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2년차 초짜 게이, 그리고 에이즈
- 제 10차 아시아태평양 에이즈대회(ICAAP)를 준비하며
제10차 아시아 태평양 에이즈대회 기자회견 모습 <출처 : www. Icaap10.org)
두 달 뒤,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부산에서는 제10차 아시아태평양 에이즈대회(ICAAP)가 열린다. 동인련도 이 대회에 LGBT 소위원회를 구성하는 단체로서 공식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 소위원회의 위원으로 대회 현장에서 동인련, 더 나아가서는 LGBT 커뮤니티의 목소리를 전해야 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내가 소속된 HIV/AIDS 인권팀은 대회가 두 달밖에 남지 않은 만큼 얼마 전부터 본격적인 대회 준비에 들어갔다. LGBT 커뮤니티의 여러 단체들로 구성된 소위원회 역시 위원장을 선출하여 체계를 갖추었고, 조만간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할 것이다. 대회에 참석하는 관련 단체/기구들과 어떻게 접촉하고, 동인련이 주력으로 삼을 의제는 무엇이며, 대회 현장에서 주어지는 부스는 어떻게 꾸며야 하는지와 같은 수많은 논의들과 실행 방법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마도 이 글이 웹진에 실릴 때면 나를 비롯한 동인련 HIV/AIDS 인권팀 식구들은 대회 준비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ICAAP은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제 날짜에 진행된다. 시간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동인련 역시 대회 참석에 대해 많은 논쟁을 거친 후에 이 대회에 공식 참석하게 되었다. 이제 나를 비롯한 HIV/AIDS 인권팀의 목표는 현장에서 우리의 현재, 즉 감염인, LGBT, 그리고 다른 소외된 계층들의 현재를 알리고, 아시아태평양 각국의 현재를 공유하는 것이다.
동인련은 HIV/AIDS 인권팀이 생기기 전부터 에이즈 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LGBT 단체로는 거의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운동의 현장과 함께 해 왔다. 그래서 동인련에는 에이즈 운동에 잔뼈가 굵은 사람들과, 에이즈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많다. 내가 오픈된 게이로 살아온 게 겨우 2년밖에 되지 않았고, 에이즈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HIV/AIDS 인권팀이 생길 때였으니 세 분기 남짓이다. 그야말로 신인 중의 신인인 셈이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 나는 LGBT 커뮤니티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초짜 오픈 게이였고, 그때 에이즈는 내 머릿속에 자그마한 한 부분조차 차지하지 않는 관심 밖의 영역이었다. 당시 나의 동인련 활동은 이제 막 커뮤니티에 데뷔한 게이로서, 혼자가 아니라 나와 같은 정체성을 가진 구성원들로 이뤄진 조직에 소속되어 있다는 안정감을 줬을 뿐만 아니라, 좋은 형, 친구, 동생들을 만날 수 있는 창구가 되었다. 그때 에이즈는 사실 생각도 해 본 적도 없었고, 많은 종로와 이태원의 게이들이 그러하듯이 나만 아니면 장땡인 그런 것이었다. 게이 친구도 거의 없었던 판에 감염인 친구, 아니 감염인 자체도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나는 동인련 활동을 상당히 열심히 했고, 아마도 작년 여름은 내가 보내왔던 여름들 중 가장 뜨겁게 지나갔다. 운영하던 게이 블로그도 그때 급성장했고, 덕분에 나는 몇 명의 소중한 게이 친구들을 얻을 수 있었다. 최초의 커밍아웃도 그때 성공했다. 그리고 가을이 되었다. 동인련에 팀이 생겼고, 활동하는 회원들은 각자의 팀에 소속되었다. 나도 팀을 정해야 했다. 아무래도 그때 HIV/AIDS 인권팀을 택하게 된 것은 정말 우연한 결정이었던 것 같다. 사실 당시 에이즈에 대한 특별한 신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인권팀으로 간다는 회원들 중 내 마음에 들었던 남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정말이지 내가 인권팀에 소속된 것은 우연이었다.
