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림(행성인 상임활동가, 모두의 결혼)
작년 모두의 결혼 캠페인을 시작할 때부터 동료들과 함께 일본의 혼인평등소송 선고 기일에 맞추어 일본에 다녀오자는 생각을 해왔다. 소송 기일마다 올라오는 마리포재팬의 SNS 중계나 유튜브 보고회 소식들을 보며, 마리포의 동료들이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직접 현장에서 보고 듣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우리에게도 10년 전 김조광수-김승환 부부의 소송이나, 오소리-소주의 동성배우자 건강보험 피부양자 지위 소송과 같은 소송 운동의 경험은 있지만, 올해 하반기 시작할 본격적인 소송 운동을 계획하고 상상하면서 바로 옆나라에서 5년째 진행 중인 소송 운동의 경험이 점점 더 궁금해졌다.
작년 12월, 태국 방콕에서 있었던 아시아 결혼 전략 미팅에서 마리포재팬의 동료들에게 3월 14일 ‘더블 판결(도쿄 2차 소송 1심과 삿포로 소송 2심)’이 있을 예정이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 이때다 싶어 준비를 시작했다. 여러모로 바쁜 와중에도 넉넉한 마음으로 우리의 방문을 도와주고 환대해 준 마리포재팬의 카토 타케하루 상과 이케다 히로시 상 덕에 모두의 결혼의 8명의 활동가는 3월 13-15일 2박 3일동안 삿포로와 도쿄로 즐겁게 출장을 다녀올 수 있었다.
“모두에게 결혼의 자유를” 소송 삿포로 항소심 결과를 알리는 원고인단과 변호인단 (출처: 모두의결혼) 2019년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를 맞아 일본 전국 5개 지역(도쿄, 나고야, 후쿠오카, 오사카, 삿포로)에서 13쌍의 동성부부가 동성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헌법위반임을 주장하며 제기한 소송이다. 2021년 3월 27일 도쿄에서 8명의 원고가 추가로 소송을 제기하여 현재 6개의 소송이 진행 중이다. 소송의 쟁점은 동성혼의 불인정이 일본 헌법 14조(평등권)과 24조 1항(혼인의 자유), 2항(혼인과 가족생활의 권리) 등의 조항을 위반하는지 여부다. 지난 5년 간 이어진 소송과 운동을 통해 마리포재팬과 대리인단, 원고들은 제도로부터의 배제가 동성부부와 성소수자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혼인평등이 왜 헌법적 권리인지를 입증해왔다. 그리고, 오사카 소송을 제외한 4개의 소송(도쿄 1차, 나고야, 후쿠오카, 삿포로)의 1심에서 동성혼의 불인정이 일부 헌법 조항을 위반한 위헌 혹은 위헌상태임을 확인하는 판결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동안 혼인의 자유를 규정한 24조 1항의 위반을 인정한 판결은 없었으며, 항소심 판결도 없었다. 모두의 결혼이 출장을 다녀온 3월 14일, 도쿄 2차 소송과 삿포로 항소심 판결이 있었다. 14일 오전에 판결이 나온 도쿄 2차 소송의 경우 아쉽지만 동성혼 불인정이 성적지향만이 아니라 성별정체성에 기반한 차별임을 추가로 인정한 것을 제외하면 24조 2항을 위반한 ‘위헌상태’임을 확인한 도쿄 1차 소송에서 크게 나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날 오후 삿포로 항소심에서 그동안 한번도 인정되지 않았던 24조 1항의 위반을 포함하여 주장하는 모든 조항의 위헌을 확인하며 이 날을 일본 혼인평등운동의 중요한 역사적 순간으로 만들었다. |
더블 판결데이
3월 14일 오전 9시 30분, 도쿄지방재판소 근처 일본변호사회관 로비
선고 한시간 전부터 로비는 원고인단과 대리인단, 활동가들로 북적였다. 히로시의 인솔로 로비에 도착한 우리도 일본의 동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작년 하와이에서 만난 테라하라 마키코 변호사님과 호치민과 방콕에서 만난 적 있는 마리포의 인턴 토모카 등 아는 얼굴이 있어 반가운 마음이 컸다. 대리인단의 간사 변호사가 이날 하루의 스케줄과 주요 사항에 대한 브리핑하고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이 날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로비에 모인 사람들은 원고인단과 대리인단을 선두로 현수막을 펼쳐들고, 응원을 보내러 모인 이들과 취재진이 기다리는 재판소 앞으로 행진하듯 이동했다.
