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행성인 전 운영위원)
2022년을 시작으로 직장인 활동가로서 길고 길었던 3년의 운영위 활동이 끝이 났다.
소속감이 없어진 것 같기도 하고, 아주 오래된 연인과 이별한 기분이 드는 것을 보면 운영위 활동에 애착이 무척 컸다 보다. 3년간의 활동을 돌이켜보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소회를 남겨본다.
2013년에 행성인에 처음 문을 두드렸다. 후원을 시작하자마자 참여한 교육에서 나의 관심사를 묻던 활동가들은 관련 책자들을 건네주며 활동하고 있는 팀을 소개해주었고, 그렇게 나의 첫 시작은 노동권팀 활동이 되었다. 팀 활동을 하며 행성인 모임에 자주 참여하고, 다양한 회원들을 알아가는 일이 좋았다. 비슷한 고민과 마음이 맞는 동료들을 찾아가는 일도 설레였는데, 활동 1년차에는 그 당시 친해진 여성 퀴어 동료들과 <여성모임> 이라는 소모임을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주어 제법 흥한 모임으로 오랜 기간 활동 할 수 있었고, 소모임으로선 이례적으로 부스도 내어보고 깃발도 만들어 집회에 참여했다. 아마 이런 활동이 쌓여 운영위원의 역할까지 맡게 된 게 아닌가 싶다.
행성인을 좋아했던 이유
- 관계성
행성인은 인권단체라는 무거운 공간 속에서 언니/동생/선배의 관계를 만들어준 친밀한 곳이었다. (지금은 과거가 된 문화다) 그 당시 단체에서는 나이와 상관없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동시에 언니라는 호칭으로도 부를 수 있었다. 내가 자라온 환경에선 나이에 따른 위계가 존재했고 그 관계가 익숙했다. 나이와 상관없이 이름을 부르는 문화가 불편해 쉽게 말을 걸지 못했는데, 언니라는 호칭은 친근하고 살갑게 다가갈 수 있게 했다. 집 안에선 장녀의 역할을 수행했고, 남들보다 일찍 시작했던 직장 생활에서도 늘 책임감만 부여 받았는데, 행성인에서는 동생으로서 챙김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그 관계들이 좋아서 언니들을 잘 따랐고 의지했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 외에도 활동과 학업에 대한 고민들을 터놓으며 조언과 용기를 얻었다. 나는 이제 그 당시 나의 길잡이었던 언니들의 나이가 되어 활동을 하고 있다.
- 회원과 회원 아닌 이들도 함께 모이는 환경
행성인은 내가 활동했던 시기마다 소모임이 제법 많았는데, 이는 회원들이 단체 안에서 하고자 하는 활동들을 지원하고 존중해주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활동이 길지 않아도, 혹은 회원이 아니어도 누구에게나 열려있어 지금까지 다양한 활동과 모임들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운영했던 '여성모임'도 대부분 비회원들이 참여했다. 회원이 아니어도 다양한 사람들이 장벽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으로 존재하는 단체였으며, 활동가들은 단체를 방문하는 이들을 반겼다.
- 안전한 공간
단체에 대한 비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좋았다. 불편함들을 얘기할 수 있었고, 단체는 회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때로는 개인적인 불편함에 대 이렇게까지 고민해야 하나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수고로움을 견디며 활동하는 활동가들에게 고마웠다. 단체 내 성폭력 사건이 있었을 때, 그 해 활동을 중단하고 그간의 문제점들을 짚어보며 우리 안에서 위계와 폭력은 어떤 것들이 있었고, 그것들은 문화와 분위기로 치부하진 않았는지 돌아보았다. 앞으로 어떤 구조로 이를 방지하고 개선할 것인지 점검해 나가기도 했다. 나는 그 시간 동안 비대위를 하며 전체적인 방향과 논의 외에도 비대위원들 개개인마다 책임을 통감하며 변화해 가고자 하는 모습에 안전함을 느끼기도 했다.
- 연대
행성인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서도 가장 자랑스러운 건 어디서나 보이는 무지개 깃발이다. (지금은 수많은 무지개 깃발들에 둘러 쌓여 행성인의 시그니처가 옅어지긴 했지만) 이주노동자, 장애, 여성,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 등 행성인은 연대를 가장 많이 하는 활동 단체였다. 무지개 깃발을 들고 수많은 거리를 누비며, 행성인이 안 간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과 함께 연대하며 투쟁을 이어가는 단체였다. 지금도 나는 거리를 거닐며 행성인의 플랜카드가 걸려있는 걸 볼 때 성소수자 당사자로서, 시민으로서, 동료로서 감사함을 느낀다.
