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국 코미디 <필립 모리스>, 미국 SF 판타지 스릴러 <스플라이스>, 중국 로맨틱 코미디 <쉬즈 더 원>, 프랑스 드라마 <레퓨지>, 일본 판타지 드라마 <파코와 마법동화책>, 영국 미스터리 스릴러 <크랙>, 미국 드라마 <테이킹 우드스탁>. 이상의 영화들은 제작국가와 제작 시기는 저마다 다르지만 최근 한 달 사이에 국내에서 개봉한 비교적 저예산의 영화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들을 모두 관람하고 나서 또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바로 (유사) 성 소수자들이 주조연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더불어 그들은 동성애 혐오적인 편협한 재현 전략으로부터도 벗어난 채 다른 캐릭터들과 함께 균질적으로 진지하게 영화 텍스트에 스며들어 있다.



이 영화들이 한 달 전체 개봉작 중 30%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니 결코 적은 수는 아니다. 퀴어들에게 각박한 한국 사회를 향한, 국적과 장르를 초월한 실로 어마어마한(?) 비율의 협공이 아닐 수 없다. 그럼 이 영화들에 등장하는 성 소수자들의 면면을 간략히 살펴보자. 우선 실화를 바탕으로 한 <필립 모리스>는 짐 캐리와 이완 맥그리거가 게이 커플로 등장해 화제가 된 작품이다. 감옥에 갇힌 스티븐(짐 캐리)이 사랑하는 모리스(이완 맥그리거)를 보기 위해 여러 차례 탈옥을 감행하는 로맨틱한 내용의 퀴어 코미디이다.


그리고 펑 샤오강 감독의 <쉬즈 더 원>은 서기와 게유가 주연을 맡은 로맨틱 드라마이다. 공개 구혼 사이트에 결혼 상대를 찾는 광고를 올린 노총각 진분(게유)이 처음으로 만나는 상대가 게이이다. 과거에 이미 진분과 친분이 있었던 그는 진분에게 당당하게 말한다. 당신이 쓴 글에 여자만 구한다는 말은 없었다고! 오늘날 급변하는 중국의 세태를 잘 반영했다. 다음으로 양성애자로 커밍아웃한 프랑소와 오종 감독의 <레퓨지>에 등장하는 게이 ‘폴’은 자신이 짝사랑했던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무스’와 술김에 섹스를 한다. 이제 곧 태어날 아기는 폴의 아기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 혹은 자신의 유전자가 섞인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게이의 욕망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 밖에 나키시마 테츠야 감독의 <파코와 마법동화책>에는 트렌스젠더 여성이 부모를 교통사고로 잃고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소녀 ‘파코’가 입원한 병원의 동료 환자로 등장한다. 그녀는 자신의 현재 모습 때문에 오래전에 헤어졌던 아들과 재회할 수 없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1920년대 영국의 여자 기숙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크랙>은 매혹적인 여학생에게 느끼는 낯선 감정으로 괴로워하는 여교사가 나온다. 그리고 <테이킹 우드스탁>은 너무나도 유명한 음악축제인 ‘우드스탁 페스티발’ 설립의 주역인 ‘엘리엇 타이버’의 자전소설을 바탕으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물론 그는 게이이며 그의 자전소설에는 영화에서 못다 보여준 동성 성애의 경험들이 진하게 녹아있다. 끝으로 <스플라이스>는 명확한(?) 성 소수자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인간의 유전자와 다양한 동물들의 유전자를 조합하여 창조해낸 신생명체 ‘드렌’이 성장함에 따라 여성에서 남성으로 자연스레 전환되는 모습을 통해 퀴어 정체성을 은유적으로 독해해 낼 수 있다. 더욱이 영화 속에서 그/그녀는 성애적으로 부각되어 나타난다.

 

이처럼, 그 어떤 멜로드라마의 선남선녀 커플도 울고 갈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의 주인공으로서의 동성애자, 종족번식을 꿈꾸는 게이, 사랑하는 아들을 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한 트랜스젠더, (성 정체성이 뭐든 간에) 호감 있는 남자에게 당당하게 대시하는 게이, 자신의 욕망을 뒤늦게 인정한 레즈비언, 역사에 남을 위업을 달성한 실존인물로서의 게이 등 실로 다양한 캐릭터의 개성강한 퀴어 군상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성 소수자 문제에 무관심한 이성애자들이 무턱대고 이 영화들을 한 달 동안 섭렵했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성 소수자들에게 친근해지거나 학습되는 효과를 누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홍보 전단지나 포스터에 적힌 문구에서는 이러한 정보를 찾아보기 힘드니, 거기에 반감을 가진 관객들도 어쩔 수 없이 ‘낚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 영화라는 매체에서 이제 더 이상 성 소수자들은 낯선 대상이거나 편견어린 시선의 희생자가 아니지만, 그것에 만족한 채 마냥 환영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각국의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자국 관객을 대상으로 제작된 이 영화들이 각각의 흥행 요소, 즉 영화의 완성도, 영화제의 후광, 감독과 배우의 인지도, 장르적 재미 등 -물론 동성애라는 주제나 동성애자 관객의 공략은 아니다-을 내세워 국경을 횡단하여 한국에까지 도달했다. 일단 돈을 들여 수입을 했으니, 영화라는 상품은 국내 소비자의 구매욕을 자극할 수 있도록 최대한 재밌게 포장을 해야 한다. 이제 영화의 홍보는 철저하게 지역화의 과정을 거친다. 일례로, <필립 모리스>는 원제인 <아이 러브 유 필립 모리스>에서 ‘I Love You’를 떼어내면서 동시에 동성애적 암시를 과감히 삭제해버렸다. 더불어 이 영화의 수식어는 게이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코믹 탈옥기나 기상천외한 사기꾼 이야기로 바뀐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동성애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관객들에게도 배신감을 준다는 것이다.