동인련 HIV/AIDS 인권팀이 만들어지고, 여러 가지 활동이 전개되었다. 그때까지도 에이즈에 대한 특별한 감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인권팀이 진행하는 거의 모든 활동에 나는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그리고 늦가을에 나는 동인련의 감염인 회원, 윤가브리엘을 만날 수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난 후 충정로 뒤편의 어느 음식점에서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12월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회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다. 나는 그 회의 참석을 특별한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흔쾌히 승낙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냥 궁금했다. 에이즈 운동이란 것은 무엇일까. 외국은 전업 에이즈 운동가가 많다는데, 그들은 에이즈 운동에 대해 어떤 생각과 전략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같이 가게 될 감염인 회원과 다른 한국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겨울이 되었다. 그리고 5일 동안 1년 내내 여름인 적도의 나라를 다녀왔다. 커뮤니티에 데뷔한 지 8달 밖에 안 된 초짜 게이가 동인련 대표단의 타이틀을 달고서 말이다. 그곳에서 많은 회의들을 하고, 밤에 여러 국적을 가진 사람들과 사적인 이야기들을 하며 서로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뜬구름 잡는 소리로만 들리던 에이즈 운동, 의약품 접근권, 감염인의 인권, 그리고 우리나라 감염인 인권의 위치, 나, 즉 게이들 역시 에이즈는 절대 남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는, 지금이야 지극히 당연하지만 그때는 새삼스러웠던 생각들. 정말 여러 가지 것들을 정돈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2011년이 되었다. 칼날 같은 바람이 불던 한겨울, 보수 종교계에서 커뮤니티를 향해 그들이 가진 막강한 자금력으로 메이저 일간지들에 포비아적 광고를 대대적으로 실었다. 물론 그 광고의 요지는, 게이라서 에이즈가 일반인들에 비해 몇 백 배는 잘 걸린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다. 더 이상 에이즈는 남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를 부정하고 나를 사회적으로 없애려는 세력들의 공격 무기가 바로 에이즈였다. 합법적인 동성애 가족 구성권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2010년대에도 여전히 나 같은 게이들은 게이라는 사실과 에이즈로 이중차별을 당하고 있었다.
다시 뜨거운 여름이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 한국에서는 이제 두 달 뒤에 세계 최고위급의 에이즈 대회가 열린다. 직접 참가자 수만, 수십 개 나라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큰 대회다. 정부는 그들이 좋아하는 ‘국격’을 높일 수 있는 기회임에도 다루는 주제가 에이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예산을 지원하지 않았다. 대기업의 수출 호조로 무역 총액이 과거 열강이었던 영국을 뛰어넘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홍보하면서,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사람들이 일말이라도 참여할 여지가 있는 행사는 그게 규모가 얼마가 되었건 무산시키려 하는 것이 바로 2010년대 오늘의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 한국이다. 게이들이나, 감염인들 역시 이런 이상한 분위기로부터 절대 자유롭지 않다.
사실 대단한 규모라고는 하지만, 에이즈 대회 하나가 한국에서 열린다고 해서 그게 지금 한국 정부의 소수자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렇게 될 것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분명 8월 하순의 부산에는 세계인들이 모이고, 세계의 시선이 집중된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숨어있었던 사람들, 즉 게이, 감염인, 이주노동자, 성노동자들이 부산에서 우리의 현재를 세계인들에게 이야기한다. 그 동안의 외침은 그냥 우리 사회 안에서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은, 그 외침을 들어 줄, 그리고 거기에 메아리를 보내줄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 대회를 준비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숨어있었던 사람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게 된다.
분명 이것은 작은 변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작은 변화가 2020년대, 2030년대 한국에는 큰 변화를 가져다 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나와 동인련 HIV/AIDS 인권팀은 무언가의 시발점에 서서 그것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뛰어난 성과는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서 사라질 수도 있지만, 시발점은 영원히 기록에 남는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 이 순간 동인련 HIV/AIDS 인권팀의 일원으로서 ICAAP을 준비한다.
게이총각_ 동성애자인권연대 HIV.AIDS인권팀
'HIV AIDS' 카테고리의 다른 글
HIV/AIDS 국제 연대와 LGBT의 참여_ 공통점 찾기 (3) | 2011.06.27 |
---|---|
가난한 사람들의 당당한 권리 _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1) | 2011.06.27 |
HIV/AIDS 감염인의 진솔한 일상을 사진에 담다 -“헬로, 윤가브리엘” 사진전의 김준수 작가 인터뷰 (0) | 2011.05.18 |
각자의 언어 만들어내기 (1) | 2011.05.18 |
자전적 에세이 <하늘을 듣는다> 발간 이후 윤가브리엘을 만나다. (0) | 2011.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