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와 동성애혐오

 

콜린 윌슨
번역 : 이나라_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

원문출처: <Socialist Review> 2011년 5월호
http://www.socialistreview.org.uk/article.php?articlenumber=11654

 

최근 몇 년간 LGBT 쟁점에 대한 국제 기사들이 부쩍 증가했다. 콜린 윌슨은 활동가들이 세계의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겪는 공격에 분노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지만,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을 부추기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동성애혐오를 넓은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지난 2월 BBC 방송은 우간다를 다룬 다큐멘터리, <동성애자로 살기에 최악의 장소?>를 방영했다. 라디오1의 동성애자 DJ 스콧 밀즈가 진행한 이 다큐는 암울한 사실들을 담고 있었다. 우간다에서는 동성 성행위에 대해 행위자가 이전에 처벌받은 적이 있거나 HIV양성인 경우, 또는 18세 이하와 성행위를 한 경우에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법률을 의회에서 논의하고 있는 상황으로 레즈비언과 게이들에 대해 심각한 공격이 벌어지고 있다. 우간다에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대중적 적대감이 널리 퍼져 있어 지난 1월 맞아 죽은 데이빗 카토처럼, 동성애자 활동가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공격을 받는다.

 

2010년 5월에는 말라위 정부도 스티븐 몬제자와 티옹게 침바란가 -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여성으로 정체화한 - 를 전통 약혼식에서 체포해 14년형을 선고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커다란 국제적 압력이 있은 뒤 결국 그 부부는 사면됐다. 동성애혐오 공격은 무슬림 국가들에서도 벌어졌다. 2001년 이집트에서는 카이로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21명의 남성들이 체포돼 “상습 문란행위”로 3년형을 선고받았고, 이란 정부는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들을 처형하고 공개 태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인식

이런 사실들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프지만 그만큼이나 우려스러운 것이 있다. 오늘날 LGBT 언론과 커뮤니티의 일부에서 “상식”이 된 인식, 즉 아프리카와 중동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동성애를 혐오하는 반면 백인 서구 유럽인들은 우리 편이라는 인식이다. 이런 인식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식민지 시절 스타일의 인종차별주의 - 백인들은 계몽됐고, 비백인들은 후진적이라는 - 와 너무나 비슷하다. 이런 인식은 요한 해리가 최근 동성애자 잡지 <애티튜드>에 쓴 기사처럼 이 나라[영국]의 무슬림들을 향한 이슬람혐오와도 아주 잘 맞아 떨어진다. 그 글에서 요한 해리는 무슬림 가운데 동성애자에게 우호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은 정확히 0퍼센트라고 주장했다. 이런 인식은 무슬림들의 동성애혐오에 반대해 LGBT 권리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영국수호동맹[영국의 신나치 조직]에게 힘을 실어 줄 수도 있다.

 

영국 무슬림들에 대한 그러한 고정관념들은 전적으로 부정확하다. 다른 모든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일부 무슬림들은 동성애를 혐오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스톤월 조사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동성애를 혐오할 가능성에 차이가 없음을 거듭해서 보여준다. 편견을 가진 경우가 가장 많은 집단은 무슬림이나 소수 인종 출신인 사람들이 아니라 나이 든 백인 영국 남성들이다.

 

영국에서 동성애혐오에 맞선 투쟁은 또한 끝난 것이 아니다. 스콧 밀즈는 캄팔라의 한 게이 바에서 일단의 남성들에게 “영국에서 게이로 사는 것은 편하고 어디서나 인정받는다”면서 자신은 런던에 있는 어떤 술집에서도 동성애자임을 드러낼 수 있다고 장담하지만, 진실은 장밋빛이 아니다. 이안 베이엄은 2009년 트라팔가 광장에서 동성애혐오 공격으로 맞아 죽었다. 스톤월의 자료에 따르면 매년 게이/레즈비언 8명 가운데 한 명이 혐오 범죄의 피해자가 된다. 영국에서 평등한 동의연령을 쟁취한 것은 2000년 이후였고, 1967년까지도 모든 남성간 성행위가 불법이었다. 미국의 41개 주는 여전히 동성결혼을 금지한다. LGBT 권리 보장이 서구적 가치의 핵심적인 일부라는 얘기는 어불성설이다.

 

예를 들어, 스톤월 조사는 LGBT 난민들이 출입국 관리 당국에서 끔찍한 대우를 받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LGBT 난민들은 때로는 끔찍한 개인적 경험들을 공무원들에게 머뭇거림 없이 설명할 것을 요구받거나, 섹슈얼리티를 의심받고, 아니면 출신국으로 돌아가 “신중하게” 살라는 얘기를 듣는다.