2.


초기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사적 가부장제의 억압으로 일터에서 배제되었고, 후기 산업자본주의 사회에 이르자 생산성 확대를 도모하기 위한 자본가의 요청에 따라 여성을 공장으로 불러들이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 변화는 남성과의 엄격한 임금 차이를 통해 여성을 남성으로부터 뚜렷이 분리시키는 공적 가부장제의 시작을 알렸다. 즉 가부장의 억압 형태가 배제에서 분리로 모습을 바꾼 것뿐이다.


영화 산업의 이미지 경제에서 성 소수자의 모습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변해갔다. 한때, 영화 속에서 배제되었던 성적 소수자들이 시대의 요구에 따라 조금씩 가시화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편견과 무지에 의해 줄곧 정상성으로 가정된 이성애적 섹슈얼리티로부터 분리‧왜곡되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호명되지 못하는 반쪽짜리 존재로 재현되었다. <번지점프를 하다>를 동성애 영화가 아닌 보편적 사랑 이야기로 봐달라는 감독의 요구가 그러하다. 그들은 가시화와 비가시화 사이에서 산자도 죽은자도 아닌 유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다행이도 수많은 투쟁을 거치면서 오늘날에는 성 소수자들이 온전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이제는 전지구적인 이미지 경제에서 성 소수자 재현은 그리 낯설지 않을뿐더러 나아가 당당히 경제적‧문화적‧정치적으로 자신의 몫을 당당히 챙기고 있다. (서구와 제3세계 간의 이미지 격차로 인한 부작용도 있으나 여기에서는 논외로 하자.)


그러나 그러한 세계적 흐름 속에서 한국은 여전히 도태되어 있다. 한국영화 속 성 소수자 재현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성 소수자들이 생산적으로 재현된 해외 영화들을 수입하면서 다시 한번 그들을 가시화와 비가시화 사이의 굴레 속에 집어넣어 버린다. 즉 영화 속에 엄연히 가시화된 존재들이 각종 홍보 문구 속에서 그 존재감이 최소화되거나 지워져버린다. 소위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저 영화의 퀴어적 요소에 대해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은 채 침묵하는 행위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 우연히 스쳐지나가듯 퀴어(가 등장하는) 영화들을 만나고 또 아무렇지 않게 침묵 속에서 보내버릴 수는 없다. 침묵은 결코 인정이 아니다. 물론 나는 궁극적으로 퀴어영화라는 장르 아닌 장르가 없어지는, 그리하여 모든 영화가 퀴어영화일 수 있는 세상을 욕망한다. 여기에서 ‘퀴어’라는 수식어의 탈락은 결코 성 소수자들의 특수성을 서둘러 인간의 보편적 감수성으로 무마해버리는 비겁한 몸짓이 아니다. 그 보편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퀴어의 이름을 골백번 불러줘야 한다. 퀴어가 인간의 보편성 속에 묻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퀴어가 그 보편성의 근간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한다.   


김경태 _ 동성애자인권연대


  1. 동시신호가 웅이라고
    2010.08.07 04:07 [Edit/Del] [Reply]
    잘읽었습니당-ㅎ
    읽다가 하나 비슷한 얘기가 떠올랐어요.

    프란츠 파농은 자기 앞에서 선긋고 쿨한척 하면서 흑인 얘기를 하려는 이들에게
    '흑인'에 관한 어떤 얘기도 하지 못하게 입을 막거나
    아니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인종주의에 대한 얘기를 해줘야된다고 말했는데

    차별의 딱지가 떨어질때까지 '퀴어의 이름'을 골백번 불러줘야 한다는 말, 정말 공감해요-
  2. 경태
    2010.08.07 07:44 [Edit/Del] [Reply]
    그래요~ 우리 모두 사람들의 귀에 딱지가 앉을 때까지 퀴어의 이름을 불러봐요!ㅋ
  3. 정욜
    2010.08.07 18:49 [Edit/Del] [Reply]
    반복학습의 효과인가.

    우리 사회와 보수우익들은 동성애 혐오를 조장하며, 성소수자들의 존재 자체에 빨간줄을 확! 그어버리고 있지만
    우리는 혐오에 맞서, 퀴어의 이름을 골백번 부르며 끊임없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야 할 것입니다.

    해외 영화작품들이 한국에 수입될 때마다 마케팅의 역효과가 우려되어 퀴어라는 말자체를 꺼려한다면. 우리는 퀴어라는 말을 지겹도록 반복하며. 영화를 재탄생시킬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4. 이반해방전
    2010.08.08 21:37 [Edit/Del] [Reply]
    언제든,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동성애, 동성애자, 퀴어, 이반,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양성애자
    동성결혼, 파트너쉽,
    동성의 사랑의 가치
    이 테마를 끊임없이 외쳐서
    메아리치고 우리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그 권리가 보장되고 차별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감동적인 글 잘 보았습니다 ㅎㅎ
  5. 이경
    2010.08.10 23:41 [Edit/Del] [Reply]
    마지막 문단이 가슴을 울리네요~ 찡~~~~
    맞아요. 침묵은 인정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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