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웅(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1
계엄의 밤을 보내고 곧장 독감예방접종을 맞았다. 이번 겨울은 길바닥에 납세한다는 직감에 몸부터 챙긴 거다. 근자에 잘 낫지도 않는 독감과 몸살에 죽다 살아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간 제일 잘한 일로 꼽는다.
매주 광장에 나오는 일 자체는 문제될 게 없다. 동료 활동가들이 전면에 나서서 조직에 들어가 주요 집회와 행진을 기획하고 단식도 불사하는데 깃발 들고 나가는 것 정도야. 매일같이 집회를 나가면 평소 뜸했던 행성인을 비롯한 성소수 동료들도 자주 보고, 동료들도 자주 보고, 자주... 까지다.
판결이 늘어지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다. 집회 초반에는 광장의 새로운 풍경에, 새로운 연대를 확인하는 일에, 발언자의 용기와 웅변술에 감탄했고 각성한 언어들을 아카이빙하겠다는 이들도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몸을 갈아내는 일이다. 트랙터가 넘어오고 광장의 사람들이 젠더퀴어와 논바이너리를 외고, 대설과 한파를 몸으로 맞으며 밤을 새는 일은 집단 차력쇼에 가깝다. 희망은 불안과 맞붙어 있고, 지금은 늘어나는 불안의 지분만큼 피로가 높아진다. 광장에서 만나고, 만나기 위해 광장을 열지만 광장에 머물 수만은 없다. 얼른 내란정국을 닫고 쿨타임 채워서 다음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막이 내려갈 생각을 않는다.
봄기운이 감돌고 장기전의 기운이 감돌면서부터는 하루 평균 걸음수가 1일 1만회를 웃도는 데 의의를 둔다. 마음은 좀먹는데 몸은 건강해진 느낌...이겠냐. 파면이 결정되면 폭동이 일어나도 금세 진압되겠지만, 탄핵이 기각되면 한국의 자살율이 부쩍 높아질거라는 농담 같은 진심 같은 허튼소리를 나눈다. 이렇게라도 해야 걸음이 옮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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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동안 몇 가지 생활에 변화를 줬다. 그 중 하나가 유튜브를 비롯한 SNS 체류시간을 줄이는 것. 온라인 디톡스를 하자고 유튜브 채널정리를 했다.
보는 채널 중에는 시스 일남들이 자기들끼리 언피씨하게 노는 컨텐츠 류가 있다. 관심을 호소하면서 스스로 망가져 크루를 조롱하고 능욕하며 가족을 이용하고 소위 바닥을 과시하며 경쟁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 하루종일 여자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서로를 찐따로 만드는 놀림거리로 소진하거나 대상화하며 자신들의 찌질함을 다시 과시하는 인셀(incel, 비자발적 금욕주의자를 뜻하는 서구권 언어다) 한남들. 본인들 놀리는데 역량을 할애하는 애들. 당신들 딴에는 고충이 있겠거니 생각하다가도 계속 보면 어느순간 나조차 사고가 멈추고 도파민에 절여 있다. 인간이 자기 바닥을 보이는 처연함 같은 정조가 있어 관찰 겸 무념무상으로 봤다.
계엄 전후에는 잘 몰던 차를 부수고 폐차하는 내용이 올라왔다. 온갖 조롱과 절규를 하는 중에도 굳이 빨간 락카로 보닛에 ‘동덕’을 써넣었다. 쟤들도 주워들은 페미니즘을 발밑에 두는구나. 바닥을 보여도 맨땅이 아니었음을 저렇게 보여주는구나. 살짝 배신감이 들었다. 벌칙이랍시고 이태원 호모힐가서 엉덩이 깐 것까지는 넘어갔는데. 다른쪽도 사정은 비슷하다. 인스타그램엔 맨몸 라인을 노골적으로 보이면서 몸자랑을 하던 이가 정색하고 탄핵반대 메세지를 굳이 올리는 이들이 눈에 띄는데, 이걸 계속 팔로잉 해야할까.
이것저것 끊다보니 요즘 알고리즘이 방판처럼 소개하는 내용은 내성발톱 교정 영상 같은 것들이다. 발톱에 ‘동덕’ 같은 걸 쓰지는 않으니까. 한남 컨텐츠에서 내성발톱으로 건너왔다. 내성발톱이나 내란이나. 온라인 디톡스가 무색하지만, 그래도 발톱 자체는 무해하니까.
