원이란 대개 관리가 소홀하고 시설이 열악한 병원일 것이고, 이들의 병상에 할당된 예산이 의료기관에 가져다주는 경제적 이윤 때문에 이들은 퇴원은 물론 애초에 사회로 다시 나갈 기회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제도는 HIV/AIDS와 감염인에 대한 혐오를 방관하고 어쩌면 조장하면서 이들이 밖에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의료시장으로 하여금 그들로부터 이윤을 창출하는 행태를 보여왔다.
비단 국가의 제도나 의료기관 뿐 아니라, HIV/AIDS 예방약과 치료제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높은 가격에 판매하며, 동시에 프라이드 퍼레이드에 많은 돈을 후원하면서 행사 차량을 행진시키는 특정 초국적 제약회사도 이러한 오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책에서 논의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환자들과 PL의 건강을 담보로 쥐면서 치료제 특허권을 행사하고, 핑크워싱으로 이미지를 세탁하며 퀴어들이 연대하며 삶을 축하하는 자리에 염치없이 축하하는 일을 꺼리지 않는다. 교묘하게 포장된 혐오로 돈을 버는 데 혈안이 된 그들이 비즈니스를 하는 방식은, 시설을 운영하는 의료기관과 국가 제도와 마찬가지로 비인도적이며 모순적인데, 이러한 행태들은 HIV/AIDS 이슈에 관심이 없는 (퀴어를 포함한) 사람들이 간과하기 쉽다. PL과 그들의 친구들은 오늘도, 내일도, 제도와 법뿐 아니라 거대한 기업에 맞서 싸우는 여정에 오른다.
그럼에도 거룩한 사랑됨
PL,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퀴어한 맥락에서 새로운 가족이 된 이들은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적인 프레임에서 매번 감염되거나 희생당하고 사회에서 배제되는 수동적인 이들로 보여지고,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는 언어를 적용받는다. 책의 저자인 서보경은 이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감염되다'라는 피동형 표현이 아닌, '감염하다'라는 언어를 사용하며 능동태도 수동태도 아닌 '중동태'를 제안한다. 중동태는 PL과 바이러스, 제도 사회 중 어디에도 편향적인 주도권을 부여하지 않으며 PL과 바이러스의 관계, 혹은 상태를 묘사한다.
참신한 제안에 감화하면서, 나는 여기세 또 다른 새로운 '중동태' 동사 표현을 제안하고 싶었다. PL과 퀴어가 서로뿐 아니라 세상과 맺는 관계는 제도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의 모델과 맞지 않지만 혐오적인 이분법을 거부하며 있는 그대로의 정체성과 몸뚱아리를 받아들이는, 이상한(queer), 퀴어한(Queer) 관계이다. 이는 앞에서 말했던 종교적 패러다임의 맥락과도 연관지어서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이천 년을 이어 온 그리스도교의 패러다임을 한순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퀴어 신학자와 운동가들이 PL과 퀴어의 서사로 종교적 패러다임을 다시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구원하지만, 인간 편에서의 신을 향한 의식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교리이다. 신은 인간을 자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였으며, 그렇기에 인간과 신은 서로 사랑하며 궁극적으로는 끝없는 기쁨과 일치 안에서 영광을 노래한다. 그리스도교 교리에서는 인간과 신 중 어느 한 쪽이 절대적인 주도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저 존재하는 방식 그대로 계속해서 존재하는, 중동태적 관계를 맺는다. 이와 유사하게, 퀴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정체성과 지향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의 사랑을 적극적인 행위로 펼쳐 나간다. 그리고 이를 삶의 방향으로 삼으며 살아간다. 퀴어와 PL을 혐오하기 위해 국가 제도가 참고하고 받아들였던 종교적 패러다임을, 이제는 삶을 축하하는 맥락에서 재고하고 전환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퀴어함을 규정하는 주체가 정부도, 혐오세력도, 대중도, 아니며 퀴어 당사자들 개개인의 퀴어함도 모두 다르다는 점에서, 퀴어함의 동사적 표현을 형용사적 표현인 '퀴어하다'로 그대로 말해 보면 어떨까. 