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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AIDS

[회원에세이] ‘이태원 다신 없어’: 자유롭다는 착각

by 행성인 2025. 4. 19.

한준 (행성인 HIV/AIDS 인권팀)

 

 

이 글은 이태원이라는 공간을 둘러싼 저의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저만의 편협한 시선일지도 모르고, 수많은 다른 게이들의 경험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 펼쳐지는 생각들에 고개를 젓게 된다면, 아마 당신의 경험과 생각이 옳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저는 제가 느꼈던 이태원의 모습, 그곳에서 경험했던 자유의 이면, 그리고 해방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솔직하게 나누고 싶었습니다. 게이들에게 이태원은 어떤 의미일까요? 자유로운 만남의 장이라는 익숙한 수사 뒤에 가려진, 조금은 불편할 수 있는 질문들을 던져보려 합니다.

 

 

자유롭다는 착각

 

이태원 호모힐로 불리우는 곳. 하지만 24년 들어서 게이 클럽과 업소들은 좁은 우사단로를 넘어 왕복 6차로의 대로인 이태원로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종종 이태원을 게이들이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해방구라고 여깁니다. 게이들끼리 눈치 보지 않고 ‘게이다운 짓’을 할 수 있는 곳, 자유로운 성적 표현과 시선이 오가는 곳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제가 경험한 이태원은, 어쩌면 ‘자유롭다’는 착각 속에서 마지못해 찾아가는 공간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했습니다. 정말 가고 싶어서 가는 걸까, 아니면 갈 곳이 거기밖에 없어서 가는 걸까? 이 질문은 우리가 이태원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방식에 균열을 냅니다.

 

한데 선택지가 하나뿐인 상황에서의 선택을 과연 자유로운 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 사회의 소위 ‘정상인’들은 홍대든 강남이든, 심지어 이태원이나 종로까지, 수많은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지만, 게이들에게 허락된 공간은 마치 구석진 곳으로 내몰린 듯 제한적입니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그렇게 내몰린 공간이 우리에게 ‘자유’라는 환상을 심어준다는 점입니다. 제가 느낀 이태원은 마치 감옥 안 죄수들에게 주어진 운동장과 같았습니다. 제한된 자유를 허락하되, 그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암묵적인 제재가 가해지는 곳. 우리는 이 좁은 운동장을 누비는 것을 자유라고 착각하며, 그 안의 보이지 않는 규칙들에 기꺼이 복종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만남의 장’이라지만, 혼자서는 어색하고 친구들과 함께 가야만 할 것 같고, 클럽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정해진 안무를 따라 춰야 하고, 자유로운 성적 표현마저도 식이라는 특정한 ‘코드’안에서만 용인되는 이태원의 모습은,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얼마나 조건적이고 제한적인지를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이태원이라는 ‘상품’과 ‘성벽’

 

제가 보기에 이태원의 클럽과 바들은 바로 이 ‘자유롭다는 기분’ 그 자체를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합니다. 우리는 옷을 사러 백화점에 가듯, 자유롭다는 느낌을 찾아, 혹은 구매하기 위해 이태원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새로 산 옷이 금세 더러워지듯, 구매한 자유의 느낌은 휘발성이 강해서 금방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느낌을 다시 얻기 위해 또다시 이태원을 찾게 되는, 끊임없는 소비의 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느낌을 주는 복제품들을 계속해서 소비하는 것이죠.

 

게이들이 ‘다신없어’라며 주로 쓰는 밈의 설명.

 

복제품들은 빠르게 소비되고 폐기되며, 더 새롭고 강렬한 자극을 주는 '신상'으로 계속 교체됩니다. 어쩌면 이것이 이태원에 끊임없이 새로운 게이 클럽과 바들이 생겨나는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태원 다신 없어"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일리가 있습니다. 내가 '다신 없어'라고 느꼈던 그 순간의 이태원은 정말로 사라지고, 더 세련되고 자극적인 버전의 이태원이 그 자리를 대체하여 우리를 다시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이태원은 겉보기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며 의견을 주고받는 ‘광장(廣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외부의 시선과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높게 세워진 '성(城)'에 가깝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성곽 안은 상징적일지언정 좁고, 방어적이며 폐쇄적입니다. 이태원에 펼쳐진 게이들의 공간 역시, 커뮤니티라 부르기엔 어색할 정도로 균일하고 동질적인 분위기를 강요하는 듯했습니다. 특정 코드와 규범을 내면화하고 따르는 이들만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성벽'이 작동하는 것처럼 말이죠.