 

우리에게는 “상식”보다 더 나은 이해가 필요하다. 이것은 국제 정치 질서의 성격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서로 경쟁하는 국가들로 나뉜 세계에 산다. 각각의 국가에는 정치적 경제적 권력이 통합돼 있다. 예를 들어 석유는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상품이기 때문에 미국은 석유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정치군사적 권력을 사용한다. 맑스주의자들이 제국주의라고 부르는 이런 체제에서는 몇몇 국가들이 나머지 국가들보다 훨씬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있다. 미국은 현재 경제적 군사적 권력을 사용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방대하고 잔인한 제국을 지배했다. 영국제국은 원래 카리브해의 노예제 위에 세워졌고, 1848년 기근 때 아일랜드에서 식품 수출을 계속해 1백만 명을 죽이고 1857-8년 인도 대항쟁[세포이항쟁]을 탄압하며 수천 명을 살해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정복

 

제국주의의 주된 동인은 언제나 영토, 자원, 무역의 통제권이었다. 콜럼버스는 중국으로 가는 무역로를 찾다가 우연히 미국으로 항해했다. 그런데 성억압 또한 그 그림의 일부인 경우가 많았다. 일찍이 1495년 콜럼버스의 두 번째 미국행 항해에서 선원 미켈레 데 쿠네오는 집으로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한 아름다운 카리브 여자와 마주쳤고 “제독님이 그 여자를 나에게 주었다”고 전했다.

 

성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는 서로 다른 문화의 상대적 가치의 척도가 됐다. 영국인의 격식을 차리는 태도가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인의 더 편안한 태도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졌다. 1861년 대인법죄법(Offences Against the Person Act)에 의해 제국 전역에서 남성간 항문성교가 금지되면서 그때까지 많은 곳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금기가 생겨났다. 비유럽 세계는 이국적이고 관능적인 장소로 여겨졌기 때문에 유럽인들의 성적 놀이터로 그려지기도 했다. 고갱은 태평양 섬들의 벌거벗은 젊은 여성들을 그렸고 다른 화가들은 호화로운 장식품들과 말 잗 듣는 성노예들로 가득 찬 하렘을 묘사했다.

 

성적 종속은 예술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19세기 영국령 인도에서는 영국군 사병들 대다수가 부인과 함께 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대신 군대가 인도 여성들과 소녀들 - 12살 정도밖에 안 된 경우도 있었다 - 이 영국 군인들에게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곽들을 만들었다. 식민지 관리들의 회고록들에도 같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1950년대 말레이시아의 한 영국인 고무나무 농장주는 요리도 하고 그와 섹스도 하는 하녀를 제공받았다고 회고했다.

 

이런 성적 놀이터는 다른 남성과의 성관계를 원한 남성들에게도 열려있었다. 그곳으로 여행할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경우에는 말이다. 영국 소설가 E M 포스터는 1914년 이집트에서 다른 남성에게 동정을 잃었다. 1960년대 동성애자 극작가 조 오튼은 10대 남성 매춘부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모로코에서 휴가를 보냈다. 이런 경험들은 이슬람 국가들이 기독교 국가들보다 남성간 성관계에 더 관대하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840년대에 파리를 방문한 한 모로코인은 프랑스인들의 관습을 놀라워하며 이렇게 썼다. “그들에게 구애, 연애, 교제는 오직 여자들하고만 일어난다. 소년이나 젊은 남자들은 그들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지극히 수치스러운 일이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며 발전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독립운동이 보기에 성착취는 제국주의의 도덕적 파탄의 한 예였다. 위대한 반식민주의 작가 프란츠 파농은 자신의 책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서양 부르주아지의 욕구을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휴식, 휴양, 오락의 중심지”였던 카리브해에서의 성착취에 대해 썼다. 성적 존엄성,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은 이국적이고 관능적이라는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에 대한 거부, 착취, 특히 여성에 대한 착취의 종식은 따라서 반식민주의 운동의 일부였다.

 

민족주의 운동 활동가들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농촌 빈민이나 농민, 노동자가 아니라 도시에 사는 중간계급 사람들이었다. 일반적으로 남성인 그들은 선교사들이 운영한 학교에서 교육받고 영어나 불어를 할 줄 알았고, 의사나 변호사, 공무원처럼 유럽식 전문직 종사자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신들의” 국가를 통치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고, 이런 생각에서 백인 식민주의자들을 반대하게 됐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국민 다수와 멀어지게 했다.

