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톤(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여가부, 새롭고 낡은 혐오를 열다.


지난 해 여름, 대전시는 성평등기본조례를 양성평등기본조례로 변경하고 성소수자와 관련된 조항을 모두 삭제했다. 정부의 반성소수자적 행보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특히나 많은 이목을 끌었다. 맹목적인 동성애 혐오로 이뤄진 과거 사건(2014 서울시 인권 헌장 사건 등)과는 명백히 다른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혐오였다. 그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사건의 배후에는 다른 정부 기관도 아닌 여성가족부가 있었다. 둘째, 이 사태는 성소수자 관련 조항은 양성평등기본법의 취지에 어긋난다.”라는 터무니없는 논거로 이뤄졌다. 다른 부서도 아닌 젠더 관련 중앙정부에서, 다른 이유도 아닌 양성평등기본법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말이다. 눈 씻고 봐도 개연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파격적인(?) 논리는 대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일까? 여가부의 입장이 새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과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종의 낡은 패턴이 아닐까?

 

 


페미니즘? ‘페미가 누군데?


여가부를 이해하기 위해서 페미니즘을 다시 들여다보자. 페미니즘은 분파도 주장도 다양해서 뭐라고 콕 집어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들의 투쟁사는 그간 여성에게 행해진 억압과 혐오의 경험을 나누고, 언어로 정리하고, 이론화 하는 것이였다. 여성 억압과 혐오를 말하기 위해선 먼저 여성을 말해야 한다. 모든 이념이 그렇듯 주체의 범주 설정은 정치를 위한 필수 과제기 때문이다. 그간 '여성' 범주에 관해선 많은 이야기와 비판이 오갔다. 

 

여성 범주에 대해 많은 논의가 오갔던 과거 배경을 통해 여가부의 만행을 접근하자면, 여가부는 2015년 까지도 여성 범주를 정의함에 있어 제한적 수준에 머무른다 볼 수 있다. 여가부가 비판 받아야 할 가장 큰 이유는, 여성에 대한 가장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논의조차 진행하지 않은 점이다. 여성이 누군지에 대해 열린 논의와 이해가 없는 부서를 어떻게 여성가족부라 할 수 있을까?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를 둘러싸고


젠더이분법에 기반한 제한적 여성 범주에 머무르는 여가부에 대항하여, 여성 성소수자들은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를 외쳤다. 하지만 슬로건을 두고 많은 비판이 나왔다고 한다. 주로 젠더 해체적 관점에 기인한 비판이었다. “이제는 여성을 버려야 할 때가 아닌가.” “왜 다시 이분법 체계로 돌아가려 하는가.” 일련의 비판과 오해에 대한 '해명'이 이번 LGBTI 인권포럼 다시 한 번,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의 주요 주제였다.

 

나기님의 말을 빌리면,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 슬로건은 문자에 박제될 수 없다. 슬로건은 다른 발화자를 만날 때마다 다른 의미를 가진다. 입장도 다를 것이다. 자신을 여성으로 인정해달라고 할 수도 있고, “누군가를 여성으로 남성으로 구분 짓는 그 잣대의 기준이 도대체 뭡니까?” 라고 되물을 수도 있다. 발제자들은 대부분 후자의 관점에 중점을 두었다. 야릉님은 누구에게 숫자 1,2를 넣었다 뺐다 하는 젠더 규범 자체를 문제 삼았다. 그에 이어서 나기님도 여가부의 행정 처리가 지난 여성주의 운동의 역사와 맥락에서 볼 때 한참 뒤쳐져 있다고 말했다. 나영님 역시 중국의 가정폭력방지법과(이 법안의 대상에는 장애인 성소수자 커플, 게이와 헤테로 여성 커플, 동성커플 등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포함된다.) 남성과 결혼한 중산층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여가부의 정책을 비교하며 여가부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꼬집었다.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말하신 박한희님은, 트랜스여성을 단순히 기존의 여성 범주에 편입시키는 방식을 문제삼으며 트랜스여성만의 고유한 경험과 삶의 국면들을 삭제하고 기존 여성 규범을 증명하는 몇몇 장면만을 잔존시킨다고 말했다.

