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동(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아이의 치아가 제법 많이 났습니다. 어금니가 나려고 그랬는지 아이가 갑자기 보채기 시작하더니 평소와 다르게 컨디션이 뚝 떨어졌습니다. 그동안 낮에는 제법 잘 가렸던 소변도 매트와 마루 바닥에 쉬아를 보았어요. 예전에도 이빨이 날 때마다 몇 번의 이앓이를 치루었는데, 유치가 흔들려 뽑을 때엔 또 한번 전쟁을 치루겠지요.
*헌혈을 맞이하여 부부 데이트 한번 해볼까?
모국에 살면서 저는 단 한번도 헌혈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헌혈할 때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내포한 질문지가 내심 불쾌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작년에 남편과 저는 필리핀에서 처음으로 헌혈을 했습니다. 헌혈 전 질문에서 (성매매를 의미하는) ‘위험한 성관계’만 물었고, 대놓고 동성과 섹스를 묻지 않았습니다.
지난 달 남편과 저는 아이를 잠시 조 이모에게 맡기고 헌혈하러 갔습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헌혈을 마치고 시내로 나가서 우리 부부만의 시간인 데이트를 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아이는 조 이모가 계속 돌 봐주기로 하고요.
헌혈을 마치고 잠시 집에 들렀더니, 조 이모 왈, 아이가 안방과 건넌방을 들어가보고 엄마 아빠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 간신히 달랬다고 합니다. 그래서 둘 만의 시간을 포기하고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으로 변경했어요. 아가야 가끔은 엄마 아빠만의 시간도 필요하단다. 이 다음에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우리를 따라다니기 싫다 할 때가 오겠지요?
*도심 속에 작은 박물관에 가다
인보와 함께 나선 곳은 시내에 위치한 자그마한 박물관 입니다. 스페인 양식의 박물관에는 건축물 모형과 옛 선조들이 사용했던 도자기가 놓여 있었고 꽃, 산 그리고 해양 동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아이는 낯선 바다 동물과 전시물이 무서웠는지 그리 즐겁지 않은 표정을 보였습니다. 관람을 마치고 매우 친절한 안내원이 가족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필리핀 사회는 대도시와 촌간의 교육과 문화의 불평등이 매우 심각합니다. 촌에 사는 가정은 대부분 가난합니다.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아이를 위한 교육과 문화생활을 누리는 것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 입니다. 문화와 교육을 위한 탐방을 하려면 마닐라와 세부 같은 대도시에 가야 합니다.
아이의 교육과 가족의 문화 생활을 위해 가끔 저는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인보가 학교를 다니면 수도 마닐라에 데려가려고요. 아이 손 잡고 박물관, 문화 대극장, 스포츠 체육관, 대학교 캠퍼스 등 이곳 저곳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 녀석도 K-POP 스타들을 좋아하려 나요? 그럼 한류 콘서트도 가야죠.
*한가위에 빚은 만두
이번 추석은 찰스 아버님의 기제사와 겹쳤습니다. 찰스는 아버님을 위해 필리핀 음식을 만들었고, 저는 한식을 만들었습니다. 명절이 돌아오면 모국이 그립습니다. 한국의 가족, 지인, 그리고 퀴어 동무들이 너무 보고 싶은 날 입니다. 그래서 명절엔 잡채, 부침개와 같은 한식을 만들어 먹습니다.
올해는 만두 만들기에 도전해보려고 마트에 가서 밀가루와 야채 그리고 돼지고기를 잔뜩 사왔습니다. 남편이 당뇨와 고혈압 약을 먹고 있어서 고기를 넣지 않으려고 했으나, 너무도 간절히(?) 원해서 눈 딱 감고 사왔어요. 명절이니 마음껏 먹어도 괜찮아.
생애 처음으로 만드는 만두는 좌충우돌 이었습니다. 우선 인터넷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유튜브를 본 후 레시피를 저만의 요리 노트에 정리했습니다. 그래야만 요리 중간 중간에 요리 노트를 몇 번씩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만두피를 먼저 만들었습니다. 밀가루에 끓인 물을 넣은 익반죽으로 해보았습니다. 3개의 익반죽 덩어리를 만들어 실온에서 숙성 시켰습니다. 밀가루 반죽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더라구요.
역시 고 난도는 만두소 이었습니다. 야채를 갈아서 후라이팬에 볶았습니다. 그리고 고기의 느끼 함에 좋을 듯 하여 김치도 갈아서 볶았지요. 이렇게 볶은 야채와 김치를 다진 돼지고기와 섞어서 만두소도 완성했습니다.
숙성한 밀가루 덩어리를 밀대로 밀고 유리컵으로 모양을 떴습니다. 그런데 작은 컵을 사용하였더니 만두피 사이즈가 크지 않았습니다. 작은 만두피에 속을 한 수저 넣었더니 만두피를 접어 붙였는데, 아뿔싸 물기가 만두피 밖으로 새어 나왔습니다. 아 이래서 전문가들이 야채와 김치를 면포에 넣고 꽉 짜서 물기를 완전히 없애라고 그랬구나.
우리 집에 놀러 온 이웃들이 손을 보태서 만두를 빨리 빚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빚는 동안 저는 부지런히 만두를 쪄냈습니다. 빚은 만두들이 겹쳐져 있어 찜통에 담으려고 떼어냈더니 그만 속들이 터지고 난리가 났습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쪄낸 만두를 터진 것과 온전한 것을 따로따로 그릇에 담았습니다. 온전한 놈은 냉동실에 보관하고 터진 놈은 만두 국으로 끓여 먹으려고요.
만두를 다 찌고 나니 설거지와 정리가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주방을 정리하고 나니 어느덧 시간이 자정이 되었습니다. 저는 완전히 파김치가 되었습니다. ‘아 정말 아무리 손맛이 좋다고 해도 넘 힘들다’라는 생각이 절로 났습니다. 엄마들의 요리는 고생스러워도 맛있는 것을 먹이고 싶은 엄마 맘(心) 입니다.
이번에 만두를 만들면서 찰스 생각이 났습니다. 아이가 생기기 전에 남편을 위해 만두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단 한번도 떠오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자 아이에게 먹이고 싶어졌습니다. 앞으로 아이가 좀 더 크면 명절에 아이와 함께 만두를 만들고 싶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였더니 ‘하하하’ 하고 웃더라구요. 아마도 부모가 되면 아이 사랑이 우선이 되나 봅니다.
*고사리 손으로 조물조물
사람들이 둘러 앉아 만두를 빚는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인보. 자기에게도 반죽을 달라고 해서 조금 떼어주었더니 손으로 조물조물 거립니다. 그리고 자기도 밀대로 밀고 싶다고 졸라대서 밀대를 주었더니 제법 미는 시늉을 냅니다. 이 녀석 손과 옷에는 밀가루 범벅 꽃이 피었습니다.
오늘 낮에는 터진 만두에 반죽으로 만든 칼국수와 수제비를 넣고 끓였더니 맛이 있더라구요. 이 녀석 이름이 뭐냐 고요? 국적불명의 ‘칼제비만두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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