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원고는 2025년 행성인 정기회원총회를 진행하면서, 행성인의 집중 의제로 성적 권리를 채택하고 제안하기 위해 정리한 글입니다. |
행성인 운영위원회 (초안 및 편집: 남웅)
행성인의 성소수자 인권운동 집중 의제의 궤적
행성인은 2017년 20주년을 준비하며 성소수자 인권 증진을 위해 7개의 인권 의제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트랜스젠더와 HIV/AIDS, 성소수자 노동자와 청소년 성소수자, 성소수자 군인권, 차별금지법과 동성혼 법제화로 꼽은 데에는 성소수자의 인권보장을 위한 활동뿐 아니라, 사회 변화를 만들어내는 운동으로 이어내겠다는 결의가 있었습니다. 2010년 당시 동성애자인권연대가 팀 체제로 재편하면서 활동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나간데 이어, 이들을 주요 활동 의제로 삼은 것은 단체 안팎으로 성소수자 운동이 성장하고 사회와 제도에서도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과제가 명확해지고 위상이 달라지는 데 대한 대응이기도 했습니다.
운동이 성장하면서 행성인은 집중해서 가져갈 의제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2020년대 즈음부터 행성인이 주목한 것은 성소수자 노동권이었습니다. 누구라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합니다. 더불어 하루 중 일상에서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의 비중이 크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정성별과 모습이 다르다는 이유로,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질병이 있다는 이유로 취업에 문턱이 생기거나 직장에서 불이익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에 행성인은 25주년을 즈음하여 성소수자 노동권 집중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성소수자 노동자 인터뷰를 진행하고 직장 내 성소수자 동료를 둔 노동자를 위한 가이드북을 제작, 홈페이지를 만들어 성소수자 노동권에 대해 알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는 일하는 성소수자를 지지할 수 있는 활동을 만드는 것으로서, 노동조합뿐 아니라 기업문화와 제도를 바꾸고 성소수자 노동자로서 안전하게 일하며 노동환경을 바꿔나갈 수 있는 주춧돌을 마련했다는 의의를 갖습니다. 3년 차에 접어든 노동권 집중 활동은 캠페인을 일상화하면서 노동권 의제를 알릴 수 있는 활동을 확장해내는 것을 향후 과제로 남기고 있습니다.
성적 권리를 제대로 이야기하기
그리고 새로운 고민이 들었습니다. 노동만큼이나 일상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무엇일까. 오랜 시간 사회가 성소수자에게 편견과 낙인을 찍었지만, 정작 성소수자들이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기 주저하고 기피했던 것은 성적 권리입니다.
성적 권리를 말할 때, 우리는 ‘섹스할 권리’를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좀 더 생각을 이어간다면 ‘섹스하지 않을 권리’도 이야기하면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제안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를 논하기 위해서는 타인과 관계맺으면서 작동할 수 있는 기준과 협상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이 과정이 어떤 제도와 사회적 위계에 걸쳐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것은 성관계에서 어떻게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지, 안전을 훼손하는 위험은 무엇인지, 위험 속에서도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다면 고려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와도 연결됩니다. 나아가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 나이, 질병과 장애여부, 계층과 지역, 인종 등 관계에 작동할 수 있는 위계와 제약으로부터 누가, 어떤 관계와 행위가 낙인 찍히고 과도하게 비난당하며 사회와 제도로부터 취약해지고 음지화되는가를 논할 수도 있습니다. 하여 성적 권리는 관계에서의 평등을 성찰하며, 성적 행위들이 부당하게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되는 현실로부터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함께 분석하고, 그로부터 무엇이 수정되고 변해야 하는가를 도출하며 요구하는 실천까지 포함할 것입니다. 성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포괄적 성교육을 받고,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야 하며, 성과 재생산을 위한 제도와 의료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하는 사회적 과제 또한 갖습니다.
① 혐오선동에서 범죄화까지
하지만 성소수자에게 성적 권리는 운동으로 상상하기까지 걸림돌이 적지 않았습니다. 성적 권리는 한때 혐오 세력으로 불러온 보수기독교와 보수언론, 극우 정치 집단이 더 많이 이야기해온 것 같습니다. 혐오 세력이 성소수자를 반대하는 이유는 섹슈얼리티와 직결되었습니다. 이들은 성소수자를 문란하고, 난잡하며 언제든 오염될 수 있고 손상할 수 있는 이들, 혹은 누군가를 성적으로 폭력할 수 있는 위험집단으로 그립니다. 상당 부분 허위 사실에 기반한 논리는 성소수자가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이들로 허황된 논리를 극단적으로 부풀립니다.
