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레이건정부가 주도했던 자유주의 성장정책은 대중문화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헐리웃에서는 <람보>, <배트맨>, <터미네이터> 등 영웅을 신화화하는 블록버스터 영화가 대량생산되었고, 저항적인 펑크문화는 MTV의 등장과 함께 급속히 팽창한 팝시장에 밀려나게 되었다.
팝문화의 팽창으로 세계 문화시장을 장악하게 된 미국. 패권을 유지하려는 열망과 함께 미국 정부는 보수적인 정책노선을 내세웠다. 확대된 시장정책과 보수적 정치성향은 월남전을 전후로 일어났던 70년대 저항의 분위기를 소비시장에 편입시켰다. 80년대를 휩쓴 팝의 용광로 속에서 저항적 대중들은 개인적인 관심사의 영역으로 위축되었고, 곧 ‘착한 시민’의 모습으로 사회에 순응했다.
하지만 동시대 미국사회의 주변부에서는 새로운 현상들이 목격되었다. 특히 문화·예술의 장에서 뉴욕의 이스트 빌리지는 80년대의 언더그라운드문화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성장정책으로부터 소외된 그곳에서 흑인들의 힙합문화가 태동했고 인디예술가들의 그래피티가 할렘가의 벽을 장식했다. 현실과 괴리되었던 70년대 히피문화와 달리 이들은 자신의 게토를 인식하면서도 대중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기호들을 만들어냈다. 아래로부터의 소통, ‘58년 개띠’ 키스해링의 작업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근성과 넘치는 에너지
작업초기 해링은 1980년부터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하철역에 비어있는 광고판을 분필로 채웠다. 유명세를 얻기 위한 ‘객기’이기도 했지만, 광고판그림은 많은 사람이 오가는 장소에서 소통하고자 했던 의지의 체현이기도 했다. 더구나 그의 근성은 무시될 수 없었다. 낙서라면 그 성격상 금방 지워지고 잊히기 쉬운 것인데도, 장기간에 걸쳐 제작되고 철거된 그의 그림은 사람들에게 적잖이 각인되었다. 그의 명성이 알려지고 사람들이 그의 작업을 알아보면서 급기야는 지하철 광고판을 뜯어가기까지 했다.
어렵지 않은 그의 그림은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도 친절했다. 스스로 자신의 미술작업을 소통의 매개로 여겼던 만큼 그의 그림들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섰다.
그가 만들어낸 기호들은 복잡하지 않다. 단순화된 그림은 알아보고 기억하기 쉽다. 더구나 이들은 여느 표지판의 그림들처럼 경직되지 않고 항상 꿈틀거린다.
생전 그의 근성 있는 활동들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작업은 에너지가 넘친다. 목이 열 개인 히드라처럼 분기하고 수백 개의 가지를 뻗는가 하면, 다시 섞이고 하나의 형상으로 뭉쳐지기도 한다.
http://www.youtube.com/watch?v=fny5HdclIRU
기호 자체가 갖는 단순함 때문에 그의 작업은 머리가 수백 개가 되고 인물이 수천 명으로 겹쳐져도 감상에 피로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보는 이들로 하여금 에너지를 전했던 그 멈추지 않는 에너지의 유희는 가끔 ‘징그럽게’ 느껴질 만큼 넘쳤으니.
(왼쪽부터) nine drawings, 1981. / The Ten Commandments 7, 1985.
시종일관 에너지가 분출하는 그림, 그의 그림에는 금기가 없다. 개와 인간이 치고받으며 춤추고 섹스하는가 하면 개가 사람이 되고 사람이 개가 된다. 발기된 성인과 십자가가 등장해 애널섹스를 하는가 하면 사지가 찢겨나간 사람의 몸에서 팔다리가 돋는다. 망설임 없는 그림의 도상들은 서로를 찌르고 터뜨리고 밟고 부수며 섞는다. 그 와중에도 그림의 형상은 머뭇거림 없이 꿈틀거린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그의 기호들은 일종의 순수함, 사랑을 향해 있다.
U2 PopMart One Live Mexico City 1997
메시지의 작업
-작업의 의미들
그는 쉽고 단순한 자신의 작업에 많은 주제와 내용을 삽입했다. 본인의 작업을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창으로 생각해왔던 만큼, 그는 작업에 많은 메시지들을 담았다. 8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화가 보여주듯 그의 작업에는 기존 예술작품부터 싸구려 대중문화의 기호들까지 온갖 것들이 섞였다.
(왼쪽부터) Apocalypse Ⅰ. / Andy Mouse.