 

민족주의자

 

그런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능력 있고 품위 있는 통치자가 될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20세기 중엽의 많은 반식민주의 투쟁은 결국 주로 지배자들이 바뀌는 것으로 귀결됐다. 흑인 통치자가 백인 통치자를 대체했다. 이것이 진정한 진보이긴 했지만, 사회의 기존 구조는 대부분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대중과의 분리는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섹슈얼리티에 대해 취한 태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국민국가와 현대화 같은 유럽식 개념들과 함께 그들은 당시 유럽에서 지배적이던 섹슈얼리티에 대한 생각들을 받아들였다. 예를 들면, 19세기와 20세기 아랍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사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식민지가 됐다고 주장했다. 독립을 얻기 위해서는 민족문화를 부활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때의 민족 문화는 유럽식 기준에 맞게 재창조된 것이었고, 따라서 예를 들면 9세기의 위대한 아랍 시인 아부 누와스의 시들 가운데 소년들과 포도주의 기쁨을 언급한 것들은 선집에서 제외되기 시작했다.

 

성에 대한 민족주의자들의 태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마지막 한 가지 요소는 반식민주의 투쟁들이 대부분 20세기 중엽에 승리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는 소련의 급속한 경제 발전이 많은 민족주의 운동에게 매력적인 모델로 보였다.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스탈린주의 정치에 영향을 받았다. 스탈린주의는 옛 식민지 지배자들에 비해 급진적으로 보이는 대안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동성애를 포함해 어떤 면에서도 급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련에서 동성애는 불법이었다.

 

이것은 반식민주의 운동이 어떻게 해서 19세기 유럽에서 일반적이던 성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이게 됐는지 설명해준다. 그러나 말라위와 우간다에서 최근 벌어진 사건들에 대한 더 자세한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아프리카 특유의 몇 가지 쟁점들을 살펴봐야 한다.

 

전통

 

지구상의 다른 모든 곳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이전의 아프리카 사회들에도 여자끼리 또는 남자끼리 하는 성관계가 존재했다. 1950년대 한 인류학자는 케냐와 우간다의 이테소족 가운데 “양성구유 성향을 타고난 사람들이 매우 많다”고 보고했다. 오늘날까지 아프리카 일부 지역들에는 젊은 여성들끼리 포옹하고 입을 맞추고 때로는 성관계도 갖는 전통이 존재한다. 19세기 우간다의 음왕가 왕은 자신이 시동들과 성관계를 맺는 것은 전통이라고 주장했다. 시동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뒤 [성관계를] 거부하자 왕은 30명의 시동들을 처형해 자신의 권위를 보여줬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은 흔히 - 스콧 밀즈의 다큐멘터리에서도 거듭되듯이 - 동성애는 비아프리카적인, 유럽에서 들어온 파괴적인 수입품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생각은 다시 한 번 식민지 시대, 그리고 제국의 여러 지역들에서 발전한 태도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인들은 아시아 역사에 발전한 문명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 유럽인들이 아시아를 정복한 뒤에는 아시아인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던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섹슈얼리티도 [아시아인의] 저속함에 포함됐다. 따라서 유럽인들은 중동이나 인도에서 남성끼리의 또는 여성끼리의 성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한편, 식민주의 강대국들은 아프리카와 태평양 사람들은 역사가 없는, “자연 상태”에 사는 원시적이지만 자연스러운 사람들로 봤다. 유럽인들은 이런 생각을 통해 자유주의적 주장을 하기도 하고 반동적 주장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태평양 사람들이 청소년의 섹슈얼리티[성적 관심과 표현, 경험]에 관대한 태도를 지녔다고 주장했다. 즉, 청소년의 섹슈얼리티가 자연스럽고, 따라서 유럽인들과 미국인들도 같은 접근방식을 취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의 섹슈얼리티의 가정된 “자연스러움”은 또한 아프리카인들이 “부자연스러운” 동성 성행위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했다.

 

배경

 

이런 배경 속에서 우리는 우간다와 같은 나라들에서 동성애혐오의 성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우간다는 가난한 저개발 국가다. 국민 3명 중 1명이 하루 1달라 미만으로 살아가고 5명 가운데 4명이 농업에 종사한다. 이것은 제국의 유산이다. 식민지의 역할은 공산품이 아니라 원료 생산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제국주의는 부채와 사유화로 아프리카의 발전을 더 한층 저해했다. 우간다 대통령 무세베니는 1986년 권좌에 오른 뒤 이런 공격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첫 번째 임기 초 그는 IMF와 세계은행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합의해 국영기업을 헐값에 사유화하고 정부지출을 삭감했다. 그는 워싱턴에서 인기를 얻게 돼 1997년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무세비니를 그들이 “일당 민주주의”라 부른 체제를 운영하는 “희망의 불빛”이라고 표현했다. 사실 무세베니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고문하고 위협한 덕분에 권좌에 남아있는 것이다.

 

동성애혐오를 조장하는 것은 무세베니에게 편리하다. 소수자들을 희생양삼음으로써 자신의 부패로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고 자신을 유럽과 미국의 부패에 맞선 소위 말하는 아프리카 전통 문화의 수호자인양 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국제 금융기구와 다국적기업들과 한통속이었다.