성적 낙인을 양분 삼아 세를 모으고, 이를 토대로 국민과 비국민을 나누고 기득권의 구조를 확대재생산하는 것은 극우 정치가 제 살을 불려온 동력입니다. 논리의 사실 여부를 떠나 세력화한 혐오는 대중문화 안에서 성적 실천의 취약한 지점들을 가십화하고, 시민사회와 정치에도 인권 기반의 인식과 제도마련을 기피하도록 하는데 나아가 성적 실천 자체를 검열하고 통제하도록 합니다. 이는 이미 한국 사회에 혐오세력 이전 국가가 군형법상 추행죄와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상 전파매개행위죄로 제도화 해온 배경에도 연결됩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성적 낙인은, 법상에서 성소수자와 HIV/AIDS감염인을 범죄화하면서도, 외부에 잘못된 정보와 혐오를 양산하며 커뮤니티를 위축시킵니다. 친밀함과 쾌락을 만들고 실천하는 커뮤니티 안에 위계를 재생산하고, 성적 권리에 대한 담론과 실천들을 원활하게 이야기할 수 없도록 합니다. 이들의 혐오선동은 경계에 있고 규범을 위반한다고 규정된 이들을 불쏘시개 삼아 국민을 관리하며 정상 규범을 재생산합니다. 오랜 성적 낙인에 기반한 성소수자 차별은, 정치인들에게도 이미 체득된지 오래입니다. 선거기간이면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후보 토론회에 오르내리고 많은 경우 동성애는 싫지만 차별은 반대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펼칩니다. 극우 정치세력의 입김에 눈치보기 급급한 대답들은 기어이 동성애와 난민 때문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한다는 논리에 힘을 실어왔습니다.
② 방어적으로 대응하지 않기 위해
문제는 그것이 퀴어 당사자와 커뮤니티에도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검열하거나 망설이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오랜 시간 게이 남성의 섹스는 문란하고 질병을 전파하는 이들로 그려졌습니다. 약물을 사용한 켐섹스나 HIV/AIDS 감염의 위험은 외부에서 범죄화할 뿐 아니라 커뮤니티 안에서도 낙인처럼 작동합니다. 성적 낙인은 다시 전염병과 사회를 파괴하는 인자로 여겨집니다. 에이즈로 국력을 약하게 만들고, 차후에는 사회적 지출을 늘린다는 이른바 세금도둑 논리로 이어졌습니다. 코로나19 당시 이태원 사태는 성적 낙인이 어떻게 질병에 대한 범죄화와 연결되어 작동하는가를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낙인과 혐오가 우세한 공론장에서는 국민과 비국민, 정상과 비정상뿐 아니라, 커뮤니티와 사적인 관계에서 작동하는 위계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놓치게 만듭니다.
성별 위계는 여성 퀴어로 하여금 자기검열과 커뮤니티를 단속하게 만듭니다. 성적 실천보다 배타적인 안전을 명분삼아 경계를 강화하는 경향은 페미니즘운동의 가치까지 우경화하기 쉽습니다. 구조적인 여성 혐오 아래 여성의 성적 권리는 오히려 성적 대상으로 대상화되고 포획되는 환경에서 이야기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는 제도적으로 성평등을 양성평등으로 축소하고 성별이분법의 규범을 재생산하는 제도나 교육과도 연결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젠더이분법을 강화하거나, 공격의 대상이기 쉬운 여성퀴어 커뮤니티에서 섹스 자체를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상황은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지 고민을 더합니다. 더불어 ‘터프’와 ‘랟펨’으로 불리는 이들뿐 아니라 최근 미국 트럼프정부가 제도적으로 전면화한 트랜스젠더 여성 배제와 혐오로 향하는 것엔 어떤 맥락과 연결고리가 있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도록 합니다.
사회에서 전반적으로 이뤄지는 성별규범의 강화는 어떻게 성적 권리의 요구와 실천을 협소하게 바라보도록 하며, 수세적으로만 대응하게 만들까요? 섹슈얼리티 환경이 우경화되는 상황에서, 성소수자들은 혐오논리를 구성하는 항목을 체크하면서 부정적인 것들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선 그으면 될까요? 성적 권리는 성소수자 인권을 설명할 때 근본적인 항목들 중 하나일 뿐 아니라, 나이듦과 장애, 가난과 정상성의 규범을 관통하는 의제입니다. 돌봄을 급진적으로 상상하면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데 빠질 수 없는 가치이기도 합니다.
