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 옴니버스 영화 <동백꽃> 중 소준문 감독의 데뷔작 <떠다니는, 섬>은 서울을 떠나 보길도라는 섬에 정착한 게이 커플의 갈등을 다룬다. 그들은 그곳에서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서 2년간 함께 살아왔으나, 커플 중 한 명이 그 섬을 떠나고 싶어 하자 이별의 순간은 다가온다. 여기에서 섬이라는 고립된 공간은 그들의 관계를 규정짓는 은유이다. 섬 안에 갇혀 버린 것처럼 그들은 관계 안에 갇혀 버린 셈이다. 이제 사랑은 자의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 조건에 의해 강제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은 이별에 대한 욕망, 즉 식어버린 사랑에 결별을 고하고자 하는 욕망의 다름 아니다.
소준문은 영원한 사랑을 부정하고 슬픈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섬이라는 공간에 게이 커플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다음 영화 <올드 랭 사인>에서는 수십 년 전에 이미 여성과의 결혼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게이 커플이 노인이 되어 재회한다. 이번에는 지난 사랑을 다시 시작하기에서 너무 늙어버린 모습 때문에 그 만남은 하룻밤의 꿈으로 사라지고 그들은 두 번째 이별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먼 과거의 사랑은 그때 모습 그대로 훼손되지 않은 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야만 한다. 감독은 그 이별의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들을 무력한 노인의 모습으로 재회시킨다. 두 번의 이별은 그들의 사랑을 더욱 슬프고도 그 만큼 더욱 아름답게 치장시켜준다.
이 두 편의 영화에서 이별의 원인은 당사자들의 어떤 결핍에 있지 않다. 단지 그들은 영원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본질적 속성 때문에 상처를 받는 선의의 피해자들일 뿐이다. 따라서 영화는 그 이별의 요인을 당사자들이 아닌 다른 데에서 찾는다. 게이들은 섬에 갇혀 있기 때문에, 결혼 때문에, 나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감독이 꿈꾸는 슬픈 사랑은 완성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소준문 감독의 첫 장편영화 <REC>에 접근하고자 한다. 나는 논의를 좀 더 풍부하게 하기 위해 이송희일 감독의 영화들, 특히 <후회하지 않아>와의 비교를 통해 영화를 고찰하고자 한다. <후회하지 않아>는 자본에 기반 한 계급적 차이가 외면화된 억압 기제로서 게이 커플의 관계 맺기에 부정적으로 작용하면서 전반적인 분위기가 어둡다. 한편, 모텔이라는 익명의 공간에서 셀프 카메라 형식으로 진행되는 <REC>는 시종일관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게이 커플의 5주년 기념파티를 담아낸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 모두 여성과의 불가피한 결혼이 게이 커플의 원만한 사랑을 방해한다. 다만 <후회하지 않아>에서는 여성이 직접적으로 게이 커플의 관계에 개입하거나 부모가 이성애적 결혼을 종용하는 반면에, <REC>에서는 오로지 게이 커플만이 등장하여 두 사람의 관계에만 집중한다. 가시화된 이성애적 억압이 부재한 대신 결혼에 대한 압박은 인물에 깊이 내면화되어 있다.
따라서 <후회하지 않아>에서는 이성애와 동성애가 표면적으로 대립한다. 그리고 이성애든 동성애든 관계의 궁극적 이상은 결혼이고 그 결혼에 먼저 도달한 사랑이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다. <동백꽃> 중 이송희일의 <동백아가씨>에서 <떠다니는, 섬>과 달리 굳이 고립된 섬에 여자가 찾아와 게이 커플의 사랑을 방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결혼을 둘러싼 이성애와 동성애의 헤게모니 싸움과 얽혀있기 때문이다. 즉 결혼은 사랑의 완성을 의미하는 중요한 목표이다.
<REC>는 섹슈얼리티의 차원을 넘어 사랑을 보다 본질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앞서 살펴봤던 소준문의 전작들에서처럼 이별은 사랑의 끝이 아니라 슬픈 사랑의 완성이기에, 대립하는 것은 영원한 사랑과 그렇지 못한 사랑이다. 게이 커플의 이별은 이성애적 결혼에 기인한다. 그것은 최루성 멜로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불치병과도 같다. 사별로 성립되는 아름답고 슬픈 사랑, 그것은 <REC>에서 이성애적 결혼으로 완성되는 게이 커플의 아름답고도 슬픈 사랑으로 변주된다. 결혼은 더 이상 목적이 아니라 도구에 불과하다. 이성 간의 결혼이 <후회하지 않아>에서는 동성 간의 (맹목적) 결합을 방해하는 부정적 성격을 띤다면, <REC>에서는 동성 간의 (낭만적) 이별을 완성하는 긍정적 성격을 띤다.
<REC>의 게이들은 내면화된 이성애규범성에 스스로 굴복하고 순응하며 자학과 자기연민에서 비롯된 신파적 눈물을 쏟아낸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세상에 대항하지 못한 채 그저 이별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자신을 원망하며 서럽게 울 뿐이다. 반면에 <후회하지 않아>에서는 이성애규범성에 의해 동성애적 욕망이 좌절되자, 게이 커플은 억압된 욕망을 서로에 대한 폭력, 혹은 자기 자신을 향한 폭력이라는 부정적 방식으로 표출한다. 그것은 나름대로 세상에 저항하기 위한 치열한 몸짓이다. 그리고 외부의 가시화된 억압 요소가 오히려 게이 커플의 관계가 더욱 공공해지는 궁극적 계기가 되어주었다. 이송희일이 잔인한 낙관주의자라면 소준문은 낭만적 염세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REC>의 노골적인 섹스 장면이 보여주는 극도의 친밀감은 이별의 안타까움을 극대화하기 위한 노골적인 방편이다. 그것은 관계의 퇴화를 담보로 하는 서글픈 친밀감이다. 나아가 육체적 탐닉은 나의 사랑이 진실하였음을 증거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며, ‘또’ 하나의 사랑을 미화하기 위해 마침표를 찍는 상징적 행위이다. 영원한 사랑을 의심하면서도 낭만적 사랑을 꿈꾸는 염세주의자 소준문 감독이 추구하는 사랑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김경태 _ 동성애자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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