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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코코넛의 눈코입귀

[코코넛의 눈코입귀] 아무튼 연대하기

by 행성인 2025. 10. 23.

 

코코넛(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토요일 밤, 친구를 만나러 나갈 준비를 한창 하고 있던 차에 성소수자부모모임의 상근활동가로부터 텔레그램 메시지가 도착했다. 본인이 () 아빠와 함께 찍은 셀카 한 장이었다. 죽기 전에 볼 것이라고는 절대 예상하지 못한 투샷이었다. 하기사, 그 날은 성소수자부모모임의 10월 정기 월례모임일이었고, 공식 모임시간을 한참 넘겨서도 아빠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아마 높은 확률로 뒷풀이까지 따라갔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친구를 만날 일이 있어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니 정말 오랜만에 취기 오른 아빠가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술 좀 적당히 마시고 다니라고 잔소리를 한 다음에 집을 나섰다.

 

아빠가 성소수자부모모임(이하 부모모임)에 참여한 것은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3월 초에 아빠에게 스트레스성 커밍아웃을 한 이후로 함께 부모모임을 한 번쯤은 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아빠를 부모모임에 데리고 나가서 열성적인 구성원이나 활동가로 만들거나, 정기적으로 모임에 참여하도록 유도하거나, 퀴어퍼레이드를 비롯해서 부모모임이 참여하는 행사에 나갈 의도는 전혀 없었다. 단지 만에 하나 아무 예고도 없이 덜컥 커밍아웃을 받아들이게 된 아빠가 나에게 티는 내지 않더라도 혼자서 온갖 걱정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성소수자에 대해 편향되거나 잘못된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없었다면 거짓말이고, 비슷한 상황에 놓인 경험이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이 나에게도, 아빠에게도 그런 염려를 덜 수 있다면 한 번쯤 그런 모임에 함께 가고 싶던 거다. 그런 자리를 아빠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매달 두 번째 주 토요일로 날짜가 고정되어 있는 월례모임과, 격일제로 일해서 휴일에 상관없이 이틀에 한 번씩 출근하는 아빠의 일정은 도무지 맞지 않았고, (더 중요하게는)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가 본 적이 없는 곳에 가거나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아빠에게 부모모임에 가자고 제안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러다 7월 부모모임 월례 모임 공지가 떠서 보니 마침 아빠의 휴일과 겹치는 날이었다. 사흘 정도 고민하고 네다섯 명에게 조언을 구한 다음(다들 하나같이 말은 꺼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아빠에게 용기를 내서 부모모임 얘기를 꺼냈다. 몇 시간 전부터 할말이 있다고 예고하고 간만에 마주보고 앉아서 얘기를 꺼냈으니, 아빠도 뭔가 안 좋은 소식이나 심각한 얘기가 아닐까 생각했을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의외로, 아빠는 몇 가지 질문(본인이 가도 되는 자리인지, 즉 성인 성소수자 자제를 둔 부모들이 오기도 하는 자리인지, 함께 갔으면 하고 바라는 것인지, 모임은 몇 시간 정도 이어지는지 등. 모임은 보통 세 시간 정도 이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두 시간 내외로 끝나는 것 같다고 거짓말했다.)을 던지고는 흔쾌히 가보겠으니 신청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서둘러서 나와 아빠의 이름으로 모임 참여 신청 구글폼을 두 번 제출한 후, 부모모임 상근활동가에게 아빠를 데리고 모임에 갈 예정이라고 말해 두었다.

 

모임 날이 되어서 아빠와 함께 집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빠가 더워 죽겠는 한여름에 무슨 결혼식에 가는 것마냥 격식을 차려서 입고 있길래 그 정도로 격식 차리지 않아도 되는 자리라고 말씀드리고 (내 말을 듣더니 아빠가 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조금 일찍 부모모임 사무실을 향해 출발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부모모임의 상근활동가가 맞이해 주었고, 뒤이어서 몇 번 뵌 적이 있는 부모모임 전 대표님과 눈이 마주쳤다. 나와 눈이 마주치다 시선이 내 옆에 멀뚱히 서 있는 아빠에게 가자, 우리 아빠라고 설명해 드렸다. 그러자 활짝 웃으시면서 어머, 이 아들 내가 너무 아끼지!’라고 하시더니 아빠를 데리고 자리를 안내해 주셨다.(부모모임 사무실에 아직도 쌓여 있는 아르쿠스의 『퀴어 기도문』에서 내가 쓴 글을 아빠에게 보여 주고 싶다고, 책에서 어디쯤 위치에 있냐고 여쭤 보시길래 부끄럽다고 마다했지만 포기하지 않으시길래 알려드렸다.) 아빠에게 먼저 가자고 했지만, 나란히 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부끄러워서 파티션 뒤, 상근활동가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모임이 시작되었고, 진행을 맡으시는 분들이 아빠에게 간단한 질문을 하며 참여를 유도하셨다. 아빠는 그런 곳에서 별 말을 안 할 줄 알았는데 내가 자리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십 분이 넘게 말을 이어갔다. 나의 인생사와 커밍아웃을 들었을 때 들었던 감정이 주된 요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금 있다가 다음 약속 장소로 이동할 예정이었고,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면서 영원히 파티션 뒤에 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아빠에게 아직 가지 않았다고 문자를 보내고(아빠가 빨리 가라고 답장을 보냈다) 후다닥 일어서서 화장실을 이용한 다음 부모모임 사무실 건물을 나섰다.