 

성벽은 생각보다 강력해서, 이태원이라는 공간의 경계 너머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데이팅 앱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는 "종로, 이태원에서 활동하시는 분은 죄송합니다" 혹은 "종태원 X"와 같은 문구들은, 이태원 바깥의 게이들조차 이태원이라는 공간과 그 안의 문화를 기준으로 자신을 규정하거나 타인을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사회가 법이나 제도로 가하는 직접적인 통제와는 다른 방식입니다. 이태원이라는 공간의 존재 자체가 게이 커뮤니티 전체에 스며들어, 자기검열과 자기규정의 기제로 작동하는 것이죠. 이태원을 거부하는 이들조차 이태원을 준거점 삼아 자신을 설명하게 되면서, 역설적으로 이태원 중심의 위계질서는 더욱 강화되는 현상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태원이라는 '계급 사회'

 

제가 경험한 이태원이라는 '성' 안에서의 발언권과 가치는 철저히 '팔림(marketability)'이라는 위계에 따라 분배되는 듯했습니다. 여기서 '팔린다'는 것은 단순히 외모가 매력적이라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자신을 얼마나 매력적인 상품으로 포장하고 시장(이태원)에 내놓을 수 있는가 하는 능력에 가깝습니다. 여기에는 외모 관리뿐 아니라, 소위 ‘게스타’라는 단어가 보여주는 것처럼 인맥 관리, 특정 분위기에 맞는 성격 연기까지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팔린다'는 것은, 마치 쓰레기장에서 무언가를 태워 없애는 소각 행위와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내 안의 어떤 욕망이나 존재를 타인의 욕망에 맞춰 소비시켜야만 하는 과정. 즉, 나를 상품으로 공급하여 타인에게 소비되고, 그 과정에서 규격화된 몸짓과 표현으로 '자유로움'이라는 감각마저 소비해버리는 끝없는 순환. 이 순환 속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팔려야'만 합니다. 한번 팔렸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주, 매달, 매년 새롭게 자신의 상품 가치를 갱신하고 증명해야 합니다. 지난주의 '팔림'은 이번 주가 되면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리는, 시장 논리입니다.

 

모두가 똑같은 입장료를 내고 클럽 문턱을 넘지만, 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팔림'의 위계질서에 따라 각자에게 다른 밤이 펼쳐집니다. 표면적인 평등이라는 환상 아래,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무거운 의미를 지니며 이태원이라는 '성'을 지배합니다. 이것이 제가 느낀 이태원의 잔인한 진실 중 하나였습니다. 결국 이태원은 자유와 해방의 미명하에, 교묘한 착취가 동반되는 또 다른 형태의 계급 사회로 변모하는 것은 아닐까요? 팔림의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자유와 인정이라는 환상으로 끊임없이 유인하며 그들의 열망, 시간, 돈, 심지어 자존감까지 갈취하고, 이 모든 것이 위계 상층부의 쾌락과 권력을 유지하는 연료로 소모되는 구조처럼 보였습니다.

 

 

되돌아온 트라우마

 

대한민국 사회는 '정상성'이라는 이름의 강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좋은 대학, 안정된 직업, 특정 형태의 가족상만이 유일한 정답처럼 강요되는 사회. 그러나 이 획일적이고 경직된 정상성의 신화는, 실상 구성원 모두를 질식시키며 비극으로 내모는 괴물과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OECD 최고 수준의 자살률과 끝 모를 출산율 하락, 그리고 주변에 성소수자 친구를 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라는 통계는 이 사회의 병리적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바로 이 기괴하고 폭력적인 정상성에서 내쳐지고 차별받았던 게이들은, 이태원과 같은 그들만의 해방구를 필사적으로 구축해왔을 것입니다. 그곳은 분명 잠시나마 숨 쉴 수 있는 낙원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필자가 경험하고 목격한 그 '낙원'은 결국 자신들이 도망쳐 나온 그 정상성의 비극을 똑같이, 아니 어쩌면 더 교묘하게 재생산하는 공간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묻게 됩니다. 바깥 사회에서 억눌린 욕망의 해방구를 찾아 도달한 이태원에서, 우리는 스스로 또 다른 억압의 구조, 즉 '팔림'의 위계와 배제, 상품화의 논리를 견고히 구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 구조는 외부의 강제보다는 '선택'이라는 미명 하에 더 미세하게 작동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팔리기를 원하고, 동시에 자유로움을 소비하기를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차별받는 자가 차별하는 자로 변모하는 이 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는 한, 우리는 늘 고통받을 것입니다.

