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벌레(행성인 트랜스젠더퀴어인권팀)
벌써 올해가 끝나갑니다.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한 지도 삼 개월이 지났고, 이곳은 가을과 겨울 사이 어딘가 쯤의 바람이 불어오는 날씨입니다.
막 글을 다 썼습니다. 북미의 트랜스젠더 이론을 공부하면서 김비 작가님의 두 편의 소설을 분석하고 트랜스 페미니즘을 꿈꾸면서 썼습니다. 학술적인 글이었지만 개인적인 마음이 담기지 않을 수 없더군요.
연수의 브런치 글을 다시 읽었습니다. 동지들이 남긴 추모 글도 읽었습니다. 가끔 멈춰서 울었습니다. 조금 후련해진 다음에는 다시 썼습니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공부하고 연구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을 하고 글을 쓰고 연구를 해서 세상을 조금은 바꿀 수 있을까요.
이론적 언어를 정교하게 공들이고 학술적 인용 형식에 신경을 쓰고 소설에 나오는 트랜스 여성의 재현을 의미화하고 언어로 또렷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한 학기 동안 머리를 여러 번 쥐어뜯고 방에서 혼자 소리를 여러 번 질렀습니다.
그러다가도 꽤 자주, 연수가 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적어 내려가는 트랜스 페미니즘에 대한 글에는 연수와 나누던 생각이 담겨 있으니까요. 트랜스 여성과 페미니즘이 연대해서, 주류 여성의 범주에서 탈락한 여성들과 트랜스 여성이 연대해서, 새로운 트랜스 페미니즘을 모색하자. 누가 인간인지로 싸울 게 아니라 우리를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것들과 싸우자.
가끔은 저장해둔 연수의 사진, 연수가 보내주던 짤, 연수와 함께 만들었던 포스터를 들여다봅니다. 잊고 싶지 않아서요. 연수랑 함께한 시간과 연수의 불꽃 같은 마음과 우리의 다짐을요.
쓰고 싶은 글이 있고 읽어내고 싶은 문학이 있고 해결하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트랜스의 자취를 좇고 싶고 성별 규범이 교란되는 지점을 문학이 그려내는 순간을 발견하고 싶고 모르는 존재에 대한 공포의 근원을 찾아내고 싶고 더 명료한 언어로 차별과 혐오를 짚어내고 싶습니다.
연수가 떠난 지금은 사실 무엇보다 다시 연수를 만나고 싶습니다. 못해준 이야기가 있고 못나눈 이야기가 있고 아직 바꿀 게 많은 세상에 대해서 같이 화내주고 싶습니다. 더 든든한 동료이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너를 만나서 너무 고맙다고 너부터 챙기면서 활동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 절박함을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많이 남았습니다.
제가 가지는 특권과 안일함과 무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세상에는 차별과 혐오가 넘쳐나지만 저는 누군가가 저를 모멸하고 미워하고 혐오하고 차별하고 배제하고 제 존재를 지우는 것에 익숙치 않습니다. 여러 교차 지점에서 특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가끔은 트랜스 여성의 재현에 대해 쓰면서 생각했습니다. 나는 어떤 위치성을 가지고 어떤 자격으로 이런 글을 쓰는지.
많은 시간, 연수를 생각하면서 썼습니다. 우리가 나누던 대화를 소설 속에서, 이론 속에서 발견할 때면 아직도 너에게 이것들을 보내주는 상상을 합니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저는 자주 무지하고 또 자주 비겁하게 숨어버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트랜스 인권을 공부하고 외치고 트랜스 문학을 좇는 마음에는 연수가 항상 있을 것 같습니다. 작지만 큰 마음일 것 같습니다. 연수가 남겨준 과제가 많은 것 같아 다시 행성인으로 돌아갈 날이 기다려집니다.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설 때 함께하지 못해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동지들은 언제나처럼 깃발을 휘날리고 경쾌하게 노래를 부르며 투쟁을 외쳤겠죠. 이곳에서는 나서려다 몇 번이고 망설였고 탄핵을 외치다가 동의할 수 없는 발언을 들을 때면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손발이 꽁꽁 얼어버리도록 추운 한국의 겨울에서 광장을 가득 메운 뜨거운 마음들을 지켜봤습니다. 온몸의 감각이 무뎌질 정도로 추웠던 작년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집회에서 함께하던 연수를 떠올렸습니다. 그 날의 추위와 마음은 쉽게 잊히지는 않겠죠.
몇 번의 계절이 지나면 다시 광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나의 위선과 무지가 진저리나게 싫을 때가 있지만 제가 기억하는 마음은 광장에 있으니까요. 글을 쓰다 보면 조금은 그 마음을 지키며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남겨 둡니다.
생각이 너무 많고 자꾸만 자격을 따지게 되는 건 제 고질적인 문제인 듯합니다. 연수가 보고 싶습니다. 지금은 그것뿐입니다. 연수를 생각하는 당신에게 이 글이 닿았다면, 저도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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