재판소 앞에 모인 취재진에게 짧은 브리핑을 마친 원고와 대리인단, 방청권을 배부받은 이들은 선고를 듣기 위해 법정으로 향했다. 우리 중에는 변호사이자 일본어를 잘 하는 한희가 대표로 법정에 들어갔다.
재판소 앞에 남은 사람들은 선고를 기다리는 시간. 취재진도 많았지만, 평일 오전임에도 응원 보내러 모인 커뮤니티 구성원들만 어림잡아 100여명. 4,50대 이상으로 보이는 분들이 많은 것이 인상 적이었고, 아마도 이 날을 위해 등교를 포기하고 왔을 교복을 입은 청소년이 있는 것도 묘한 감동이었다.
선고가 끝나고 재판소 앞에서 선고의 요지가 적힌 현수막을 펼치는 퍼포먼스와 기자회견이 있었다(현수막 퍼포먼스는 일본 시민사회 소송 운동의 전통이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도쿄 2차 소송의 판결은 아쉬움을 남기는 결과였고, 발언을 하는 원고 분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그 아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선고는 이 날의 공식 일정의 시작일 뿐이었다. 짧은 점심시간이 유일한 휴식시간(이 시간에도 대리인단은 판결을 분석하는 회의를 했다.). 오후 실내 기자회견과 삿포로 기자회견 생중계 관람,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뒷풀이까지 이어지는 12시간의 일정.
도쿄의 판결을 아쉬움을 남겼지만, 다행히 같은 날 삿포로에서 결혼의 자유와 평등권 침해를 인정하는 획기적인 판결이 나온 덕에 도쿄에서도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었다. 삿포로 판결문을 받아 본 도쿄의 변호사들이 현장의 커뮤니티 구성원들에게 판결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원고인단과 플로어의 소감을 나누는 시간도 있었다. 테라하라 변호사님이 판결문에서 아쉬운점을 점을 찾을 수 없다며 “완벽하다”, “대단하다”고 말하는 걸 들으며 삿포로 판결이 변호사들도 예상하기 어려울만큼 전향적인 것이었음을 좀더 실감할 수 있었다. 플로어에서 발언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많았다. 한희도 우리를 대표해 ‘한국의 법체계와 일본의 법체계의 유사성이 있고, 한국 법원도 꾸준히 외국의 판례의 흐름을 연구할 것이기 때문에 이후 있을 우리 소송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임을 짚으며 오늘의 결과를 함께 만들어 낸 일본의 동료들에게 지지를 보내는 발언을 했다.