 

 

어떤 테크노 클럽의 배신

 

이태원의 폐쇄성, 상품화, 그리고 그 안에서 재생산되는 위계질서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의문은 자연스럽게 다른 가능성을 품은 공간과 관계 맺음의 방식을 찾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때때로 강렬한 해방감을 선사한다고 이야기되는 '테크노 클럽'은 이태원의 역학과 다른 결을 보여줄 수 있는 잠재적 공간으로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왼: 포르노 파티 설명/ 오: 포르노파티에는 다크룸 공간도 있었다.

 

하지만 일말의 기대는 때때로 현실의 벽 앞에서 무력하게 좌초하기도 합니다. 제가 올해 4월 초에 경험했던 한 유명 테크노 클럽에서 열린 파티는 그 씁쓸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포르노 예술을 다양하고 포용적인 문화로 제시"하고 "베를린에서 온 당신의 퀴어 가족과 함께 춤을 추자"는 도발적인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나아가 "음란물이 착취적인 산업과 연관되기를 반대"하며 자신들의 "예술적이고 친밀하며 존중받는 무브먼트"를 충분히 숙지하고 참여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탈권위와 성적 권력의 전복을 표방하며, 컨셉 부적합 시 '오거나이저의 도어 셀렉으로 인한 입장 거부' 가능성까지 공지했죠. 표면상으로는 음지의 포르노와 성문화를 양지로 끌어올려 차별에 맞서고, 모두의 안전한 성적 권리 행사를 보장하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급진적인 '퀴어한' 기획처럼 보였습니다.

 

해당 클럽 측이 내세운 드레스코드, 하지만 실제는 정반대였다.

 

하지만 현장의 풍경은 이러한 선언적 급진성과는 정반대로 펼쳐졌습니다. 클럽 홍보 문구가 약속했던 '퀴어함'의 다채로운 스펙트럼 대신, 획일화된 '상의 탈의' 남성 신체들이 공간을 가득 채웠습니다. 진정으로 다양한 신체, 섹슈얼리티, 페티시즘이 존중받고 공존하는 '퀴어함'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음란함이 존중받을 수 있다'던 다크룸은, 본래의 해방적 취지와 달리 이성애자들의 관음적 시선까지 뒤섞이며 게이들의 섹슈얼리티가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기존의 착취적인 시선을 똑같이 반복하는 공간이 되어버렸습니다. 더욱 기만적인 것은, 주최 측이 스스로 내건 '존중'의 약속을 배반하고 참여자들에게 특정 복장(상의 탈의)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파티에 맞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식의 언사로 임의적인 배제를 자행했다는 점입니다.

 

왼: 포르노파티 속 문제제기. 인스타 @1818bulzamzi1818 님 / 오: 해당 클럽의 해명. 외부 업체탓을 하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결국 '포르노 예술'과 '퀴어'라는 수사는, 앞서 제가 비판했던 이태원 게이 커뮤니티의 폐쇄적인 위계와 배제 구조를 '힙스터' 버전으로 복제하고 강화하는 기제로 작동했을 뿐이었습니다. 이는 해방과 다양성을 표방하며 오히려 진정한 '퀴어함'의 잠재력을 도둑질하고 상품화한 행태라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태원이 게이들에게 특정한 '게이'라는 규격화된 정체성만을 허락하며 제한된 자유를 상품화했듯이, 이 파티 역시 테크노 씬에서 움틀 수 있었던 다종다양한 해방의 가능성들을 억압하고, 주최 측의 입맛에 맞는 '힙한 퀴어함'이라는 또 다른 표준화된 상품으로 재단하여 소비하게 만든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결국 자본주의적 소비 논리의 지독한 재생산이며, 우리가 도망쳐 나온 '정상성'의 폭력이 얼마나 교묘하게 다른 가면을 쓰고 반복될 수 있는지를 통렬하게 증명하는 듯했습니다.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는 냉정한 현실, 즉 대안적 해방구로 여겨졌던 공간마저 어떻게 기성의 억압 구조를 답습하고 마는지 보여주는 뼈아픈 사례였습니다.

 

이처럼, 저항적이거나 대안적으로 여겨졌던 문화나 정체성조차도 특정 취향 공동체의 입맛에 맞게 길들여지고 상품화되는 현상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는 단순히 하나의 이벤트 실패를 넘어, 어떻게 새로운 움직임이나 공간마저 기존의 배타적 질서와 상업 논리 안으로 손쉽게 포섭되고 마는지, 그 방식을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명분 아래 실제로는 또 다른 획일성을 강요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반복되는 굴레를 벗어나야, 우리는 비로소 비극을 멈출 수 있을 것입니다.