사랑의 행위는 우리 자신뿐 아니라 제도 사회가 끊임없이 규정하려 드는 불화와 교섭의 위에 놓이며, 우리가 태어나고 살아가는 방식은 있는 그대로 이루어지기 앞서 대화를 주고 받으며 서로의 영역을 점하거나 점해진다는 맥락에서 '사랑된다'라고 말해 보면 어떨까. 책에서 제안한 비/감염인의 몸과 바이러스의 새로운 관계를 신과 인간의 중동태적 관계로, 퀴어와 세상, 그리고 퀴어와 비퀴어 모두 퀴어할 수 있는 관계로 관계로 새롭게 읽어 보자. 모두가 사랑되며 궁극적인 기쁨과 일치 안에서 은총으로 살아가는 미래를 그려 보자. 너와 나, 우리, 당신과 그는 퀴어하며 사랑되며 감염한다. 이것을 평생 멈추지 않을 것이며, 세상에 용기 있게 말할 것이다.
HIV라는 이 바이러스에 미래가 있을까. 있다면 어떤 미래일까. 『휘말린 날들』에는 'HIV, 감염, 그리고 질병과 함께 미래 짓기'라는 다소 긴 부제가 붙어 있으며, 이에 책 후반부에서는 서보경 작가가 이 주제를 깊이 있게 논의한다. 사실 HIV에게 어떤 미래가 있을지보다는, PL과 그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어떤 미래가 찾아올지가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질문일 것이다. 모든 생명체와 바이러스는 태어나서 진화하고, 죽어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식으로든 HIV 바이러스에도 미래는 있을 것이다 『휘말린 날들』은 HIV에게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아주 오래된 과거부터 HIV바이러스와 그 전신은 끊임없이 상호 간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하며 살아왔고, 인간의 존재를 형성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바이러스이든 다른 이든 사회 시스템이든, 자신의 신체 밖에 있는 타자를 마주하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자신의 세계 안에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유기체는 그렇게 서로를 침습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며 미래를 지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사회도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제껏 혐오하고 배제해온 것들을 동등하게 끌어안으며 스스로를 새롭게 진화시켜야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PL과 퀴어 인권운동은 이를 가능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미래로 만들 것이라고, 이 책은 전하고 있다.
HIV 문제에 대한 글을 쓰거나 내 의견을 말할 때는 항상 조심스럽다. 『휘말린 날들』의 후기를 쓸 때든, PL 주인공들이 나오는 뮤지컬 〈렌트〉의 후기를 쓸 때든, PL 당사자가 아닌 내가 이들의 이야기를 논하기에 적합한지, 무의식적으로 적절하지 못하거나 혐오적인 표현을 쓰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항상 걱정하고, 한 문장 한 문장을 쓸 때마다 아주 많은 고민을 한다. 이 글을 쓸 때도 한 문장을 고르는 데 10분이 넘게 걸리기도 했다.(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실수를 너그럽게 교정해 주는 행성인 미디어 TF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 이는 『휘말린 날들』의 이야기 전달에 내가 더 큰 놀라움을 느낀 이유이기도 하다. 서보경 작가는 망설이지 않고, 쫄지 않고, 거리끼지 않고, PL과 퀴어들의 서사를 자신만의 문체로 풀어나가며 수십 년에 걸친 이야기를 엮어 통찰력 있는 비유로 설명한다. 나는 그의 담대함에 놀라며, 우리 모두가 좀더 겁없고 거침없는 담론을 나누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책이 퀴어하는 우리 모두의 친구들에게 용감한 서사의 시작이자 돌아보는 지점이 되며, 동시에 책의 내용에서만 그치지 않고 더 많은 상상과 서사와 논의를 이끌어 내는 발화점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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