 

미국의 기독교우파들도 우간다의 동성애혐오를 조장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뉴욕타임즈> 2010년 1월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도들이 그 전 해 우간다인 수천 명이 참가한 회의에서 한 연설이 반동성애법안을 발의하게 된 계기가 됐다. 그들은 청중들에게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가 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으며 동성애가 소아성애와 관련이 있다고 얘기하는 데 3일을 보냈다.

 

교회

 

우간다의 성공회교도 형편없는 점수를 보여준다. 동성애자 활동가 데이빗 카토의 장례식에서 성공회 신부는 동성애혐오 발언을 쏟아 냈고, 성공회 주교들은 작년 한 회의에서 반동성애자 연설자들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성공회교는 반동성애법을 반대한 한 퇴임 주교의 연금을 삭감했다.

 

이렇듯 우간다의 동성애혐오는 서방 정부들이 공모한 가난과 민주주의의 부재라는 맥락 속에서 발전했고, 미국 우익 기독교도들과 영국에 근거한 교회의 일부 사람들에 의해 유발되고 지속됐다. 따라서 영국이나 미국 같은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LGBT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정부들에 반대해 자신들의 정부를 편드는 것은 부당하다. 그것은 그런 나라들의 LGBT들에게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첫째, 유럽의 개입은 동성애가 아프리카나 아시아 문화의 일부가 아니라는 주장을 강화할 수 있다. 영국 활동가들은 짐바브웨, 자메이카, 우간다와 말라위 같은 옛 영국 식민지들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영국의 출신인 누군가가 이들 나라들의 인권 수준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제국의 야만성을 기억하고 있는 그런 나라 사람들에게 우습게 보일 수 있다.

 

둘째,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사람들의 생각은 그곳 사람들이 그런 변화를 스스로 쟁취한 경우에만 진정으로 변화할 것이다. 물론, [서방] LGBT들이 마녀사냥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끔찍해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연대를 표현하고 도움이 될 일을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그곳 사람들이 스스로 투쟁했을 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와 중동의 LGBT들에게 변화를 가져오는 데에서 서방의 생각, 지원, 돈은 핵심이 아니다. 이곳에서 누군가 우리 손에 자유를 쥐어 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람들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 싸운 것처럼,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 사는 성소수자들도 해방을 위한 자신들의 길을 찾아야 한다.

 

해방

 

그런 변화는 실질적 가능성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을 쟁취한 것은 흑인 노동자들의 거대한 파업이 사회적 격변을 일으켜 사람들이 기존에 받아들이던 모든 사상에 의문을 제기한 거의 혁명에 가까운 상황 속에서였다. 해방운동에 참여한 동성애자들은 커밍아웃했다. 감옥에서 인종차별주의 정권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은 상황에서 커밍아웃한 경우들도 있었다. LGBT들이 운동의 일부라는 사실은 활동가들이 새로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인종 정의뿐만 아니라 레즈비언과 게이를 위한 정의도 실현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도움이 됐다. 1996년 헌법에는 세계 최초로 동성애자 권리가 포함됐고, 고용, 사회서비스, 시민결혼에서의 평등을 보장한 법률들이 통과됐다. 이런 각각의 분야에서 남아프리카는 영국보다 먼저 평등을 보장했다.

 

이런 변화들은 첫걸음이고 뒤집힐 수 있지만, 중요한 사실은 제국주의가 동성애혐오가 자라날 수 있는 맥락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성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우리는 제국주의자들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맞선 투쟁의 일부가 돼야 한다.


  1. 이경
    2011.05.19 16:49 [Edit/Del] [Reply]
    와 ~ 재밌어여~ 잘읽었어요~ 진짜 서구라고 동성애가 완전히 자유로운 것도 아니면서...-_-; 긴 글인데 번역하느라 고생이 많았겠슴~ 추천꾹!
  2. 나라
    2011.05.20 11:15 [Edit/Del] [Reply]
    헉...첫 문단부터 중대한 오타가...10세가 아니라 18세인데;;;;미셩년자와 동성 성행위 한 경우인데..완전 아동성범죄로 만들어났네ㅜㅜ
  3. 신재연
    2011.05.23 15:18 [Edit/Del] [Reply]
    잘 읽었어요^^ 좋은 글 고마워요^^
  4. 북극광
    2018.03.13 00:49 [Edit/Del] [Reply]
    글이 다양해서 좋아요. 이런 블로그가 있다니. 찾고싶던내용 많이 읽고 갑니다. 2011년이면 7년전부터 불모지에서 이미 이런글을 모아두고있었네요~ 왠만한 일간지수준보다 훨 낫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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