인권운동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성소수자가 성적 낙인에 반대하고 성적 권리를 보장하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커뮤니티 안에서는 범죄화와 차별, 성적 위계에 바탕한 검열과 제약을 직시하고 이야기를 지속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혐오에 반대한다는 주장 너머, 혐오와 제도적 배제의 대상으로서 HIV감염인과 여성 퀴어가, 트랜스젠더가 사회 성원이자 성적 주체로서 관계 맺고 성평등을 실천할 수 있을지를 살피고 주도적으로 성적 권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제도적, 사회적 기반을 만들고 요구해야 합니다.
행성인 중장기 집중 의제로 성적 권리를 제안합니다
① 활동 방향으로서 성적 권리의 의미 확장
행성인은 이미 외부의 성적 낙인에 기반한 혐오에 대항언어를 만들고, 범죄화에 반대하며 퀴어 커뮤니티의 섹스 문화를 살펴왔습니다. 무엇보다 단체 내부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약속과 성평등 규약을 만들어 공동체 내 성평등을 실천해오고 있습니다.
올해 노동권과 더불어 성적 권리 또한 집중 의제로 삼을 것을 제안하는 것은, 국가 차원의 성적 낙인과 편견에 맞서 인식을 개선하면서 성평등과 인권의 가치를 알리고, 내부적으로는 커뮤니티와 접점을 확대하며 성인지감수성과 성적 자기결정권을 높이는데 목적을 둡니다. 성적 권리를 이야기하자는 제안은, 개인으로 살아가면서 관계 맺는 방식을 살피자고 말합니다. 무엇이 관계와 친밀함이 이뤄지는 방식에 가치를 부여하고 기준으로 작동하는지, 사회의 어떤 통념과 제도가 온전한 선택을 저해하고 누군가를 손상케 하며 낙인과 범죄의 굴레를 씌우는지 논의하자고 제안합니다. 이는 정체성 특수성에 기반한 커뮤니티를 살피면서도, 정체성을 횡단하는 성적 실천과 그 환경에 주목하자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타인에 대한 환대와 관계의 즐거움이 인권운동이 지향하는 방향 위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위계와 편견의 구조에 맞서는 성적 권리의 가치는 페미니즘과 성평등을 공유하며, 향후 행성인이 주목해야 하는 성소수자 나이 듦과 돌봄에 대해서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특정 집단과 행위에 곧장 성적 낙인과 범죄화를 덧씌우며 위험을 과도하게 통제하고 단속하는 사회로부터 안팎으로 작동하는 위계를 비판적으로 물을 수 있습니다. 그동안 제도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지 못해온 것들로부터 급진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② 2025년 활동 계획
이에 행성인 회원 여러분들에게 성적 권리를 주요 활동 의제로 고민할 수 있는 원년으로 삼으면 어떨지 제안합니다. 그동안 해온 활동들을 기반으로 삼아 정기회원모임과 비정기 모임을 통해 성적 권리를 보다 넓고 다양하게 이야기하며 과제를 발굴하고 필요한 활동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저마다의 성적 권리와 실천을 이해하고, 교육과 토론, 캠페인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사람을 만나고 구체적인 욕구와 관계의 이야기와 메세지를 만드는 활동은 제도와 풀뿌리 운동을, 사회와 일상을 연결하며 행성인 30주년의 활동 비전을 도출하고, 이후 이어질 30년을 도모하며 사회 변화를 위한 성소수자 운동 도약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적 권리는 사회를 살아가는 성원들이 보편적으로 가져야 하는 것이고 그만큼 다른 의제 곳곳에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넓은 범위의 키워드인 만큼 이야기를 시작하고 설계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의제이기도 합니다. 당위만큼 구체적이지 못했던 의제에 대해 집중사업을 제안하는 것은 좀 더 많은 논의와 선택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업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타깃으로 삼아야 할지에 따라 사업의 규모와 목적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올해는 그 과정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 어떨까요. 항상 그래왔듯, 행성인 회원 여러분과 성적 권리의 언어를 만들고 활동을 상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인권운동 안에서 고려해오고, 가져온 의제이지만 좀 더 역량을 기울여 제도와 커뮤니티를, 규범에 미끄러지면서도 성적 주체로서 시민권을 요구하는 운동을 만들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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