* 앤디마우스에 대해 혹자는 워홀에 대한 해링의 러브콜로 보는 시각으로 읽어내기도 한다.
Micheal Stewart - USA for Africa, 1985.
내용의 범위는 정치적 메시지로 확장된다. 직접적인 기호로 전달된 그의 작품들은 정치선전물의 역할 또한 했다. 특히 그가 관심 있게 다룬 주제들은 대개 성해방, 마약문제 1, 인종차별정책과 같은 동시대 삶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미국안팎의 사회현안들이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그는 에이즈예방과 차별철폐의 주제를 그려냄으로써 작업의 공적인 성격을 공유했다. 그는 작업을 하기 위해 살아야 했고, 살기 위해 작업을 해야 했다.
(왼쪽부터) Crack is wack, playground mural, Harlem, Manhattan, New York, 1986. / Crack is wack, East Harlem, 1986.
무거운 주제임에도 그의 작업은 시종일관 즐겁고 활기 넘쳤다. 쉽고 단순한 이미지, 그럼에도 가볍지만은 않은 이슈를 쉽고 재밌게 표현하면서 그의 그림들은 사람들에게 정치적인 메시지를 거부나 부담 없이 각인시켰다.
-보편성과 모호성 사이
하지만, 현재 그를 다시 보게 되는 시점에서는 역사적 분석과 평가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단순화된 인물의 기호들은 보편적인 인간상을 지향한다. 하지만 보편성을 추구하는 기호들 속에서 메시지의 방향은 다소 모호해진다. 기호들은 대개 작가의 경험, 그의 게이정체성에 국한된다. 많은 사람들은 동성애자라는 작가의 정체성을 접목시키며 해링의 작업에 ‘성적 자유’라는 식의 해석을 도출해낸다.
(왼쪽부터) 69, 1986./ Glory Hole, 1980./ Debbie Dick, 1984. * 그마저도 동성애의 분위기는 발기된 페니스와 섹스체위를 통해서만 유추해낼 수 있다.
반면 남성 동성애 이외에 작품 속 인물들의 성적 지향은 추상적인 수준에 머문다. 가령 표식이나 임신한 배를 보여줌으로써 여성임을 암시하는 기호들은 다소 작위적인 느낌마저 준다. 그렇기에 그의 작업에서 ‘성해방’이라는 주제는 구체적인 현안으로 파고들지 못한다.
(왼쪽부터) Title Fertility No. 5, 1983./ Untitled.
-HIV/AIDS
에이즈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주변의 친구들이 에이즈로 세상을 떠나고, 자신까지 HIV에 감염되었음을 알게 되기 전부터 Act Up과의 협업을 통해 많은 포스터와 인쇄물들을 제작했다. 그의 작업범위는 세이프섹스와 감염인 치료광고 등의 현실적인 메시지들부터 'Silence=Death', 'Ignorance=Fear' 등의 도식적인 메시지까지 걸쳐 있다.
지금시점과 비교할 때, 세이프 섹스와 에이즈 치료 등 'Fight AIDS'로 한정되어 있는 그의 구호는 예방과 치료에 치중되어 있다. 반면 감염인의 삶으로서의 각성된 목소리나 차별반대의 메시지들은 구체화되고 있지 않다고 지적된다.
* 88년도 HIV양성판정을 받은 이후의 드로잉들은 에이즈를 죽음과 그에 대한 공포로 연결시켜 보여주고 있다.
에이즈로 죽음을 달리했던 해링은 자신의 부지런한 제작활동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자신의 감염을 커밍아웃하고 재단을 통해 에이즈치료에 기부활동을 펼쳤던 업적에도 불구하고 감염인으로서 삶을 긍정하기보다는 에이즈를 죽음에 직결시키는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심각하게 경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비판에 앞서 80년대의 감수성 속에서 아직 분기되지 못한 실천으로, 미완성의 가지 뻗기로 보는 것이 설득력 있을 것이다.
기호의 이중적 해석과 소비
그침 없이 분기하고 섞이며 합쳐지고 에너지를 뿜어내는 작품 속 이미지들만큼이나 그의 활동은 범위에 있어 확장일로를 보였다. 작업은 지하철이나 할렘가의 ‘불법’ 낙서에서부터 공공미술, 국제 비엔날레 출품, 상품시장의 광고물 제작에 까지 넓게 포진되었다. 하지만 보편성을 추구하는 그의 활기 넘치는 작업은, 더불어 넓은 범위에 걸쳐 있는 그의 작업영역은 사람들에게 수용되는 양상에 있어 상반된 해석과 수용양상들을 보여준다.