오후 일정과 이어지는 뒷풀이 동안에는 여러 사람들과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다. 우리가 여러 자리에서 자주 쓰는 사진에 나오시는 도쿄 1차 소송 원고 분들께 본인들의 사진이 들어간 자료도 보여드렸는데 너무 기뻐하셨다. 나는 사진과 영상으로만 보던 분들이라 연예인을 만난 기분이기도 했다. 일본의 원고인단과 마리포재팬 활동가를 포함한 다양한 분들에게 한국의 혼인평등운동, 특히 곧 시작할 소송에 대한 지지와 응원을 듬뿍 받아 힘이나는 시간이었다. “빅데이”의 긴 하루를 미리 체험했던 소중한 시간. 가장 큰 다짐은 운동activism을 잘 하려면 운동exercise을 해서 체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혼인평등운동, 공통점과 차이점을 확인하는 시간
다음날 오전, 마지막 공식 일정은 도쿄프라이드하우스레거시에서 마리포 활동가들과의 미팅이었다. 미팅에는 히로시와 우에스기 타카코 변호사, PR과 캠페인을 주로 담당하는 곤 마츠나가, 마리포재팬을 포함해 다양한 커뮤니티 단체와 모임에서 활동하는 키쿠미 스다(4개국어를 하는 엄청난 분!)님이 함께 해주셨다. 미팅을 통해 마리포재팬이라는 캠페인이 시작되기 이전의 혼인평등운동과 관련한 일본 운동의 맥락과 마리포재팬이라는 조직의 구조, 지난 5년 간 마리포재팬이 해 온 다양한 활동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일본이 한국보다 성큼 앞서 나가있는 것 같지만, 사실 상당히 비슷한 어려움이 있고, 특히 정치와 입법 영역에서 어려움을 겪는 문제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탄탄한 지역 커뮤니티를 가지고 있는 것은 많이 부러웠는데, 이건 단지 성소수자 커뮤니티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수도권 중심성의 문제여서 쉽게 풀리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사회적 맥락에서 전국적인 운동을 펼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야 할 다른 돌파구는 무엇일지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원활동으로 운동에 참여하는 주요한 이들의 연령대가 4,50대라는 점이다. 20대 초반의 대학생 인턴도 있지만, ‘운동 커뮤니티’의 주요한 구성원들의 연령대가 주로 2,30대에 집중되어 있는 한국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오히려 우리가 성소수자 단체의 행사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는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까지의) 중간 연령대(?)의 사람들은 많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의 운동 커뮤니티의 연령 구성의 차이가 무엇에서 기인하고, 이런 차이는 실제 구체적인 활동에서 어떤 차이로 이어질지 궁금증이 생기기도 했다.
따뜻한 동료애를 느끼며
이번 출장은 따뜻한 동료애를 느끼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런 중요한 날에 활동가들이 바쁜 건 당연한 일이고, 그 와중에 외국에서 ‘손님’이 온다는 건 너무나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걸 알기에 우리는 최대한 구석에서 조용히 구경하고 오는 것을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아주 큰 환대를 받으며 왁자지껄하게 다녀오게 되었다.
도쿄 출장을 함께 한 나와 한희, 기용, 창구, 소연님은 전 주한 뉴질랜드 대사 필립 터너의 남편이기도 한 히로시의 안내와 인솔로 아주 즐겁고 알찬 3일을 보냈다. 13일 도착하자마자 간 곳은 히로시와 필립의 도쿄 집. 한국에서 활동가들이 왔다고 집으로 저녁식사를 초대하는 따뜻한 마음에 크게 감동받았다. 게이 동네로 유명한 신주쿠 니쵸메도 히로시의 인솔로 처음 가봤다. 14일 공식 일정 내내 우리와 함께 이동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해주고, 모두의 앞에 인사를 시키며 마치 엄마처럼 우리가 머무는 내내 최대한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고 배려해주었다. (플로어의 소감 나눔 시간에 한희에게 ‘너도 얼른 손을 들지않고 뭐하고 있냐’던 히로시는 정말 엄마 같았다.) 한국에서 대사와 대사의 남편으로 5년을 보내며 우리와 맺은 작은 인연에 기대어 너무나 큰 환대를 받았다.
작년 12월 방콕부터 2월 싱가포르, 그리고 이번 도쿄 출장까지, 해외 출장이 많은 연말연초를 보냈다. 그리고 올해는 특별히 해외 활동가들의 한국 방문도 여러 차례 예정되어 있다. 4월 초에 오는 대만평등캠페인의 활동가들과 8월의 프리덤투메리글로벌, 그리고 우리가 소송을 시작할 때 응원차 오기로 한 마리포재팬의 동료들까지. 남은 한 해동안에는 이제 우리가 호스트가 되어 동료들을 맞이할 일들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번 도쿄 출장에서 만났던 마리포재팬 활동가들처럼 따뜻하고 유쾌하게 한국을 방문하는 동료들을 환대할 수 있길. 다짐을 남기며 도쿄 출장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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