 

 


나도 여성으로 인정하라!”의 진정한 의미/ 젠더 해체의 진정한 목적.


발제자들은 젠더이분법, 규범에 대한 되물음으로서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를 설명했다. 하지만 듣다 보니 나도 여성으로 인정하라!”라는 의미도 다시 재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의 문장 역시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라는 슬로건처럼 다층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여성으로 인정하라는 요구는 단순히 xy가 아니다! xx라고 인정하라!”라는 말로만 들을 수 없다. 시스젠더 헤테로가 아닌 자들은 모조리 추방되는 젠더규범에서, “나에게도 젠더 지정석을 달라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지정석을 여성으로 부르지 않고 대체할 언어가 아직 없기 때문에여성이란 단어를 전유하는 것은 아닐까. “여성을 달라, “여성으로 불리고 있는 지정석을 달라는 것은 같아 보여도 엄연히 다른 말이다.

 

여기서 젠더 해체를 다시 말하고 싶다. 내가 이해한 젠더 해체가 올바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젠더 해체는 여성이나 남성을 아예 말하지 말자!”가 아니다. 젠더 구분을 흐릿하게 하고 분탕을 쳐서, 누가 누구에게 대항해야 하는지 모호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젠더 해체의 목적은 기존의 여성 범주에 들어오지 못하던, 따라서 여성해방 운동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 이들을 가로막던 장벽을 제거해버리고 많은 이들을 끌어안자는 것이다. 주체를 더욱 강화하고 몸집을 키워서 더욱 강하게 대항하자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생각하는 여성이 가진 의미 중 하나는 , 페미니즘 운동을 위한 정치적 플랫폼이다. “여성을 달라나를 그렇게 불러 달라지만 여성으로 불리고 있는 그 지정석을 달라는 그 플랫폼 안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성을 버리기보다 더 올바르게 말하고 더 다양하게 모이고 더 다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여성이라는 개념을 폐기하는 것은 우리가 모일 수 있는 유일한 플랫폼도 버리는 것이다. 사실 여성은 마음대로 버릴 수도 없다. 야릉님과 잇을님의 말씀대로, 여성은 내가 여성이 아니고 싶다고 해서 쉽게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여성은 관계 속에서 호명되고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이들을 여성에 포함하는 방법

 

여성 범주에 많은 이들을 포함하고, 포함하는 것을 넘어서 제대로 융합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나기님의 말씀(“다르게 이름 붙이는 것은 다르게 모이기 위한 것”)대로 다양한 이름을 붙여 그 아래에 다양하게 모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영님 말씀대로 성적지향, 정체성, 경제력, 연령 등의 항목들은 본질적 여성을 중심에 두고 뻗어 나오는 가지가 아니라 그 자체가 여성을 재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여성을 얘기하고 여성을 말하기 위해선 다양한 결집이 필수인 것이다. 기존의 게이 중심 성소수자 운동에서 여성 성소수자 운동으로, 레즈비언 중심 여성 성소수자 운동에서 굳이 ‘lbti’라고 이름을 붙인 것도 그 결집을 다양화하기 위한 과정이다. 여기서 누군가는 어떤 집단(특히 게이)이 배제되지 않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이름을 다르게 붙이는 것은 누군가를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다르게 모여서 폭넓은 데이터를 쌓고 해석을 깊이 해보자는 것이다. 토론 도중 게이가 배제된다는 느낌을 받는 분도 있었고, 실제로 게이를 배제하고 싶어 하시는 분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해온 것, 해야 할 것은 배제도 아니며 다양함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것이 여성을 말하고 성소수자를 말하는 가장 올바른 길이 아닐까.

 

 

 

댓글을 남겨주세요

Name *

Password *

Link (Your Homepage or Blog)

Comment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