- 아래로부터의 작업과 팝샵
낙서의 방식, 장난 같은 드로잉의 예처럼 그의 작업은 ‘아래’로부터 이뤄졌다. 어느 장소에나 어울릴 수 있는 쉽고 전달 가능한 그의 작업은 대중들이 먼저 알아봤다. 그는 언더그라운드에서의 성공에서 더 나아가 미술계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기를 원했고 이를 성취했다. 앞서 워홀이 그러했고 비슷한 시기 바스키아가 그랬듯 미술계는 뒤늦게야 그의 진가를 인정하고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자본주의와 포스트모던의 담론이 광풍을 일으켰던 당시 미술계에서 이들은 미술계와 대중문화의 경계를 흐렸던 당대의 미술가로 손꼽혔다.
세계 각지에서 많은 이들이 해링의 낙서를 흉내 냈다. 낙서의 성격상 그들의 모방은 전적으로 금지할 수 없는 노릇일 것이고, 그가 모방의 시도들을 금지했는지는 더더욱 의문이지만, 그 딴에는 적잖이 신경 쓰였을지 모른다.
이에 해링은 스스로 팝샵을 만들어 대중에게 다가서는 방법을 선택한다. 자신의 작업 자체를 상품으로 진열하겠다는 포부인 셈이다. 작업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매개로 보는 그의 확장된 작업양식으로 볼 수 있겠지만, 이는 동시에 대중문화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수완이자 의도로 비춰지기도 한다. 해링은 본인의 작업을 소통의 매개로 삼았지만 그와 동시에 미술계와 대중문화 안에서 유명해지기를 원했다. 결국 그것은 소통의 장이 동시에 상품시장에서 돋보이기 위한 구실이라는 작업의 해석적 양날을 드러낸다.
- 키스해링 이후의 ‘키스해링’
그의 사후에도 각개분야의 많은 이들이 그의 작업에 영감을 얻었다. 패션은 말할 것도 없고 미술, 음악, 심지어 가게 간판이나 현재 활동 중인 운동단체들까지도 그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새로운 선전물들을 만들어냈다. 지금까지도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들은 자본시장의 상품디자인의 소재로, 80년대 작가라는 네임밸류로, 소통의 매개로써 넓은 폭에 걸쳐 사람들에게 소비되고 있다.
Madonna - "Into The Groove"
하지만 해링 작업을 소비하는 방식을 면밀히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소비의 위계를 발견하게 된다. 외국에서 유명세를 떨쳤던 게이 작가는 환영하지만 실상 그 존재를 각인하고 있는 현실의 성소수자들을 부인하는 현실. 게이 ‘작가’와 ‘게이’ 작가에 위계적 차별을 두고 있는 모순은 나아가 한국사회에서 성소수자를 대하는 차별과 열광의 모순된 풍경을 반영한다.
끝나지 말아야할 마무리
드로잉의 재능을 소통의 무기로 생각했던 그의 의도처럼, 오늘날 매체의 발달로 그의 작업은 보다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해링의 살아있는 작업들은 꿈틀거리고 있다. 여전히 그림 속에 꿈틀거리는 이미지들은 에너지를 뿜어내며 보편적인 사랑과 삶의 긍정을 노래한다. 포스터와 벽화 속 이미지들은 이제 영상으로, 콘서트장의 빛나는 조명들에까지 빛나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삶의 긍정을 노래하기 위해 그의 작업은 더 많은 에너지를 비축해두고 방사되기를 기다린다. 그것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풀어야 할 몫이자, 우리에게 전달되는 그의 작업정신이 좀 더 분기되어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그의 작업이 꿈꿨던 아래로부터의 삶,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메시지는 이제 우리 모두와 함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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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그는 작업을 통해 crack의 위험성을 알렸다. 크랙은 코카인에서 추출한 독한 마약으로 80년대 등장한 값싼 신종마약이었다. 그것은 심각한 중독성으로 당시 빈민가의 어린이와 청소년에게까지 돌면서 그들을 피폐화했다. 당시의 신보수주의 정권들은 크랙 사용자들의 범죄유발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상류층이 주로 이용하던 코카인보다 100배가 넘는 벌금을 매기고 처벌을 가중시켰다. 정회준 외,『미국 신보수주의와 대중문화 읽기』, 책세상, 2007, p.29. 참조. [본문으로]
- 1988년에 이르러서야 미의회는 HIV 보균자에 대한 직장 내 차별 금지법안을 마련했다. 1990년 레이건은 재임기간동안 에이즈문제에 늑장대응을 한 것에 사과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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