그들을 최근까지 참고 봤던 건 자기파괴적 조롱이 백색소음처럼 모든 잡념을 지워서만은 아니었다. 피아식별 없이 스스로를 수치스런 상황에 노출하고 치부를 드러내고 속을 다 뒤집어놓아도 같이 합을 맞춰주는 크루뿐 아니라 가족들과도 격의없이 지내는 모습은 그저 구독하고 찾아보는 나에게 원초적인 친밀함의 감각, 실체 없는 그리움 비슷한 기분을 줬던 것 같다. 그것이 거칠고 문제가 많은 걸 알면서도, 경계와 벽을 없애려는 거친 시도들이 보는 입장에는 시선을 사로잡았다. 누군가는 돈으로, 운동과 소비의 자기계발과 과시로, 술과 약물로 넘고 싶어하는 관계의 거리를 한순간에 뛰어넘어버리는 친밀함의 플레이들. 그러니까 내성발톱 같은 것, 아는 감각이지만 내 것이 아니어서 통각을 갖지 않아도 되는 것들, 하지만 언제든 찔리고 곪고 아플 수 있는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것들.
최근에는 신점으로 말하는 탄핵여부 영상에 잠깐 꽂혔다. 점사마다 결과가 갈렸고 많은 경우 탄핵 각하를 말한다. 용하다는 칭찬일색 댓글에 혹해서 채널에 들어가 좀 더 뒤져보면, 2024년 초입에 올린 쇼츠에 이재명이 당해 가을 구속될거라는 호언장담 컨텐츠가 하나씩은 들어 있다. 최근에 무죄 나온 그거 말이다.
이미 나로 말할 거 같으면, 상임활동을 중도하차 하던 당시 코로나 팬데믹으로 너도나도 주식에 관심을 갖던 시절, 데이팅 스캠에 살짝 휘말리고 신점으로 종목별 주가를 점치는 채널에 과몰입한 전적이 있다. 그분들이 정말 용했느냐 하면 글쎄. 조상신 자연신 장군신 선녀도령도 경제와 정치는 쉽지 않구나. 신점은 언제라도 돌팔이 소리를 들을 조롱의 대상이기가 쉽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듣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 듣는다. 특히 지금 같은 정국에서는 모시는 신과 조상님 이름을 함부로 빌려 입으로 똥을 싸고 말하듯 막걸리를 쏟아내는 이들이 넘쳐도 샤머니즘이 주가를 높인다. 그만큼 일상 기반과 헌정이 흔들리면서 불안도 위험도 높다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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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정리하고 추억으로 남겨야 하는 것들이 계속해서 시간을 미루며 미래를 불안하게 만든 지 오래다. 벌써 과거로 넘어가야 했을 일들이 내일을 잠식한다. 당연한 것들이 계속해서 미뤄지며 주도권을 놓친 것 같은 불안 정국에서, 교착 상태에서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은 감각이 2025년 겨울을 기억하게 만들 것이다. 내란 이후 모종의 충동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났다. 자해와 도피, 소비와 폐기까지. 충동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것이 정병이든 도착이든 개인의 일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거다.
이번 인종차별철폐의 날 집회에는 여느때보다 다양한 이들의 발언 구성이 눈에 띄었다. 같이 활동하는 동료들이 자신을 드러내며 경험을 나눠줄 때는 마음이 선연해지기도 했다. 인종 이슈는 멀리 있지 않구나. 그리고 그건 최근의 깨달음도 아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활동가들이 농성을 하던 시절 국회 앞에서 데이팅어플을 돌리다 쪽지를 하나 받았다. 이 날도 인종차별철폐의날 즈음이다. ‘저를 발매트로 써주세요.’
수치플 좋아하는 친구가 내 프로필에 뭐를 보고 찾아온 걸까. 몇차례 만나면서부터는 국회 앞에서 지금 하는게 뭔지 궁금하다고 물었다. 저기서 차별금지법 제정하라라고 농성하는 거야. 자기 나라도 그렇고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고 애초에 못박은 친구는 차별금지법에 대해 몇차례 묻다 말았다.
그는 자신을 '짱깨'로 부르면서 능욕해달라고 요구했다. 요구대로 불러주는 것이 인권일지, 하지 않는 것이 인권일지 고민했다(활동가의 양심...). 요구를 살짝 빗겨나 사사로운 대화를 많이 나눴다. 너는 어떤 민족이야? 머뭇거리기에 더 묻지 않았다. 짱깨는 가능한데, 민족은 알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은 어떤 걸까? 그러다가도 불현듯 물어보지 않은 자기 이야기를 꺼낼 때면 봇물이 터졌고, 그의 가족사를 비교적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밤이 되면 새벽까지 그가 일하는 편의점에 가서 가로수 새순이 돋는 걸 봤다. 한강에서 중국 디저트를 먹으면서도 외국인이 내는 의료보험료가 배 가까이 차이 나는데 혜택은 적다는 걸 듣고 발언에 쓰기도 했다. 이렇게 낭만적이기만 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일하면서 줄곧 힘들다고 칭얼대는 친구는 편의점 앞에 쓰레기를 버리거나 기웃거리다 들어와 말 걸고 가는 노인들과 험악하게 해코지하는 취객의 사진을 몰래 찍어 보내며 야간알바의 고충을 늘어놓았다. 그러지 말라고 정색했는데, 정작 그는 나에게 다른 응답을 바랐을지 모른다.