운영위원으로서의 역할
나는 늘 제 2, 3의 설명이 필요한 운영위원이었고, 성명서 한 줄 써본 적 없는 활동가였으며, 의제에 관하여 수많은 질문을 하는 회원이었다. 부족한 것이 많다고 생각했음에도 운영위원으로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모르는 게 많고 질문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나같은 회원들이 있을거라 생각했다. 집회엔 곧잘 나가는 편이지만, 집회에 가서 동료 활동가들에게 그 날의 의제와 필요한 제도들을 물어보곤 했다. 대부분 웅이나 지오님이 나의 선생님이었다. 때로는 왜 같은 방식의 운동을 고수하는지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으며, 바뀌지 않는 일들에 투쟁하는 것이 지친다며 투덜거리기도 했다.
나는 인권단체의 언어들이, 성명서들이, 기사 속 글들이 여전히 어렵고 낯설다. 모르는 걸 아는 척 하며 앉아 있었던 적도 있었고, 의제도 잘 모르면서 집회에 나갔던 적도 있었다. 읽는 것 보단 대화를 통해 알아가는 것을 좋아했고, 동료들은 쉬운 언어들로 설명해주곤 했다. 배우면서 활동할 수 있는 운영위원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는데, 날 선 언어와 인문학적 소양의 언어들이 넘쳐나는 공간에서 그 무게와 소양을 낮추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부족한 운영위원임을 즐기며 좋아했다. 활동가적 면모보다는 좀 더 직장인의 모습이 많이 느껴지는 운영위원이자 일상의 활동가로 존재했다. 단체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을 모두가 어려움 없이 들을 수 있고,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서 나눌 수 있길 바랬다. 그러려면 모르는 것이 방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누군가는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회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다정한 말들이 오가는 공간이길 바라며 안부와 질문을 더 많이 꺼낸 것 같다.
기억 남는 활동
운영위원을 맡으면서 회원들에게 친밀한 운영위원이 되고 싶었고, 다시 한번 여성 퀴어 모임을 열어보고 싶었다. 단체 외에도 소모임을 6~7년 간 쉬지 않고 운영했었기에 새로운 회원들과 만나는 자리가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20~30대 초반에 활동했던 나의 에너지는 70% 이상 줄어들었고, 갈수록 회원들과 모이는 자리에서 뒷풀이를 기피하는 내 모습에 씁쓸함을 느꼈다.
그래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으론 작년에 진행한 〈여성 퀴어SEX〉가 아니었나 싶다.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그만둔 여성 모임을 다시 한번 해보고 싶은 욕구가 있었고, 여성들의 성적 욕구에 대한 얘기도 오래 전부터 꺼내고 싶었다. 게이들은 곧 잘 하는데, 왜 여성들은 굳이 꺼내려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한때는 여성들이 자신의 성적 욕구와 성적 해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지금은 내밀한 이야기로 치부하는 것 같았다. 때로는 애인이나 친구 사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할 때 더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 모임 주제를 기획하게 되었다.
월요일이었음에도 많은 분들이 신청해주셨다. 행성인에서 여성 퀴어들이 스스로의 성적 욕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처음 같아 더 기억에 남는다. 나의 활동 동기를 만들어준 지오님과 운영위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운영위를 끝으로 회원으로서의 활동
2025년에는 나를 이루는 정체성으로 활동하고 싶다.
퀴어 여성들과 여성 마라톤 대회에 나가고,
자전거 대행진에선 무지개 깃발을 꽂고 참가해보고 싶기도 하며,
30주년에는 행성인 부치 언니들과 일일 포차를 열어보는 재밌는 상상을 하면서.
그리고 다른 단체들의 모임을 참여하면서 새로운 자극과 에너지를 받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2025년의 운영위원 분들에게
개개인의 역량과 에너지가 남다른 분들이 함께 해주어 회원들이 넘쳐나는 시끌벅적한 단체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반갑게 인사하며 먼저 말을 건네주는 분들이라는 걸 알기에 회원단체로서 한층 더 열린 공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활동했던 운영위는 뒷풀이 참여율이 저조했는데, 이번 운영위는 뒷풀이에서도 회원들과 함께 즐겁고 밀도있는 이야기를 나누실 것 같아 기대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벌써부터 바쁜2025년을 맡아주셔서 든든합니다. 제가 세 분의 에너지와 캐릭터를 좋아하고 부러워하는데요, 혹시,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알랴주세요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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