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행성인 HIV/AIDS 인권팀)
성적 페티시를 소개하는 글을 행성인 웹진에 기고한 적이 있다. 바로 ‘괴물 페티시’다. 어릴 때 비디오숍에서 자주 빌려 보던 후뢰시맨, 바이오맨, 마스크맨과 같은 히어로물에 나오는 괴물에 유독 흥미가 있었다. 사춘기에 접어들고 성(性)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내가 그러한 괴물들을 성적 대상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로 괴물 덕질에 천착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실존하는 괴물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겉모습은 괴물이되 그 안에 사람이 들어있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하게 했다. 페티시가 너무 독특하다보니 공감할 사람이 없는 외로움에 사무쳐 트위터 계정을 만들었다. 온라인 상에서 나와 같거나 유사한 페티시를 가진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연기하는 괴물이 아닌 실존하는 괴물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사람 또한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와의 교류는 오래가지 못했다)
괴물 덕질은 나를 알아가는 여정이었다. 이게 왜 좋지? 이것도 좋구나? 와 같은 질문과 감상을 던지며 페티시의 근원을 파헤쳤다. 파다 보니 깊이만 깊어지는 줄 알았는데 그 범위 또한 점점 확장됨을 느꼈다. 다른 성적 취향과 겹치는 지점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 괴물에 대한 관심은 특수분장, 라텍스 의상, 전신 타이즈 의상, 퍼 슈트, 펍 마스크(Puppy Hood) 등으로 이어졌다. BDSM에도 녹아있는 롤 플레잉 적인 요소. 내 안의 또 다른 자아를 연기하는 ‘연출된 상황’에 대한 성적인 이끌림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COVID-19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겨울, 우연한 기회로 절친한 행성인 회원의 트친(트위터 친구)을 소개받게 되었다. 그는 펍 플레이(Pup Play)를 즐겼고 펍 마스크를 착용한 사진들을 업로드 했다. 트위터를 통해 이러한 문화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다지 관심은 없었다. 허나 지인을 통해 슬슬 흥미가 생겼다. 그는 사람을 모으는 재주가 있어서 디스코드 서버를 만들고 자신과 같은 플레이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을 초대했다. 금세 멤버 수가 십 수 명으로 늘어났다. 이듬해 봄에는 첫 정모도 개최했다.
멤버들은 자신의 펍 마스크를 자랑하거나 머리에 쓰고 놀았다. 지금은 나도 장비를 가지고 있지만 그 때는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 것을 써보았는데, 처음 착용했을 때의 감정을 잊을 수 없다. 마치 다른 자아가 된 기분이었다. 부실한 자존감 때문에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습을 마스크가 덮어주었다. 셀카 속의 나는 한 마리의 강아지가 되어있었다. 개처럼 혀를 쭉 내밀고 헥헥 거리고 싶어져서 실행에 옮겼다. 멍멍 짖어보기도 했다. 다들 나이도, 생김새도, 사는 곳도, 하는 일도 각기 달랐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삶과 일상, 섹슈얼한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모임은 항상 즐겁고 따뜻했다.
2024년 10월, 대만 프라이드 퍼레이드 기간에 맞춰 여행을 떠났다. 동성혼이 법제화 된 나라는 첫 방문이었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두 시간 반 거리인데 시먼역 6번 출구 앞 무지개 횡단보도와 대만 프라이드 퍼레이드 홍보 캠페인을 보며 퀴어 프렌들리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부러움과 놀라움이 여행 내내 지속되었다. 타이베이 시내에서 퀴어를 마주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붉은 벽돌의 시먼홍러우 인근 야장 술집들은 게이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펍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에서 봤던 대만 멍멍이들을 현지에서 직접 보니 반가웠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대만 프라이드 퍼레이드 행사 시작 전에 대만 최고층 빌딩인 타이베이 101 앞에서 BDSM과 페티시즘을 즐기는 이들이 모여 사진 찍는 이벤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도 그들 틈에 껴서 사진을 찍겠노라 다짐했다. 그러나 당일 아침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참가하지 못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퍼레이드 행사장으로 향했다. 동아시아 최대의 프라이드 퍼레이드라는 수식어가 과하지 않을 만큼 정말 굉장했다. 규모와 인파에 놀란 건 시작일 뿐이었다. 자신의 신체를 노출하고 다양한 성적 취향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 또 미치도록 부러웠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타이베이 시청 앞에서 대기하던 차량과 사람들이 행진을 시작했다. 나는 ‘댕댕이’들의 순서를 기다렸다. BDSM 차량을 보고 놀라워하는 것도 잠시, 페티시즘 차량이 출발했고 펍 마스크를 착용한 수 많은 ‘댕댕이’들이 그 뒤를 따랐다. 준비한 마스크를 미리 쓰고 있다가 그들 틈에 섞여 행진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대만 여행의 경험을 멍멍이 친구들과 나눴다. 그러다가 문득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댕댕이’들이 행진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고 느꼈다. 2014년부터 매년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가했는데 부스 행사장에서가 아닌, 행진하는 모습은 보지 못한 것 같다. (누군가 했지만 내가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몇 년 전 우연히 만난 트친 덕분에 가까워진 펍 플레이 문화. 이후 나만의 펍 마스크도 갖게 되었고 소중한 댕댕이 친구들도 생겼다. 하지만 왜 매년 퀴퍼에서 행진하는 멍멍이를 볼 수 없었을까 의문을 가지면서 내가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 2025년 6월 14일 제26회 서울퀴어퍼레이드 행진에 펍 마스크를 쓰고 붉은 뼈다귀가 그려진 퍼피 프라이드 깃발을 휘날리며 행진하려고 한다. 펍 플레이 문화를 가시화 하고 자긍심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다면, 대만에서 경험했던 것과 같이 한국에서도 펍 마스크를 쓴 참가자가 많아지고 퍼레이드에서 행진하는 퍼피가 한 명이라도 늘어나면 좋겠다.
펍 플레이가 성적 실천으로 재현되는 방식이라던가 역사를 잘 알고 있어야만 문화를 향유할 수 있거나 마스크를 쓸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니니까. 댕댕이 마스크를 마주할 때 내 안에서 어떠한 본능이 꿈틀대는 것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펍 마스크를 쓰자. 모두들 멋진, 섹시한, 귀여운 강아지가 되어보자!
2025년 6월 14일, 서울퀴어퍼레이드의 행진이 시작되면 퍼피 프라이드 깃발을 펼치고 행진 대오에 함께합니다.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거나 자랑하고 싶은 펍마스크를 착용하고, 펄럭이는 퍼피 프라이드 깃발 아래에서 함께 걸어요. 다같이 거리를 행진하면서 댕댕이들의 귀여움과 멋짐을 자랑해 보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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