그가 보이고싶던 바닥과, 그럼에도 지키고 싶던 사사로운 존엄의 항목은 무엇이었을까. 바닥을 보여도 타인에 대한 조롱과 혐오는 하지 말라고 제지하면 될까. 어쩌다보니 나에게는 성적 권리가 개인의 수치심과 취향에, 인종차별철폐운동에서 살짝 빗겨나면서 뒤틀린 인종주의와 불안정 노동에, 내란성 스트레스와 자해충동에, 인생의 불행에, 혐오와 조롱의 사회적 기운에도 결부되어버렸는데 아직 정리하기 어렵다. 소위 bdsm의 역할과 일상은 분리해야 맞지 않냐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분명하게 나눠지기도 어려울 것 같다. 수치심을 탐닉하고 성애화하는 이들을 그저 개인의 성향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지만, 반대로 세간의 해석처럼 특정한 성향을 생애의 불행이나 사회의 위계에 결부짓는 건 동성애 후천설처럼 또 다른 함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주 상관 없는 일 같지만은 않고, 누군가는 자신의 생애에 대한 통념적 프레임을 주도적 밈처럼 반복생산하며 쾌락의 땔감으로 소비한다.
끝없는 '만약'의 질문은 손아귀를 벗어난다. 자신을 '병신'이라 불러야 흥분된다는 장애를 가진 이가 오면 어떻게 응대할까, 인권 퇴근하고 돔섭 모드로 진입하면 만사 땡인가. 자기 신상을 전부 오픈해달라는 '인생포기남'이 찾아오면 어떡하지? (문제는 이런 예들이 상상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거다. 현실에는 이미 자신을 전시하다가 금세 계정을 지우고 사라지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인생포기호소인들이 포기하고 싶은 건 인생 자체는 아닐 것이며 어쩌면 포기는 속임수일지 모른다) 뒷계에서 과시하는 온갖 바닥섭의 모습에서 불현듯 느끼는 불안은 다른게 아니라, 노출된 위험 자체보다도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무언가를 애써 포기를 표명하면서 더 큰 즐거움을 찾고자 하는 대담함의 심연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바깥을 바꾸지 못해 스스로를 투신하는 어떤 충동들처럼, 수치를 쾌락의 컨텐츠로 생산하는 누군가처럼.

‘인권 기반 수치플’ 같은 괴식을 성찰이랍시고 쉽게 얘기하지 않으면서(이런 워딩은 없는 발정도 꺼뜨릴 거라는 말을 들었다), 끝끝내 보여주지 않을지라도 존중에 기반해야만 하는 플레이든 하드섹스든 아무튼 위험을 수반한 비규범적 관계는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올해 인종차별철폐의 날을 보내며 새삼 등장했다. 그리고 그것이 규범적이든 비규범적이든 저마다의 방법으로 광장을 여는 이들과도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으리라 상상을 이어가고 있다.
상대는 한달여 후 예고도 없이 사라졌다. 십중팔구 차단했겠지. 처음부터 해달라는 바닥섭 컨트롤러는 안하고 차별금지법 얘기 같은 것만 하는데 얼마나 재미없었을까. 요즘 가끔 생각난다. 윤석열 탄핵이 중국의 계략이라는 음모론이 어이없게 떠오른 요즘, 산불 낸 이도 중국인이고 맘에 안드는 소식을 계속 내보내는 뉴스앵커도 중국인이며 자기들한테 훼방 놓는 시위대와 경찰마저 중국인이라고 모두의 국적을 세탁해버리는 이들의 가공할 헛소리가 기어이 여론의 대열에 오르는 이 시국을 너는 성애적으로 승화시킬까, 아니면 극도로 경계하며 모른척하고 살아갈까. 큰 일은 없기를. 어디서 누구라도 발매트든 바닥섭이든 아니면 누군가의 곁이라도 뭐든 맘편히 하라고, 응당 가질 수 있는 만남의 기회조차 누리지 못하는 상황이나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일단은 깃발을 들고 거리에 나와 파면과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고 차별금지법을 요구하며 인종차별과 장애차별을 반대한다고,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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