 

몇 시간 후, 월례모임이 끝났을 시간이 되어 안부차 아빠에게 연락을 했다. 모임이 어땠냐고 묻자, 뒷풀이에 참여하지 않고 바로 집으로 갔다는 아빠는 성소수자들이 심한 차별을 받는 사회의 실태에 굉장히 놀랐고, 이를 위해서 더 많은 활동과 사회에서의 인식 개선이 필요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 본인이 부모모임에 자주 나갈 필요성을 느꼈으며, 성소수자들을 향한 차별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활동에 참여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이 정도까지 예상하거나 바란 것은 아니어서 깜짝 놀랐다. 그냥 성소수자 자식들을 둔 부모님들 이야기를 듣고 성소수자로 사는 아들의 인생이 행복할 수도 있음에 안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데리고 갔는데 활동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 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

 

그 뒤로도 활동에 대한 아빠의 의지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언젠가는 조금 일찍 일정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 아빠와 이야기를 나눴다. 부모모임에 다시 나갈 거냐고 묻자, 나를 앉혀 놓고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시선의 심각함, 그리고 본인이 부모모임에서 이를 개선하기 위한 활동에 참여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십 분동안 연설을 늘어놓았다. 격일제로 일하는 아빠는 10월부터 모임 날짜와 근무일이 겹치면 휴가를 내서 모임에 참여할 거라고 말했다. 체력적으로 소진이 심한 사람에게 휴일이나 휴가는 사실 정말 소중한 것인데 부모모임을 위해 휴가를 사용한다는 아빠가 무슨 마음으로 이렇게 열심히 부모모임에 나가려는지 궁금했다.

 

친구들은 부럽다는 반응이 정말 많았고, 역시 피는 못 속인다는 반응도 많았는데, 가족에게 커밍아웃한 썰 '절망편'을 워낙 많이 들어서 이 상황이 꽤 운이 좋고 감사해야 하는 걸 인지했다. 아빠가 성소수자 의제에 대해 깊이 알거나 이해하거나, 혹은 무지개행동의 성소수자 정책 과제 같은 것에 깊이 공감해서 이러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빠가 애초에 부모모임에 나간 것도 내가 나가자고 해서 나간 것이고,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에 문제를 느끼고 활동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도 아마 그런 차별적인 인식을 내가 직접 겪는 것을 알아서일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중도 보수 정도의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아빠가,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내가 지지하는 진보 정당의 후보에 표를 준 것도, 내가 모 진보정당에 입당해서 활동하는 것을 알고 나서 앞으로 선거에서 그 정당에 표를 주면 되냐고 물어보는 것도 부모로서 나를 지지하고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아빠가 성소수자 의제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활동을 하면 필요한 만큼 듣고 배울 것이고, 만약 그럴 기회가 없더라도 할 수 있는 만큼 활동에 참여할 것이다. 도와주고 위하는 마음으로 활동에 함께하는 게 연대의 핵심인 것 같은데, 그런 면에서 아빠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나와 나의 활동에 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휴가와 체력과 시간과 노력을 써서 연대하는 것만으로 큰 선물이고, 앞으로도 기회가 되는 만큼 아빠가 어떤 활동에 참여하는지 지켜보고 싶다.

 

10월 초 어느 날, 아빠가 문득 성소수자부모모임의 10월 정기모임에 참가신청을 했다고 나에게 말했다. 10월 모임일은 근무일이었으니까, 정말 휴가를 쓴 게 맞을 것이다. 10월 모임 날짜는 나도 까먹고 있었고, 아빠가 부모모임 톡방에서 보고 혼자서 구글폼을 작성해 신청했을 텐데, 구글폼 작성하는 방법도 모르는 아빠가 혼자 신청했다고 하니 내색하지 않았지만 놀랐다. 이번 모임은 아빠 혼자 참석했고, 그렇게 부모모임의 상근 활동가가 이번에는 아빠를 뒷풀이에까지 데리고 갔다. 술기운이 오른 아빠가 그날 밤 나를 보고 제일 처음으로 뱉은 말은, ‘, 네가 그렇게 유명해?’ 였다. 아마도 부모모임의 상근 활동가를 비롯해서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내 얘기를 열심히 아빠에게 풀어놓은 것 같다. 내가 춤을 잘 춘다는, 전혀 사실무근의 이상한 얘기까지 듣고 온 아빠를 뒤로하고 친구를 만나러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아빠가 부모모임에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고, 무슨 활동을 하고, 어떤 형태의 연대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나쁜 상황 같아 보이지 않는다. 지금 꽤 만족한다.

 

 

(본인아님) AI에 성소수자 자녀와 함께 있는 사이좋은 한국거주 부자 이미지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해보았다. (편집부)