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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인 활동/활동 후기

모두가 안전하게 환대받고 살기 위한 법 <차별금지법> - 5월 회원모임 차별금지법 강연 후기

by 행성인 2019. 7. 6.

조나단(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2019년 5월 23일에는 차별금지법에 대해 이야기 하는 회원모임 <차별금지법이라 쓰고 평등이라 읽는다> 강연이 있었다. 6월 1일 퀴어문화축제에서 행성인은 퍼레이드 차량을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이하 차제연)와 함께 준비했기에, 퀴퍼 전 회원들과 차별금지법(이하 차금법)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차금법 강연은 차제연 공동집행위원장 미류님께서 맡아주셨다. 

 

 

 

 

차금법을 제정하기 위한 움직임은 굉장히 오래되었다.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차금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2006년 차별금지법권고법안이 발표되어 제정 권고되었다. 2007년 청와대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에서 논의되어 2007년 10월 법무부 ‘헌법상 평등의 원칙을 실현하는 최초의 기본법’이라며 차별금지법안 입법예고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이때도 반대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성적 지향, 학력,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병력, 출신국가, 언어, 범죄 및 보호처분의 전력' 이렇게 7개의 차별금지사유가 삭제된 법안이 2007년 12월 발의된다. 저 내용들이 빠진다는 것은 위 금지 사유로는 사람을 차별해도 될 수 있다는 차별금지법이 발의된 셈이었다. 제대로된 차금법이 발의되어야 한다는 외침, 차금법에 위 차별금지사유가 들어가면 안된다는 반대 세력의 압박에 17대 국회부터 19대 국회까지 차금법은 제정되지 못한다. 20대 국회와 문재인 정부에 와서도 침묵 속에 차금법은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반-동성애’, ‘반-성평등’, ‘반-난민’ 등 사람들이 평등하게 차별받지 않고 사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반대 당하는 사람들이 모여 제대로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즉 '반대당하는 사람들의 교집합 =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인 것이다. 그런데 이제 차금법에는 차금법=성소수자법 이라는 프레임을 만드려는 세력의 지속적인 활동 하에, 차별금지법이 성소수자'만'을 위한 법인 것처럼 이해되는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성소수자-비성소수자(?) 모두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차금법이 성소수자를 위한 법이 아니냐고 한다면 당연히 맞다. 성소수자 뿐 아니라 모든 구성원들의 평등권과 인권을 보장하는 사회로 나아가자는 법이다. 성소수자를 위한 법이 아니라면 모두를 위한 법이 될 수 없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고 하여 당장 모든 차별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제정조차 유예되는 상황은 차별과 혐오를 해도 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존재를 부정하려는 힘에 맞서기 위해 차금법 제정은 그 시작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차금법이 정말 그 시작이 될 수 있을까? 장애인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고나서 장애인들이 장애로 차별당했다고 말하는 것이 늘어난 것처럼 차금법의 차별금지사유는 어떤 정체성이 문제되는지 열거한 목록이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 부딪치는 억압과 차별)을 해석할 수 있는 언어의 목록이 될 수 있다. 즉 내가 '성소수자라서 차별당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을 내가 겪었다'! 고 해석하며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난 그런 사람 아니라며 자신을 숨기거나, 해명해야 하는 위치에 놓이기 쉽다. "성소수자, 난민은 이런 사람이에요." 증명의 말하기도 모호할 수밖에 없다. 세상 그 누구도 '성소수자', ‘난민’ 그 자체로는 살지 않기 때문이다. "난 이런 사람이에요." 라고 자신을 이야기 하기 위해,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말하기의 장소로서 차별금지법은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이번 강연을 들으며 <사람, 장소, 환대> 책이 생각이 났다. 그 책에 따르면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것,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말해서 사회는 하나의 장소이기 때문에 사람의 개념은 장소 의존적이다. 난민의 예처럼 우리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한나 아렌트는 사회를 ‘현상 공간’ 사회는 각자의 앞에서 상호주관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으로 보았다. 사회는 각자의 앞에 펼쳐져 있는 잠재적인 상호작용의 지평이다. 이 지평 안에서 타인들과 조우하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신호를 주고받는다. 그 신호로 나 역시 상대방과 존중을 주고 받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모두가 모두를 존중하고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를 이루는 것이 왜 어려울까? 차금법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반성소수자를 외치며 이야기 하는 것은 ‘더럽다’, ‘동성애 합법화가 가정과 나라를 파괴한다’ 는 내용이다. <사람, 장소 ,환대> 책을 보면 이러한 현상을 오염을 피하려는 행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무엇에 대해 ‘더럽다’고 말하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신발이 신발장에 있으면 더럽지 않지만, 식탁에 있으면 더럽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비단 물건에 국한 되지 않는다. ‘여성의 자리’ ‘흑인의 자리’ 와 같이 사람에 대해서도 적용되어 왔다. 과거 흑인이 백인 전용 화장실이나 버스에 들어오면 더럽다고 생각한 것처럼 말이다. 더러운 것에 오염이 된 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소중한 분류 체계에 모순과 혼란을 초래하는 대상 혹은 관념에 대한 거부반응’ 그 이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더러운 성소수자로 말미암아 가정과 나라가 파괴된다는 논리는 바로 이와 같은 데서 나오는 것일테다. 사람에 대해 오염의 메타포를 씌우는것은 성원권에 대한 부정 또는 위협이다. ‘더러운 성소수자’라는 프레임에서 ‘성소수자’는 그저 ‘성소수자’ ‘비성소수자’와 같이 분류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이며 인식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학의 문제이다. 

 

사람이 사람 대접을 받는 것, 환대의 권리는 우리가 사람으로서 갖는 권리이다. 환대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일’, ‘이름을 불러주고 인정해주는일’ ‘어떤 사람이 인류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 ‘그가 사람으로서 사회 속에 현상하고 있음을 몸짓과 말로써 확인해주는 행위’이다. 어떤 사람을 절대적으로 환대한다는 것은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처벌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그의 사람자격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 장소, 환대> 책에 따르면 사회란 본디 절대적 환대를 통해 성립한다고 말한다. 차별금지법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절대적으로 환대하는 사회의 초석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법이 제정됨으로써 사회가 깨지는 것이 아니라 더 건강하고 튼튼한 사회로 거듭나게 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