 

 

천국은 없다

 

앞서 살펴보았듯, ‘해방’이라는 완성된 목표 지점을 설정하고 도달하려는 기획은 쉽게 자본주의 논리와 사회적 규범에 다시 포섭되어, 도망치려 했던 바로 그 억압과 위계를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하는 비극으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완벽한 해방구, 즉 ‘천국’을 찾는 순진한 여정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거나, 또 다른 종류의 견고한 '성벽'을 쌓는 결과로 이어질 뿐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등식처럼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며 무수한 가능성을 품고 변화하기에, 어떤 완성된 상태나 공간에 가두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또 다른 폭력과 고통을 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어디에 있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대안은 최종 목적지가 아닌, 과정 자체에 집중하는 태도, 즉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변화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여지를 남겨놓는 여유'에서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이는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 예측 불가능한 길을 탐색하고, 고정된 정체성을 넘어 다른 존재들과 접속하며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실천적 태도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제가 종종 방문하는 이태원의 한 게이 클럽의 경험을 통해, 비록 그 자체로 완벽한 대안적 경험이 아닐지라도, 이러한 '여유'를 실천하고 그 안에서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는 하나의 주목할 만한 인상을 얻었습니다. 위에 서술한 클럽이 '퀴어함'을 특정 코드로 규정하고 상품화하려 했다면, 이곳에서의 경험은 다른 방향을 시사했습니다. 그곳의 극단적인 어둠과 조명은 이태원을 지배하는 시각 중심의 위계와 상품 가치 평가를 일시적으로 무력화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테크노의 강렬한 사운드는 언어적 소통과 이성적 판단의 작용을 약화시키고, 몸의 감각과 즉각적인 반응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주로 사용하는 시각 정보와 언어적 소통이 극도로 제한된 이 공간은, 역설적으로 촉각과 청각, 음악의 진동과 뒤섞인 몸의 움직임 같은 다른 감각들을 비범하게 증폭시켰습니다.

 

자주 방문하는 이태원의 한 게이클럽. 기존 게이 클럽과 다르게, 가사 없는 음악과 파격적인 성적 개방성을 추구한다. 컨셉처럼 조명도 강렬함. 

 

평소 잘 쓰지 않던, 휘몰아치는 감각의 풍경 속에서, 평소 우리를 지배하는 위계와 평가, 상품 교환의 논리를 우회하는, 예기치 않고 때로는 강렬한 신체들의 직접적인 만남(우연한 스침부터 농밀한 성적 교감에 이르기까지)이 불쑥 가능해지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 공간이 제공하는 특별한 경험의 정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시선과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통제되지 않는 감각과 익명성에 기댄 이 원초적 접촉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가부장적인 사회가 주입하는 '여성스러운 게이'의 이미지나 이태원이 강요하는 '매력적인 남성 상품'이라는 갑갑한 규격과 역할극에서 벗어날 실마리를 감각적으로 포착하게 되었습니다. 정해진 각본 없이, 말이나 시선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관계 맺는 이 특별한 과정 속에서, '나의 게이됨'은 외부에서 주어진 고정된 규범이 아니라, 매 순간 새롭게 발견되고 즉흥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살아 숨 쉬는 가능성 그 자체로 펼쳐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물론 '게이 클럽'이라는 형식 자체가 사회적 차별과 구분의 산물임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 제가 긍정적으로 묘사한 해당 클럽 또한 위에서 길게 서술했던 이태원의 ‘팔림’의 계급 논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그곳에서 해방의 가능성은 잠깐이며, 여전히 보이지 않는 위계가 작동하고, 게이라는 상품이 끊임없이 교환되곤 하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현실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부정적 낙인과 공간의 제약을 단순히 거부하거나 폐기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그 제한된 조건 안에서 다른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게이다움'을 고정된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새롭게 쓰이고 확장될 수 있는 과정으로 만들어가는 전략적 전유의 희망을 보았다고 할까요. 저는 차별적 구분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의 현실과 그 속의 모순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의미를 끊임없이 재정의하고 질문하며 지배적 질서의 포획을 거부하려는 시도,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그 장소가 제공하는 '여지'를 활용하여 스스로 정체성을 규정하고 관계를 맺으며 지배적 논리에 균열을 내려는 '실천' 그 자체입니다. 그 실천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케이팝 안무를 추며 기존 남성성의 규범을 가로지르는 행위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크루징을 통해 억압된 성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형태가 무엇이든, '게이'라는 정체성을 사회나 시장이 규정하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끊임없이 만들어간다는 점입니다. 핵심은 변화의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는 '여유'를 확보하고, 그 안에서 누구도 함부로 정의하거나 상품화할 수 없는 자신만의 길을, 설령 그것이 불완전하고 때로는 위험할지라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